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근대성의 철학
그의 관심은 서구적 합리성과 비서구적 합리성 간의 관계에 대한 더 커다란 질물들을 향함,
나아가 라투르는 과학인류학 연구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행위자-연결망 이론(ANT)를 발전시키고,
이를 [비환원] 같은 저작에서 일관되고 본격적인 철학적 기획으로 제시.
이 장에서는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라는 책에서 라투르가 다루기 시작하는 다음 단계의 큰 주제를 살펴봄.
이 책은 과학적 연구의 기본 통찰로부터 철학적 함의를 이끌어내려는 또 다른 시도이며,
여기서 라투르는 근대성이라는 개념과 씨름하기 시작.
무엇이 우리 사회를 근대로 만드는가?
그리고 무엇이 우리를 근대인으로 만드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가장 공통적인 대답은 우리의 통치 체제가 자의적인 야만성이 아니라 잘 확립된 대의민주주의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또한 우리가 신앙과 미신이 아니라 과학적 원칙들에 의존하고,
산업화된 사회에 살고 있으며,
개인의 권리를 인정한다는 것,
나아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근대성을 진보에 대한 일종의 희망 및 믿음과 결부시킴.
비판적인 분석가들과 비평가들은 근대성에 대한 그런 순전히 긍정적인 해석을 거부.
그들은 근대성이 단순히 진보를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
근대성은 제3세계의 식민화와 착취,
세계 전쟁과 대량살상무기,
대규모의 오염과 자연 파괴를 불러옴.
또한 다양한 중간 입장들,
예를 들어 조심스러운 낙관주의나 온건한 우려 가운데 하나를 주장할 비평가들도 존재.
이러한 의견들의 합창에서 공통된 음표는 근대성이란 현존하는 무언가라는 암묵적인 가정,
근대가 언제 시작했는지 그리고 지속될 지 여부는 논의의 여지가 있지만 우리가 근대성 안에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것.
그러나 라투르는 이런 주장을 완전히 거부.
그는 우리가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고 주장.
이 장에서는 라투르가 제시하는 근대성의 철학을 살펴봄.
근대성의 철학은 두 가지 중요한 기여.
첫째, 근대성에 대한 특수한 정의를 발전시킴,
그는 근대성이
1600년대에 확립되기 시작한 자연과 사회의 분리에서 유래한다고 주장.
자연과학은 이러한 분리를 확립시키는 하나의 본질적인 구성요소.
둘째, 라투르는 현재의 과학적,
기술적, 정치적 문화에 대한 더욱 실재적이고 구성적인 시각을 제시하려 함.
근대성의 철학은 우리 시대에 대한 진단도 담고 있음.
라투르는 “근대적”
문화의 현재적 문제점들을 검토하고자 함.
책의 방법:
인류학, 헌법 은유,
사고실험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는 매우 포괄적 질문들을 제기:
근대인들은 어떠한 정신적 지평 위에 놓여 있는가?
우리는 자연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우리는 사회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과학과 정치의 관계는 어떠한가?
라투르는 인류학에서 영감을 얻음.
서로 다른 많은 것들을 동시에 논함으로써 근대성을 정의하고자 함.
또한 그는 근대적 사고와 행동의 규칙을 확립하는 일종의 헌법을 발견하거나 조립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가정.
라투르는 이러한 근대 헌법이 정치적 헌법과 비슷하다고 생각.
그러나 근대 헌법은 정치에 관한 것만은 아니며 자연,
과학, 종교 그리고 그 이상의 것들에 대한 우리의 전반적인 관점을 규정.
1600년대 중반부터 현재까지 서구 세계 전체에서 모든 것이 어떻게 배치되어 왔는지를 요약하는 것이 그의 의도.
근대 헌법의 궤적에서
우리가 분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개개의 현상들 속에서 뒤섞이고 있으며 라투르는 이를 근대 헌법이라고 부름.
근대인들은 순수한 범주들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는 유형의 사람들,
이러한 믿음은 하이브리드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유지.
