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23일 토요일

그라마톨로지 (자크 데리다) 3 분절화 (pp. 523-587) 발췌 요약


번째 명제. “말할 있는 능력은 동물과 인간을 구별시킨다.” 언어는 최초의 사회적 제도이다. 따라서 그것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말은 인간에게 속하고, 인간의 인간성에 속한다. 하지만 루소는 말할 있는 능력과 언어를 구분한다. 말의 사용은 보편적으로 인간적인 것이지만 개별 언어들은 다양하다. 최초의 사회적 제도인 말의 형태는 자연적인 원인에 기인한다. 루소는 일반적이고 지리적인 차이들을 자연적인 원인들로 설명한다.

번째 명제. “ 인간을 다른 인간이 느끼고, 생각하고, 자기와 닮은 존재로 인지할 때부터 자기 감정과 사고를 소통하려는 욕망 또는 욕구는 그럴 있는 수단을 찾도록 애쓰게 만들었다.” 순수한 자연 상태를 넘어서는 순간, 절대적 분산이 최초로 극복되는 순간부터, 사람들은 언어와 동시에 사회를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인간은 자연을 떠나는 순간에야 비로소 도래한다. 역시 자연적인 원인들을 통해서 의사소통의 수단을 설명해야 것이다. 인간은 자연적인 성향 또는 도구를 사용할 있었을 뿐이다. 감각들을 사용했을 뿐이다.

번째 명제. 따라서 인간은 타자가 느끼는 감각들에 대해서 자신의 감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다. 타자가 느끼는 감각들에 대해 행동하기 위한 개의 수단이 있다. 그것은 움직임과 목소리다. 그래서 흩어진 사람들 사이에, 언어의 수동적인 기관으로서의 시각과 청각만이 남는다. 따라서 언어 활동의 도구들 대한 분석은 자연 상태를 특징짓는 순수한 분산 상황에 의해 지배된다. 언어는 분산에서만 도래할 있었다. 분산은 언어 활동에 의해 극복되지만, 바로 이런 이유로 그것은 자연적인 조건을 규정한다. 자연적인 조건, 언어 활동이 출현하게 되는 근원적 분산은 계속해서 언어 활동의 환경과 본질을 지적한다. 차이를 제도로 도입하는 것으로 보이는 분절화는 자연적인 분산을 자신의 토양과 공간으로 삼는다. 잘라 말해 공간을 갖는 것이다.

몸짓 언어와 목소리의 언어, 시각과 청각은 똑같이 자연적이다.” 그렇지만 하나는 최초이고 최상이라는 자격으로 인해서 다른 것보다 자연적이다. “보다 쉽고 관습과 계약에 종속되는것은 바로 몸짓 언어이다.

무언의 기호는 직접성 속에서 표현될 자유의 기호이다. 무언의 기호가 표현하는 것과 그것을 통해 표현되는 것은 고유하게 현전한다. 거기에는 우회도, 익명도 없다. 재현적적 (대리적, re-presentative) 간접성이 모든 의미 작용의 체계를 침략했을 , 무언의 기호는 예속화를 의미한다. 기호에서 다른 기호로 그리고 대리 재현시키는 것에서 다른 대리 재현시키는 것으로 옮아가는 끝없는 순환과 다시 돌려보내기를 통해서, 현전의 고유성이란 이상 생겨나지 않는다. 아무도 누구를 대신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으며, 심지어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상 의미를 구비하지 못하며, 이상 그것을 멈추게 없고, 끝없는 의미의 운동 속을 옮아갈 뿐이다. 기호 체계는 바깥쪽이 없다.

몸짓은 음성 언어의 첨가물이지만 첨가물은 인위적인 대리보충이 아니라 자연적이고 표현력 있고 직접적인 기호에 의뢰하는 것이다. 몸짓은 계약에 종속된다는 점에서 보편적이다. 하지만 몸짓이 거리, 사이 두기, 가시성의 환경을 가정한다면, 소원함 또는 중개가 지나쳐 가시성을 중단할 효율성은 멈춘다. 음성 언어가 몸짓을 대리한다. 언어에서 모든 것은 대체물이고, 대체물이란 개념은 자연과 문화의 대립에 선행한다. 대리 보충은 (몸짓만큼) 자연적일 있고, (음성 언어만큼) 인위적일 있다.

