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가명저술과 간접전달
키에르케고르는 많은 저작을 가명으로 저술.
키에르케고르의 저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왜 가명으로 쓰는 것을 선택했고,
그 가명으로 쓴 목적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함
1 익명을 통해서 그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
Maybe not,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음
2 문학적 풍성함을 연습하기 위해서?
Maybe
3 소설처럼 글을 쓴 것이 아니라 진짜 소설을 쓴 것?
그렇다면 동기는?
돈? Maybe
not, 명성? Maybe
그러나 이를 넘어선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야 함.
키에르케고르가 작가로서 성취하기 원했던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가명저작이 이 성취를 어떻게 도왔는가?
키에르케고르의 궁극적 관심은 종교적인 것,
가명저작과 “간접전달”은 이를 위한 방법
무엇이 간접전달이며 이것이 왜 종교적 전달에 중요한가?
우리는 간접전달에 대한 기록을 [결론적 비학문적 후서]에 의존할 수 있는가?
간접전달에 대한 기록은 [결론적 비학문적 후서]에서 충분히 발견 가능.
특히, [후서]는 실명저작권의 전환점이 되는 책
간접전달과 “이중반사”
[후서]에서 간접전달은 많은 핵심개념들과 연결.
그 핵심개념들은 실존의 기본적인 개념,
실존의 단계 혹은 양상의 개념,
주체성과 객관성을 비교한 개념,
소크라테스의 산파로서의 교사의 개념,
즉, “산파술”의 개념들이 모두 포함됨
소크라테스의 산파술:
학생들 안에 이미 있는 진리를 불러내는 것이 교사의 임무.
교사는 산파의 역할,
학생들 자신의 생각을 “탄생”하게 도와줌
키에르케고르는 현대의 소크라테스.
개개인은 반드시 스스로 진리를 발견해야 한다.
(객관적 사고 대 주관적 사고,
객관적 이해 대 주관적 이해,
객관적 전달 대 주관적 전달,
지식의 전달 대 방법의 전달,
객관적 이해는 단순한 새로운 지식의 전달,
주관적 이해는 한 사람의 실존을 포함,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이해 포함,
후자는 수취인의 이중(재)반사reduplicate
(?)에 의해 얻어진 지식이며,
전달자가 반드시 따라야 하는 일종의 “방법”;
pp. 58-9)
이중 반사double
reflection: 진정한 주관적 이해는 먼저 사람들에게 그 개념을 이해하게 하고(일차 반사)
그 개념이 그 사람의 삶에 적용될 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다시 생각한다 (이차 반사).
“객관적” 전달은 “이차 반사”를 요구하지 않는데,
일종의 “말잔치”이며 “단순한 이해”만 낳음.
인간의 실존과 관계되는 전달은 반드시 간접전달일 수밖에 없는데,
“이중 반사”가 반드시 일어나야 하고 그 개념을 전달받는 수취인의 활발한 참여와 전유(이해)가 포함되어야하기 때문.
간접전달:
한 사람을 도와주는 기술 혹은 전략,
실존적인 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성공적으로 전달하는 방법
인간실존에 대한 키에르키고르의 이해:
열정과 선택
인간은 중요한 역할을 선택하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만들어 가는 방식으로 실존existre한다. 이러한 강조는 키에르케고르에게 “실존주의의 아버지”라는 명성을 가져다 줌
[철학적 단편]에 나타난 인간 실존의 이중적 구조:
“그 자신이 실존으로 들어오는 것과 함께 실존으로 들어온다.”
인간은 자연의 한 부분으로 다른 물리적 개체와 같은 방식으로 실존,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들은 “실존으로 들어온다.”
하지만 인간들은 가능성들이 포함된 자연적 질서의 한 부분으로 실존,
인격체들로서의 그들 자신의 존재는 일종의 과정,
이 과정 안에서 어떤 가능성들이 실존으로 들어오게 된다.
인간의 가능성들은 그들 자신의 자각에 의해서 구성됨.
이 가능성들을 활성화시키기 위해서 생각과 성찰이 중요한 역할.
그러나 생각함 없이 실존할 수 없지만,
생각만 한다고 해서 실존한다는 것은 아니다.
클리마쿠스는 인간 생각 그 스스로는 멈출 수가 없는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인간 행동이 그 종료를 요구한다고 주장.
우리는 생각과는 다른 어떤 것이 느껴질 때,
생각하기를 멈추는데,
이것은 인지적인 삶보다는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감성적 삶이라고 말하는 영역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이것을 “열정”이라고 말했다.
삶은 유한하고 우리가 생각으로 보내는 시간은 행동을 지연시킨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을 멈추고 행동할 수 있는데,
그것은 열정이 있기 때문.
이 열정은 원함,
갈망, 희망, 바람, 사랑 등과 같은 수천가지의 감정적 태도.
“열정 없이는 실존이 가능하지 않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열정은 한 사람의 삶에 방향성과 연속성을 제공해주는 끊임없고 지속적인 돌봄과 같은 것.