라투르는 그러한 근대적 실천을
<그림 3.1>
(p. 115)에서 보여줌.
그림이 아래쪽에는 번역 작업이 있음.
이는 혼합체와 새로운 유형의 존재,
즉 자연과 문화이 하이브리드를 만들어내는 실천에 해당.
과학학 연구는 이러한 번역 작업을 규명하는 데 기여,
번역 작업의 결과는 신문 기사에 등장하는 지속적인 하이브리드들의 흐름 속에 등록,
그림의 위쪽에는 정화 작업이 있음.
이는 자연과 문화를 두 개의 독자적인 존재론적 영역으로 분리하려는 지속적인 실천적,
담론적 노력으로 이어짐.
라투르의 주장은 근대인의 비밀이 정화와 번역 간의 일종의 시너지 또는 상호 강화에 있다는 것.
이러한 명백한 역설,
즉 한편에는 정화된 존재론적 영역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이 영역들을 통합하는 하이브리드의 생산이 있다는 역설은 생산적인 역설.
홉스 대 보일:
근대 헌법의 기원
토머스 홉스와 로버트 보일의 논쟁에서 홉스와 보일은 인류학적 원형이 어떻게 배치되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각자의 의견을 제시,
그들은 각기 자연과 문화,
종교와 정부,
그리고 상호 관련되는 일련의 다른 요소들을 어떻게 위치시킬 것인가에 대한 포괄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었음.
라투르에 따르면 이 논쟁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보일과 홉스가 근대 문화의 근본이 되는 언어적,
실천적 배치를 함께 발명했다는 점이며 그 키워드는 대표(representation).
라투르는 과학적 대표와 정치적 대표를 분리해서 생각하지 말 것을 주장.
여기서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권력의 분립이자 자연과 정치의 근본적인 분리이며,
이 두 가지 분리는 하나의 동일한 근대 헌법에 기여.
“순수한” 자연의 대표와 “순수한”
사회의 대표 모두 지난한 구성 작업의 결과.
이러한 구성 작업은 인간적 존재들과 비인간적 존재들을 광범위하게 혼합하고 연결하며 하이브리드화하는 작업.
근대 헌법의 역동성
라투르는 전근대 문화들이 자연적인 것,
사회적인 것,
신성한 것을 혼합하는 하이브리드들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는 경향이 있었다고 주장,
그러나 근대 헌법은 순수한 자연과 순수한 사회가 별개의 것으로 제시되고 대표될 수 있도록 보장,
그러나 하이브리드들을 시야에서 감추는 근대문화는 자유 의식과 부주의한 태도를 조장함으로써 실제로는 점점 더 많은 하이브리들의 생산과 동원을 가능케 함.
근대인들은 자신감 넘치는 자연의 대변자들을 생산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운 테크노사이언스 구성체들을 두려움 없이 수용하는 사회를 생산.
라투르는 이 두 가지의 결합이 우리가 근대성이라고 인식하는 통제 불가능한 역동성의 원천이라고 주장.
근대적 비판의 수행
근대 헌법이 갖는 비교 우위는 하이브리드들의 지나치게 활발한 생산만이 아님.
근대 헌법은 또한 비판의 수행을 위해 전례없이 폭넓은 기회의 스펙트럼을 확립.
자연의 정화는 자연이라는 준거점을 통해 인간적 편견과 추측으로 만들어진 지식 또는 실천을 비판,
라투르는 이것이
17세기에 시작된 소위 “1차 계몽주의”에 내재된 비판의 원동력이라고 주장.
다른 한편에서는 정반대 형태의 정화,
즉 사회의 정화가 또 다른 비판의 원천을 제공,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왜곡에 대한 비판이
1800년대에 발생한 소위 “2차 계몽주의”의 원동력.
문제는 이로 인해 근대인들은 스스로 사회를 형성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결국 근대인들이 사회적 법칙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
또한 근대인들은 과학과 기술을 통해 자연을 조작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근대인들이 자연의 법칙에도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
그러한 “사회구성주의적”
입장은 근대 헌법이 확립한 담론 공간 속에서 충분히 성립될 수 있음.