루소는 손짓과 몸짓을 구분한다. 현전의 잔영을 그리는 몸짓은 말없이 최초의 은유를 다루고 있다. 손짓은 말로 가득한, 신중하지 못한 첨가물이다. 그것은 나쁜 대리 보충이다.

상형 문자 언어는 정념에 언어이다. 야만성은 언어의 정념적 기원에 제일 가깝다. 역설적인 것은 그것이 음성 언어보다는 문자 언어 쪽에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점에서 문자(에크리튀르) 차연을 제시하는가? 문자(에크리튀르) 음성 언어에 선행하고, 음성 언어에 뒤이어 오며, 음성 언어를 포함한다. 실제로 문자 이론은 음성 언어의 족보를 파헤치고 일종의 대리 보충적 부록으로 자신을 제안한다. 문자(에크리튀르) 대한 최초의 암시는 일체의 구별이나 욕구의 정념에 대한 차이에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다. 문자 (에크리튀를) 쓴다는 이득은 새로운 개념 틀을 요청한다. 하지만 이러한 문자를 쓰는 이득의 통일성을 루소는 명시적으로 선언할 없었다. 그는 단지 담론을 상이한 장소에서 작동시키면서 밀수하는 방식으로 그것을 기술할 있을 뿐이다. 자신과 모순되는 것을 무릅쓰고 루소는 문자 언어를 욕구 쪽에, 음성 언어를 정념 쪽에 놓는다.

소리는 우리를 감동시키고, 우리의 관심을 끌고, 우리를 정념에 사로잡히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를 파고들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재성의 요소이다. 왜냐하면 소리의 본질, 소리의 고유한 에너지는 소리의 수용이 반드시 있어야 함을 함의하기 때문이다.

목소리에서 대상의 현전은 이미 사라진다. 사물은 사라지고, 목소리는 음성 기호로 그것을 대체한다. 말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 모사현(시물라크르) 보여 뿐이다. 그런데 모사형은 진리보다도 심오하게 우리를 감동시키고, 훨씬 효율적으로 우리에게 충격을 준다.”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대상의 현전이 아니라 음성 기호이다.

이렇게 해서 루소가 다른 곳에서 그처럼 엄격하게 평가 절하한 욕구의 사회에 대한 향수가 설명된다. 무언의 사회, 모든 언어의 기원 이전에 있었던 사회에 대한 , 엄밀하게는 사회 이전의 사회에 대한 꿈이다.

우리는 루소가 동물 언어의 고정성이라고 간주했던 것과 인간 언어의 진보 사이에 있는 유일한 차이는 어떤 기관, 어떤 감각에도 기인하지 않으며, 가시성의 차원에서도 청각 차원에서도 모색되지 않는다는 점을 간파할 있다. 다시 그것은 신체 기관을 다른 신체 기관으로 대체시키고, 공간과 시간을, 시각과 목소리를, 손과 정신을 분절시키는 힘이며, 여러 언어의 진정한 근원’ (또는 비근원) 바로 대리 보충성의 능력이다. 그것은 자연과 계약의 분절, 자연과 자연의 모든 타자들의 분절과 마찬가지로 분절화 일반이다.

기원의 각인

이러한 우회는 불절화란 개념의 기능을 다시 포착하기 위해서 필요했다. 분절화는 언어를 개시한다. 분절화는 음성 언어를, 정념에서 태어난 제도로서 개방시키지만 근원적 음성 언어로서의 노래를 위협한다. 분절화는 언어를 욕구와 이성 쪽에서 도출시키며, 따라서 문자 언어에 들어맞는다. 언어가 분절화될수록 악센트가 줄어들고, 이성적일수록 음악적이며, 문자로 쓰일 잃는 것이 적을수록 욕구를 표현한다. 그것은 북방 언어가 된다.

