1.
데리다는 비교적 일찍 레비나스에 관심을 갖는다…
이런 관심에도 불구하고 데리다는… 레비나스의 타자성 개념에 대한 비판적 독해를 통해 그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반면,
후기로 갈수록 그에게서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레비나스에 대한 데리다의 문제 제기, 즉 근본적으로 레비나스의 사유는 자신이 비판한 서구의 사유형태를 벗어났는가에 대한 질문 속에서 두 철학자의 사상적 간극을 읽을 수 있다.
레비나스에 대한 데리다 입장을 면밀히 살펴봄으로써 레비나스의 타자철학의 의의와 한계뿐 아니라 데리다 사상의 독창성이 어떻게 성취되는가의 측면도 해명해보고자 한다.
2.
데리다는 레비나스의 철학적 기획의 의의를 기존의 철학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적 로고스를 해체하고 넘어서고자 하는 시도에서 찾는다. 말하자면 레비나스는 기존의 철학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언어를 추구하였고 모든 개념과 인식 너머에서 타자를 사유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레비나스가) 앞에서 타자와의 관계에서 인식의 계기를 배제했다고 한다면, 이번에는 타자에 대한 절대적인 책임과 의무로 인해서 자연스레 타자에 대한 의심의 질문 기회는 박탈당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부터 데라다의 질문은 시작된다.
3.
데리다의 논문 [폭력과 형이상학]은 레비나스의 이후 사상의 궤적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 논문에서 데리다는 절대적 타자성을 펴방하는 레비나스 철학이 갖는 내재의 모순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무엇보다 레비나스의 타자론이 절대적 타자를 논하고 있지만 여전히 동일자의 사유가 뿌리내리고 있는 현전이나 기원의 관념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을 다양한 논거를 들어 비판한다.
레비나스에게서 언어는 윤리적 관계 속에서의 살해금지의 간청과 그것의 표현이 함의하고 있는 타자성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이런 맥락에서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언어적 관계를 대화 (discours)라 부른다.
그런데 이런 윤리적 언어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데리다처럼 타자 자체를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존재 술어가 타자에게는 오히려 더 적합한 것은 아닌가 하고 질문해 볼 수 있다.
말하자면 타자의 타자성을 훼손됨 없이 기술하는 데 있어,
타자 그 자체로 존재하게 하는 (laisser-etre) 것이 더 우선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타자를 기술할 때는 타자와 자아의 비대칭성을 통해 타자를 우위에 두기보다 타자와 주체의 존재 자체를 다루는 존재론적 언어가 적합할 수 있다… 존재론적 언어는 주체의 윤리적 책임이나 개입 없이 타자를 타자로서 존재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점에서 데리다는 존재론적 언어를 타자의 타자성 자체를 드러낼 수 있는 비폭력적인 통로로 본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타자성이 존재론적 언어에 기반해야 한다는 주장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존의 철학이 중립적 존재의 언어를 통해 타자를 기술하고자 했지만, 이 언어의 중립성이 타자와 동일자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오히려 말소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레비나스에게는 윤리적 관계 밖에서 타자와의 관계를 찾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그런데 데리다는 이런 레비나스의 시도에 대단히 비판적이다.
만일 기존의 철학 언어와는 다르게 절대적으로 이질적이며 초월적인 언어를 타자의 언어로 상정한다면,
이 두 언어 사이의 소통은 과연 가능할까?
이렇게 절대적으로 다른 언어는 과연 타자에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동일자의 언어와 단절되어진 순수 윤리적 언어를 상정한다면, 이런 언어는 회의하고 판단하며 인식하는 철학적 담론과 단절되어, 결국 이해불가능한 언어가 되거나 일종의 침묵이 되고, 이런 침묵 속에서 ‘타자에 대한 폭력’이 ‘타자의 폭력’과 뒤섞일 수 있기에 윤리적 언어의 순수성은 최악의 폭력으로 퇴락할 수 있다. 그러기에 이런 최악의 폭력을 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성의 언어가 필요하다.
이성의 언어, 동일자의 언어는 밤과 침묵의 폭력과 같은 최악의 상황을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 동일자의 언어는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한 차악으로서 그 존재 의의를 갖는다. 하지만 이렇게 동일자의 언어들에 의존함으로 인해 타자의 절대적 타자성은 일반화되고 개념화되어 파괴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여기에 일종의 아포리아가 있다. 이런 아포리아에 직면해서 데리다는 그것을 해소하는 대신 적극적으로 타자 담론의 유한성을 해명하려는 것 같다.