한 개인의 열정 개발을 도와줄 수는 있지만 각자 발전시켜야 하는 열정은 개인적인 것.
이러한 관점에서 내가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려고 하는 것은 간접적.
예술로서의 간접 전달
가명을 사용하는 것은 일종의 “예술적 전달”,
독자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전략적으로 고안됨.
소설을 통한 의미전달과 같은 전략의 장점:
1 삶에 대한 특별한 관점을 구체적으로 보여 줄 수 있는 장점,
2 실존적 성찰 혹은 주체적 성찰을 동기부여하기 위해 잘 고안된 방법
결국 키에르케고르의 가명 사용은 일종의 “예술적”
전달에 참여하는 전략,
주체적 사고를 함양하는 것을 의도함
또 다른 기법들:
아이러니와 유머를 사용하는 방법.
아이러니: 소크라테스식 질문법,
유머: 헤겔적 “체계”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보다 효과적
간접전달의 마지막 단계:
“실험” (Experiment),
키에르케고르적 실험은 생각 실험 thought experiment(또는 철학적 사고 실험)에 가깝다.
이는 어떤 일을 상상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인데 이는 한 가지 주제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이해를 분명하게 해준다.
이러한 측면에서 간접전달 기법은 상상력을 제공
산파술의 개념과 간접전달의 한계
간접전달은 단순히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필수적.
실존에 대해서 전달하려는 사람들은 반드시 간접전달을 사용해야 함.
객관적 지식의 전달과 “역량”을 전달하는 것의 차이 구별.
(모든 사람은 이미 옳은 것과 그른 것 혹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알고 있기에 그 “역량”을 배양하는 것이 필요)
전자의 경우 직접적으로 전달이 되지만 후자는 간접전달이 요구됨.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낙관적인 견해로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도 의심의 여지가 있음)
간접전달의 한계:
1 수용하는 측면에서 간접전달의 내용이 항상 정확하게 받아들여지고 전유되는가?
2 직접전달도 때로는 다른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는 경우가 아예 없는가?
키에르케고르는 윤리적 전달을 넘어서 종교적 전달로 갈 때 간접전달은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
기독교는 역사적 사건 (객관적 지식)에 기반.
“윤리적, 종교적 전달”은 “직접적-간접적”이 되어야 함.
3장 진리와 주체성
키에르케고르는 인간 그 자체는 “절대”에 도달할 수 없고 “진리”를 알 수 없다고 비판.
자기self가 실체적인 실제라는 것을 인정.
그러나 우리가 자기를 단순한 “독립체”
또는 단순한 “실체”라고 생각한다면 자기의 독특한 특성 이해 어려움.
자기가 된다는 것은 무언가가 되어가는 과정을 시작하는 것이며 자기됨에 대한 성취의 기대가 있는 것
[죽음에 이르는 병]에 나타난 자기: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자기 자신”
키에르케고르는 헤겔이 제시한 정신으로서의 실제의 개념은 반대하였지만 인간을 “정신”으로 생각.
자기는 반드시 정신spirit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 (pp. 82-3). 자기는 본질적으로 관계적.
첫째, 자기는 일종의 “종합”이며 그 관계 혹은 결합은 반드시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과 관계”해야만 함
자기의식이 가능한 존재로서의 자기에 내재되어 있는 이중성.
자기의식은 자기라는 개념에 이중성을 제공.
자기는 부분적으로 유한하며 과거에 의해서 제한,
그러나 이상에 의해서도 구성되는데 그것은
“영원”한 것이고 무한한 성격을 가짐
자기는 내적으로만 관계적인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로도 구성됨.
자기로서의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 자신 밖의 무엇인가와 연결되어 있는데 우리 자신이 되는 과정은 “타자Other”와의 관계에 의해서 수행 (프로이트의 대상관계이론 Object Relations Theory와 비교)
키에르케고르의 “타자”에 대한 언급은 하나님에 대한 언급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
인간 자기는 완벽하게 자율적일 수 없지만 그 자기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본다.
그의 정체성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고 지배적인 사회적 가치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자기 자신으로 든든한 자리매김”을 할 수 있다.
“너 자신이 되는 것”:
실체와 성취로서의 자기
키에르케고르의 자기 이해 복잡함.
한편으로 자기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통합체로서의 실체적인 실제,
다른 한편으로 자기는 내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어떤 나 자신.
그러한 나 자신으로서의 자기는 독특한 통일체로 가능성의 부분으로 구성됨.
자기는 내가 반드시 되어야 하는 어떤 것.
그래서 자기됨은 일종의 성취.
키에르케고르는 두 가지 관점 (하나님의 창조물로서의 자기,
되어져야 할 자기)을 다 지님
실존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무한과 유한,
영원과 시간 사이에 잉태된 아이이며 끊임없이 분투하는 어떤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급진적 선택”의 지지자인가?