루소는 기원성과 대리 보충성을 분리시키고자 한다. 루소에게 기원이라 이름 붙은 것이 대리 보충성 체계 속에 위치한 점에 불과하다는 것은 생각될 수도 없고 용인될 수도 없다. 대리 보충성은 실제로 언어를 언어의 기원 조건, 조건법 또는 기원과 결부된 미래로부터 떼어 놓고, 그것이 미래에 그렇게 되어야 하며 또한 과거에 그렇게 되었어야 했으나 결코 그렇게 되지 않았던 것으로부터 언어를 떼어 놓는다. 언어는 일체의 기원 관계를 지연시키면서 비로소 태어날 있었다. 역사는 기원의 대리 보충의 역사이다. 요컨대 그것은 기원적 대리 보충물이며 기원으로서의 대리 보충물이다.

대리 보충성은 인간의 고유성을 만드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음성 언어, 사회, 정념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고유성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인간은 인간의 부수적 또는 본질적 속성이 아닌 대리 보충성 이후 자신에게 예고되도록 방치된다. 왜냐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현전도, 부재도, 아무것도 아닌 대리 보충성은 인간의 실체도, 본질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현전과 부재의 놀이며, 어떤 형이상학이나 존재론의 개념으로도 이해될 없는 놀이의 개시이다. 이런 이유에서 이러한 인간의 고유성은 인간의 고유성이 아니다. 고유성 일반의 해체 자체이며 자기 자신에 대한 근접성의 불가능성이다. 순수한 현전의 불가능성, 욕망이다. 인간은 대리 보충성 놀이의 타자를 배제하면서 한계를 그려 나갈 때에만 인간이라고 불린다. 인간이 인간으로 불리는 역사는 이들 사이의 모든 한계의 분절화이다. 우리에게 문자 언어 (에크리튀르) 갈수록 이러한 대리 보충성 구조의 다른 이름으로 나타날 것이다.

루소가 대리 보충을 사유하지 않은 그것을 사유하고 있으며, 그가 말한 것과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일치시키지 않고 있고, 기술을 명시적 선언에 일치시키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는 족하지 않다. 낱말과 사물은 오직 대리 보충적 구조만이 생산하고 표시할 있는 지시적 한계들이다.

루소가 동시에 구출하려 했던 모순적인 가지 가능성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루소는 일을 해내는가? 한편으로 그는 분절화가 원리가 되어 체계를 이루는 모든 (정념, 언어, 사회, 인간 ) 적극적인 가치를 부여하면서 긍정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동시에 분절화에 의해 말살된 모든 (악센트, 생명, 에너지, 여전히 정념 ) 진술하려고 한다. 대리 보충은 가지 가능성의 분절된 구조이며, 손상되지 않은 순수함을 부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것으로 이끌면서 루소는 개의 단순한 , 논리적으로는 모순되는 것을 방치하고, 분해시키며, 분리할 있었을 뿐이다.

네우마

루소의 불가능한 자연적 목소리 모델은 유년기의 모델이다.

말하는 법을 알기 전에 말하는 . 아이는 말하는 것을 터득하기 전에 말한다. 그에게는 언어가 있지만 언어에 결여된 것은 그것을 대체할 있는 , 하나의 기호를 다른 기호로, 하나의 표현 기관을 다른 표현 기관으로 대체할 있는 힘이다. 언어에 결여된 것은 인간에게 고유한 능력이며, 그것은 언어를 사용하기 위해 자기의 신체 기관을 사용하는 것이다. 적당한 음성 기관이 없다면 동일한 목적을 위해 다른 기관들을 사용하게 한다.” 아이에게는 언어가 없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의 언어만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는 불쾌감의 온갖 형태가 서로 대체될 비로소 말하는 법을 배운다. 그래서 아이는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이행하고, 기호에서 다른 기호로 이행하며, 의미를 만드는 실체들과 놀이하게 된다. 아이는 인간적 차원으로 규정된 대리 보충의 차원으로 진입한다.

말하는 법을 알기 전에 말한다는 . 인간에게 고유한 음성 언어가 선하기 때문에 유년기는 선이다. 아이는 말한다. 말할 아는 것은 분절화란 악을 동반하기에 유년기는 선이다. 그런데 아이는 말하는 법을 모른다. 하지만 유년기는 이미 말을 하기 때문에 선이 아니다. 또한 유년기는 말하는 법을 아는 인간의 고유성도 선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선이라 없다. 거기로부터 유년기에 대한 판단의 불규칙적인 불안정성이 기인한다.