한 지점에서 자연과 사회는 초월적,
즉 그것들은 부재하는 외부적 힘이며 우리는 그것들을 분명히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을 비판할 수 있음,
그러나 다음 지점에서 자연과 사회는 내재적인 것으로 묘사,
즉 그것들은 우리 자신이 만들어내는 힘이며 우리는 이 사실을 간과하거나 과소평가하는 이들을 또다시 비판할 수 있음.
마찬가지로 신은 부재하면서도 동시에 인간 개개인의 마음에 직접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지극히 현전(내재적). 그러나 라투르는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고 주장.
다시 말해 실제로는 세계가 근대 헌법의 계율에 따라 기능했던 적이 없었다는 것.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프랑수아 퓌레는
1789년 당시 “부르주아”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줌.
라투르는 이러한 관점이 근대인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고 봄.
퓌레는 혁명을 여러 가능한 해석들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게 됨에 따라 혁명이 자명한 사실로서의 지위를 상실했기 때문에 “프랑스 혁명은 끝났다”고 선언,
라투르도 이제 근대성에 대한 유의미한 대안들이 있다는
(그리고 항상 있어 왔다는)
것이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고 선언.
근대 헌법에 대한 대안들 중 첫 번째는 과학학.
과학에 대한 구성주의적 묘사는 자연과 사회를 갈수록 더 명확히 분리하는 것이 진보를 위한 “처방”이라는 근대인들의 굳건한 믿음을 위협.
그와 달리 연결망 분석은 과학적 사실과 기술적 인공물의 구성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현재 진행 중인 하이브리드화라는 결론에 이름.
라투르에 따르면 과학학이라는 작은 분야는 근대 헌법이 비가시화하는 하이브리드들을 가시화한다는 점에서 비근대적인 실천.
지난 30년 동안의 과학인류학 연구의 결과로,
순수한 자연은 실험실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초월적 조건이라는 근대주의적 주장은 이제 점점 더 설 자리를 잃어감.
두 번째는 비판에 대한 사회학.
볼탕스키와 테브노의 분석에 따르면 비판이란 정당화 체제들이라고 불리는 역사적으로 받아들여진 일련의 도덕적 어후들에 기초해 특정 맥락의 참여자들이 행사하는 능력.
그들은 비판이 최종 결정권을 갖는 확실한 방법이라는 근대주의의 자기 확신적인 가정의 토대를 약화시킴.
이는 근대 헌법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한 정확하고 완전한 묘사가 아니라,
단지 세계를 조직하는 하나의 특정한 시도에 불과하다는 점을 다시 한 번 보여준다고 라투르는 말함.
세 번째로 라투르는 근대인들의 성공의 가장 분명한 표현(하이브리들의 대규모 등장)이 이제 역설적으로 근대인들의 기획을 침식하기 시작한다고 주장.
급진적인 결론들
하이브리드를 인식하는 것은 근대성의 정신적 지평 전체를 바꾸는 급진적인 결론들로 이어짐.
라투르는 하이브리드의 지도를 그리기 위한 틀로서,
보일이 실험실에서 구성하는 다섯 가지 버전들을 표시한 도표를 제시
(그림 3.2)
(p. 132). 라투르의 도표는 경험적 도구가 이니며,
오히려 그의 존재론적 가정에 대한 일종의 요약.
가장 놀라운 가정은 진공이 스스로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
라투르의 이런 주장은 시간에 대한 주류 근대주의적 인식을 강하게 비판한 프랑스 철학자 미셸 세르에게서 영감을 얻은 것.
근대주의적 시간 인식에 대한 급진적이고 다소 시적인 대안으로서 라투르는 시간을 일종의 소용돌이나 나선형 운동으로 상상.
과거는 단순히 지나가버리는 것이 아니라 “재고되고 반복되고 둘러싸이고 보호되고 재조합되고 재해석되고 재편되는”
것.