실존의 세 단계 혹은 세 가지 양식:
미학적 삶의 양식,
윤리적 삶의 양식,
종교적 삶의 양식
각 단계의 순위를 정하는 것은 개인적 선택,
다른 사람에게는 또 다른 선택의 가능성
“급진적 선택”: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선택,
특정 선택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 선택은 근본적으로 하나의 선택이며 그 선택은 결국 사람을 위한 선한 이유가 되기 때문
매킨타이어의 [덕의 상실]:
키에르케고르와 칸트는 도덕성이라는 개념에는 일치.
그러나 키에르케고르는 도덕성에 이성적 정당성을 제시하려는 시도가 실패했다는 개념을 함께 물려받음.
칸트의 실패가 키에르케고르의 출발점을 제공.
그것은 이성이 할 수 없었던 일을 하기 위해 (의지적)
선택의 행위를 요청해야 했다는 것
매킨타이어는 키에르케고르의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 미학적 삶과 윤리적 삶 사이의 선택에 정당성을 확인해주는 어떤 외부적 “결과”는 없으며 이러한 선택을 키에르케고르는 급진적이며 “기준이 없는”
선택이라고 생각했다고 주장
그러나 에반스는 누군가가 어떤 사안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제시되는 이유 없이]
급진적인 선택을 해야한다는 매킨타이어의 키에르케고르 해석에 동의하지 않음.
이유는 강제성을 가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기 때문.
키에르케고르의 미학적 삶과 윤리적 삶 사이의 선택은 전혀 급진적이지도 않고 각각의 삶에서 전혀 기준 없는 선택도 아님
키에르케고르의 주체성과 고전적 정초주의에 대한 거부
고전적 정초주의:
1 진정한 지식은 아주 높은 확실성에 의해서 알려진 진리의 기초에 근거해야 함 2 확실성을 취득하는 유일한 방법은 총체적으로 객관적으로 되는 것
고전적 정초주의자들은 이성이 결정하지 못한 어떤 이슈에 직면할 수밖에 없고 이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급진적 선택과 같은 것을 고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는 고전적 정초주의자들의 개념에 대한 일종의 도전.
절대적 확실성은 유한한 인간 존재에게는 성취불가능
고전적 정초주의자들은 인간의 감정을 왜곡된 필터와 편견으로 바라봄.
그러나 키에르케고르는 “주체성”과 “내면성”이 인간 실존의 핵심이라고 봄.
우리의 과제는 주체성을 올바른 방법으로 형성하고 발전시키는 것.
키에르케고르는 “진리는 주체성이다”라고 주장
“진리는 주체성이다”
인식론적 주관주의나 상대주의를 지지하는 것은 아님
경험주의:
“존재와 더불어 생각하는 것”
thinking with being, 이상주의:
“사고와 더불어 생각하는 것”
being with thinking, 경험주의에서 실제는 사물,
이상주의에서 실제는 이성
존재와 더불어 생각하는 관점 correspondence view는 열망 desiderantum을 의미,
경험적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은 항상 유동적이기 때문에 완전한 구현이 불가능.
실존하는 존재는 “되어짐 becoming의 과정에 있는 그 자체”
클리마쿠스의 관심은 진리에 대한 철학적 이론의 정확성이 아니라 진리를 소유한다는 것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것.
“진리는 근본적으로 실존과 관련되어 있다.”
진리에 사는 것과 진리를 아는 것
“진리는 주체성”에 대한 두 가지 반대
1 철학적 관점,
인간 삶을 참/거짓으로 나눌 수 없다.
명제만 가능하다.
에반스는 왜 그것이 참된 것으로 서술될 수 없다고 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
키에르케고르 역시 인간의 이러한 삶의 방식이 가능하다고 생각
2 객관적 진리와 주체적 진리가 서로 상호보완적인가?
내면성은 객관성으로 드러난다.
객관적으로 진리를 이해하려는 방식에 감성과 열정을 덧붙임
키에르케고르의 관점에서는 순수한 객관성을 선택한 사람은 그이 삶과 신념에서 진리를 잃어버림.
주체성을 선택한 사람은 두 영역 모두에서 진리를 획득할 가능성이 있음
키에르케고르는 우리의 질문이 전혀 “설정”될 수 없다고 믿었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체계가 없기 때문.
그로 인해 의심은 언제나 일어날 수 있고 질문은 언제든지 제기될 수 있음.
우리가 확신을 살아내기 이전에 지적 확실성을 요구받는다면 평생 살아낼 수 없음.
우리는 신념이나 신앙에 근거해서 살 수 있지만 이성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선한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함.
우리의 신념에 관한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와 관련됨.
비진리로서의 주체성
주체성은 비진리라는 주장은 주체성은 진리라는 주장과 정면으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그렇지 않음.
주체성이나 내면성이 진리라는 논의는 주체성이 비진리라는 방식으로부터 시작.
진리가 인간 삶에 관계하기 위해서는 주체성을 통해서만 가능.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