분절화는 사람들이 그것을 어디에서 취하든 수족과 기관의 분절화이며, (고유한) (속에서의) 차연이다. 바로 이러한 자연적인 표현에서 차연을 소거하기에 제일 적절하게 보이는 것은 숨결이 아닌가? 말하고 노래하는 숨결, 그것은 언어의 숨결이기도 하지만 미분절된 숨결이다. 우리에게는 순수한 숨결, 손상되지 않은 생명, 미분절된 노래와 언어, 공간적 간격(사이 두기) 없는 음성 언어로 전범적인 모델이 있다. 그것은 네우마이다. 순수한 모음 발성, 말이 없는 미분절된 노래의 형태로 이름은 신에 의해 우리에게 영감으로 주어지고 신에게만 호소될 있는 숨결을 의미한다.

NEUME: 여성 단수. 일종의 종교 음악을 나타내는 술어.

말할 알기 전에 말하는 , 침묵을 지킬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 기원의 한계는 순수한 현전의 한계이거니와, 생동감 넘칠 정도까지 현전하고 환희 속에서 느껴진다. “현전의 시간에서는 현재가 어떤 지속의 흔적도 연속의 흔적도 남기지 않고 지속된다.”

네우마, 자기 자신을 향한 현전의 매혹, 시간의 미분절된 경험, 모든 것은 유토피아를 말한다. 같은 언어는 엄밀하게 떠져서 일어나지 않는다. 언어는 사이두기와 장소들의 조직을 필수적으로 요하는 분절화를 모른다. 지역적 차이 이전에는 언어도 없다. 분절화 이전에, 지역적 차이 이전에 언어라고 부를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렇다면 부동의 자연적인 절대적 중심도 없다고 결론지을 있을까? 우리는 기술과 명시적 선언을 구별해야 한다. 루소는 중심을 명시적으로 선언한다. 언어사에 있어 오직 유일한 기원과 하나의 영도만이 있다. 그것은 남방, 생명의 열기, 정념의 활력(에너지)이다. 그러나 장의 외관상의 균형과 이중 기원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지만 루소는 개의 형성 축을 언급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단지 하나의 형성과 왜곡에 대해서만 말하고 싶을 뿐이다. 언어는 오직 남방에서만 진정으로 형성된다.

만약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시론]으로 경미한 옮김이 있었다면, 그것은 연속적 미끄러짐, 순수 자연으로부터 탄생하는 사회로의 완만한 전이 과정에 기인할 것이다. 왜냐하면 미분절화에서 분절화로, 순수 자연에서 문화로, 충만함에서 대리 보충성 놀이로의 이동에서는 어떤 연속성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 밖으로 나가는 것은 점진적이며 갑작스러운 동시에 순간적이며 끝나지 않는다. 구조적 분절화는 확연히 구분되어 일어나지만 역사적 분리는 완만하여 많은 수고가 들고, 지각되지 않는다. 이러한 이중적 시간성에 대해 [시론] [인간 불평등 기원론] 일치된다.

간단한 손가락 운동”: 문자 언어와 근친상간의 금기

[시론] 따르면, 이제 태어나는 사회는 개의 상태로 이루어진 법칙에 종속된다. 그러나 마지막 상태만이 사회 속에서 인간이 인간 자신으로 접근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것은 시민과 경작자의 상태이다. 그에 앞선 상태(원시 사냥인과 야만적 유목민) 일종의 선사 시대에 속한다. 루소의 최고 관심은 번째 상태에서 번째 상태로의 이행 과정이다. 이행 과정은 극도로 완만하고,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것이었지만, 상태에서 다음 상태로 만들어 것을 구조적으로 함축하지 않았기 때문에 계보는 단절 또는 역전, 격변 또는 파국을 기술해야만 한다.

야만성의 체계 내부에는 그것을 벗어날 있는 단절력 또는 동기가 없었다. 따라서 단절의 인과 관계는 자연적인 동시에 시민적 상태 체계의 바깥쪽에 있었음에 틀림없다. 지상의 격변은 가지 요청에 부응한다. 불안과 계절의 차이화로 있는 파국이란 논리적으로 타성적 체계의 내부에서는 일어날 없기 때문에 상상할 없는 것을 상상해야 한다. 그것은 완전히 자연 밖에 있는 자극이다. 부정성, 악의 기원, 사회, 분절화 등은 외부에서 온다.