데리다는 이성의 빛과 담론이 타자의 타자성을 훼손하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전통적으로 서구철학에서 규정했던 것과 달리 담론과 폭력을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담론 자체가 근원적으로 폭력적 성격을 갖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동일자의 담론이 폭력적이라고 하더라도 최악의 폭력을 피하기 위해서 이 담론을 거부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데리다는 이런 상황 속에서 동일자 담론의 폭력성에 대한 해법을 일종의 지속적인 비판과 해체의 과정에서 찾는다…
여기서 타자성을 보호하기 위한 전략은 동일자 언어의 외부에 있을 다른 순수한 언어를 찾는 것이기보다 동일자의 폭력에 대해서 비판하고 그 담론의 폭력성을 폭로하는 것이어야 한다.
모든 타자의 언어는 전통의 누더기를 걸쳐야 하며, 전체성의 언어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순수 타자성의 언어는 불가능하며,
동일자의 언어의 폭력을 겪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데리다의 핵심적 주장이다.
데리다가 볼 때,
레비나스는 자신이 생각했듯이 그렇게 하이데거로부터 멀리 있지 않다.
존재든 타인이든 진정한 의미에서 차이의 사유는 자신을 은폐하는 가운데만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 데리다의 생각이다. 그리고 레비나스의 논점도 타자의 타자성이 동일자의 언어, 이성의 언어에 의해 은폐되면서만 탈은폐된다는 점에서 하이데거의 그것과 유사하다.
정리해 보면 데리다는 레비나스의 타자론의 의의를 인정하면서도, 레비나스의 타자성이 기존 철학이 기반하고 있는 현전성과 기원의 사유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극복을 감행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데리다의 레비나스 독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의구심을 가질 수 있다.
[폭력과 형이상학]에서 데리다의 독해는… 절대적 타자의 타자성을 적극적으로 논하기보다 레비나스의 타자 담론이 갖는 구조적 특징과 그 한계를 보여주는 데 그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데리다의 논의는 타자의 가능 조건에 대한 분석에 한정되어 있느 것 같다. 더욱이 데리다의 분석은…
과도하게 타자의 비현전성에 집중함으로써 타자의 타자성이 어떻게 동일자에게 도래하고, 동일자의 전체성을 붕괴시키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기는 힘들다.
4.
데리다는 레비나스 타자론의 구조적 약점을 비판했던 초기의 입장에서 그의 사유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으로 선회[한다.] 그 중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환대’의 개념이다.
먼저 데리다의 환대 개념에서 특이한 점은 그가 환대를 다룰 때 여타 사회.윤리 이론 중의 하나가 아니라 모든 사회.윤리의 이론의 근원적 토대로 이 개념을 규정했다는 것이다.
데리다가 환대를 윤리학의 중심 개념으로 여긴 것은 타자의 위상이 윤리의 근간을 이룰 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타자의 타자성에 대한 존중이 바로 데리다의 환대론의 핵심이며, 그런 한에서 환대론은 윤리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
타자성에 개방된 환대를 명확히 하기 위해,
데리다는 환대를 무조건적 환대와 조건적 환대로 구별해서 설명한다.
여기서 우리는… 데리다의 입장을 옹호하기보다 우선 몇 가지 의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첫째 무조건적인 환대가 환대의 근본적인 조건이라면, 논리적 측면,
즉 초월논증과 같이 환대의 가능조건으로서 무조건적인 환대를 논하면 되는 것 아닌가?
왜 굳이 무조건적 환대를 논하면서 다시금 무조건적 환대가 일으킬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인가? 둘째 이렇게 피환대자의 신분에 대한 질문이나 회의가 생겨나게 된 이유는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무조건적 혼대 속에 조건적 환대가 개입하게 된 과정과 이유를 살펴보아야 한다.
제삼자의 등장과 관련하여 레비나스와 데리다의 입장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레비나스는 타자와 주체 사이의 이항적 관계 이후에 제삼자의 등장을 위치시키지만, 데리다는 제삼자를 이항적 관계 속에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본다.
데리다는 두 환대가 서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지만, 절충하는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무조건적인 환대의 법과 조건적인 환대의 법,
혹은 절대적 환대와 제한적인 환대의 관계를 “모순적이고 이율배반적”이라고 본다.
데리다는 자신의 정의에 대한 이해가 레비나스에서 왔음을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레비나스가 제안한 고통받는 타자의 정의에 대한 요구를 급진화한다. 타자에게 열린다는 것은…
무조건적인 열림을 의미하며, 그가 요구하는 무조건적 정의와 그에 대한 무한한 책임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우리는 데리다 사유의 중요한 축이 타자 개념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고 그것의 이론적 엄밀성을 통해 도달하고자 한 것이, 바로 타자를 위한/에 대한 정의의 관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타자성의 이념은 레비나스의 타자성과 깊은 공명을 하고 있다고 최종적으로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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