문제가 되는 것은 확실히 신이라고 있다. 왜냐하면 악의 계보는 동시에 변신론이기 때문이다. 오직 우발적 원인만이 자연적인 가능태를 현실태로 옮길 있었다. 그러한 자연의 힘은, 자체에 고유한 목적성을 일깨우는 충분한 어떤 동기도 함축하고 있지 않았다. 목적론은 외재적인 것이며, 시원학의 파국적 형식이 의미하는 것이다.

기원의 문제는 사건적이지도 구조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사실과 권리의, 역사와 본질의 단순한 양자택일에서 벗어난다. 하나의 구조에서 다른 구조로의 이행 과정은 어떤 구조적 분석에 의해서도 설명될 없다. 왜재적, 비합리적, 파국적인 기정사실이 침입했음에 틀림없다. 우연은 체계의 부분을 이루지 않는다.

따라서 자연 상태로부터 언어 상태와 사회 상태로의 이행, 대리 보충성의 도래는 발생과 구조, 사실과 권리, 역사적 이성과 철학적 이성의 간단한 양자택일을 벗어나서 일어난다. 루소는 체계의 완전 바깥쪽에 있는 부정성으로부터 대리 보충을 설명한다. 대리 보충성의 서법은 논리로 환원될 없다. 대리 보충성의 파국은 이성적으로는 도저히 수긍할 없는 것이다.” 이성, 언어, 사회의 가능성, 대리 보충적 가능성은 이성에서는 도저히 수긍될 없다.

만약 여러 사회가 파국으로부터 탄생했다면, 그것은 우연으로 탄생되었기 때문이다. 루소는 성서적 사건을 자연화시킨다. 그는 실추를 자연의 사건으로 삼는다. 자연의 여러 사건과 사회적 사이에는 신의 섭리가 발현되는 공모가 있다. 사회는 오직 자연의 우발적 사건들을 회복하기 위해서만 창조된다.

언어와 사회는 의미 작용의 개의 원리 또는 개의 계열의 대리 보충적 관계(북방/겨울/추위/욕구/분절/남방/여름/열기/정념/악센트화) 따라 설정된다. 북방에서는 겨울에 날씨가 추울 때에 필요와 욕구가 계약을 창출한다. 불은 자연적 열기를 대리 보충하고, 북방 인간들은 가정을 중심으로 모인다. 남방에서는 운동이 정반대이다. 그것은 욕구에서 정념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정념에서 욕구로 간다. 아울러 대리 보충은 따뜻한 난로의 열기가 아니라 물웅덩이의 신선함이다.

운동은 아마도 앞의 경우와 정반대지만 그렇다고 어떤 대칭을 결론짓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남방의 특권은 명시적으로 선언된다. 열대 지방은 황금 시대의 영원한 가깝다. 거기에서 정념은 기원에 가깝고 물은 불보다 최초의 욕구와 최초의 정념과 관계를 갖는다. 최초의 욕구라고 하는 이유는 인간들은 불보다는 없이 살아가기 힘들기 때문이다.” 더운 지방에서 출현하는 근원적인 언어와 사회는 절대적으로 순수하다. 최초의 언어와 사회는 포착 불능의 한계에 가장 가깝다. 곳에서 아직 사회가 타락하지 않은 형성된다.

루소에 따르면, 축제는 놀이를 배제한다. 축제의 순간은 순수한 연속성, 욕망의 시간과 쾌락의 시간의 무차이의 순간이다. 축제 이전에는, 순수한 자연 상태에서 연속적인 것에 대한 경험이 없다. 축제 후에 불연속적인 것에 대한 경험이 시작된다. 축제는 연속적인 경험의 모델이다. 축제 다음에 오는 것은 무엇인가? 대리 보충, 분절화, 기호, 대리물의 시대이다. 시대는 근친상간의 금기 시대이다. 축제 이전에는 근친상간도 없었다. 왜냐하면 근친상간과 사회의 금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축제 이후에는 이상 근친상간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금기되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루소는 신성한 , 신성함의 성격을, 마음에 말하는 자연적인 목소리에, 유일하게 마음속에 각인된 자연법에만 부여하고 있을 뿐이다. 그의 시각으로는 유일한 제도, 유일한 기본 계약만이 신성한 것에 속한다. 그것은 [사회계약론] 일러 주듯 사회 질서 자체이며, 법의 권리, 모든 계약에서 토대로 사용되는 계약이다. “사회 질서는 모든 법에 기초가 되는 신성한 법이다. 하지만 법은 결코 자연에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계약에 토대를 둔다.”
루소는 계약을 오직 가지 조건에서만 신성시한다. 그것을 보편화하고, 그것이 인공물 중의 인공물이라도 자연에 순응하는 준자연법으로 간주할 있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이러한 금기의 경우이다. 그것은 또한 이러한 최초의 유일한 계약 질서에 속하며, 최초의 만장일치에 대해 [사회계약론] 법의 가능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말한다. 하나의 법이 모든 법률의 기원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사회, 언어, 역사, 분절화, 한마디로 대리 보충성은 근친상간의 금기와 동시에 태어난다. 후자는 자연과 문화 사이에 벌어진 틈이다. 제도의 기호들의 시대, 대리 재현하는 것과 대리 재현되는 사이의 계약적 관계의 시대는 금기의 시간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사물 자체를 보여 주는 것이 불가능할 때만 사물을 기호로 대신할 일이다. 왜냐하면 기호는 아이의 관심을 끌고 대리 재현된 사물을 잊게 만들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기의를 기표로 대체하는 , 다른 기표 대신 다른 기표로 대체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최초의 대리 보충성, 그것은 말과 사물 사이의 차이에 대한 담론을 궁극적으로 낳는다. 그것은 너무 위험한 대리 보충이라 몇몇 파생 효과마저도 간접적으로 보여 뿐이다. 그것을 보여 수도 없고, 자체를 명명할 수도 없고, 단지 손가락의 말없는 운동으로 가리킬 있을 뿐이다.

기본적 기의로서의 모친, 자연, 존재의 관계의 이동, 바로 그것이 사회와 여러 언어의 기원이다. 기표가 이상 기의에 의해 대체될 없는 체계에는 한계가 있고 이것은 결과 어떤 기표도 그렇게 대체될 없게 만든다. 왜냐하면 비치환 지점은 모든 의미 체계의 방향점이며, 기본적 기의가 모든 반사의 종착점으로 약속되는 동시에 기호 체계를 파괴시키는 것으로서 스스로를 감추는 때문이다.

축제 자체는 근친상간 자체이다. 만약 자체가 일어날 있었다면 말이다. 그것은 금기를 인정할 때만 근친상간이 된다. 언제나 한계, 축제, 사회의 기원, 극기가 위반과 동시에 주어지는 현전을 넘어서서 있게 된다. 언제나 일어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일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사회의 탄생은 경과가 아니라 점이며, 순수하고, 허구적이며 불안정하고 포착될 없는 한계이다. 거기에 도달하면서 그것을 건너가는 것이다. 한계에서 사회는 개시되고 분화된다. 그것은 시작하면서 타락하기 시작한다. 남방은 북방으로 옮겨 간다. 정념은 욕구를 초월하면서, 그것을 타락시키는 새로운 욕구를 파생시킨다. 기원 후의 타락은 기원 전의 반복과 유사한다. 분절화는 정념을 대신하면서 욕구의 새로운 질서를 세운다. 조약이 연애를 대신한다. 춤이 가까스로 시도되자 , 춤은 타락한다. 축제는 전쟁이 된다.

언어, 정념, 사회는 북방도 남방도 아니다. 그것들은 양극이 차례로 대체되는 대리 보충성의 운동이다. 운동에 의해, 악센트는 분절화 속에서 개시되고, 공간화되면서 차연화된다. 지역적 차이는 욕망과 쾌락 사이의 차연일 뿐이다. 따라서 그것은 단지 모든 언어의 다양성에 관련될 뿐만 아니라 단지 언어 분류의 기준도 아니고, 모든 언어의 기원이다. 루소는 점을 명시적으로 선언하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그가 점을 기술하고 있음을 보았다. 에크리튀르가 이러한 차연의 다른 이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지금부터 끊임없이 검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