이처험 라투르는 근대주의가 분리하는 자연과 사회를 하나의 연속체로 간주해야 하며,
또한 하이브리드가 불안정한 존재에서 안정적인 본질로 이동하는 경로를 등록하기 위해서 두 번째 축을 추가해야 한다고 주장.
라투르는 인간이 자연과 사회라는 두 개의 항아리 안에서 요소들을 끌어내고 그것들로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
그 반대 방향으로 설명해야 함.
즉 하이브리드 영역 내부로부터 점진적인 안정화 과정을 거쳐 자연과 사회라는 예측 가능한 본질들이 이따금 등장하는 것.
근대 세계와 비근대 세계,
또는 “서구와 나머지 세계”의 관계에 대해 라투르는 근대 인류학자들이 비근대 세계를 바라보는 여러 방식을 목록화하면서 논의를 시작.
절대적 상대주의,
문화적 상대주의,
특수한 보편주의 입장 중 특수한 보편주의 입장이 “우리”와 “그들”
간의 결정적인 인식론적 단절의 시발점이라고 주장.
즉 우리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는 반면에 그들의 자연 이해는 실상 자신의 사회적 범주들을 투영한 결과라고 보는 것.
라투르는 이러한 입장들에 반대.
그는 자연과 사회의 구성을
(홉스-보일 논쟁처럼)
같은 동전의 양면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
모든 집합체(문화)는 일련의 다른 모든 요소들과 더불어 자연과 사회 모두를 구성한다는 것.
우리가 어떠한 집합체에서도 자연의 대표가 하이브리드화에 기초한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근대적 집합체와 비근대적 집합체 사이에 하나의 거대한 질적,
인식론적 단절이 있다는 주장은 근거를 잃게 됨.
이와 동시에 우리가 집합체들 간에 하이브리드화의 유형과 범위가 크게 다르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왜 어떤 집합체가 다른 집합체들을 지배할 수 있는지를 더 잘 설명할 수 있게 된다고 라투르는 주장.
따라서 근대인들이 비근대인들로부터 근본적으로 분리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라투르를 기본적으로 연속성의 철학자로 규정할 수 있을 것.
라투르는 근대 헌법이 단절을 지시하는 모든 곳에 연속성을 재기입.
그리하여 과거와의 단절은 시간의 나선형 운동이 되고 비근대적 세계와의 단절은 하이브리드화의 포괄적인 실천이 됨.
그리고 자연과 사회의 단절은 인간 행위소와 비인간 행위소로 이루어진 하나의 집합체로 변함.
사물의 의회 – 조심스러운 진전
라투르는 근대성 진단의 마지막 측면으로 비근대 헌법을 제시.
그는 비근대 헌법 속에서 근대,
전근대, 탈근대의 가장 좋은 것들을 결합하려 함.
라투르가 제시하는 최선의 해결책은
(전근대인들처럼) 하이브리드들의 생산을 집합적이고 명시적인 일로 만들지만 동시에
(근대인들처럼) 사회적 질서와 자연적 질서를 항상 연결해야 하는 의무로부터 벗어나는 것.
라투르는 객관적인 자연과 자유로운 사회를 동시에 촉진하고 생산하는 것을 일종의 윤리적 의무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
문제는 라투르가 사물의 의회라고 부르는 새로운 유형의 집합적 의사결정 기관을 어떻게 확립할 것인가 하는 것.
민주주의가 확대되려면 집합체의 협상에서 더 많은 수의 “견제와 균형”이 있어야 하고,
더불어 한층 더 넓은 범위의 대표자들이 더 광범위한 형태로 참여해야 함.
요약과 토론
이제까지의 설명에서 생략된 세 가지 중요한 사항:
1. 라투르는 (칸트, 헤겔, 현상학자들, 하버마스 같은)
많은 기라성 같은 근대주의 철학자들의 사상을 자연과 주체/사회 간의 구분이라는 불가능한 과업과 씨름하는,
갈수록 덜 성공적인 것으로 드러나는 일련의 시도들로 해석
2. 라투르는 탈근대주의를 자연/사회의 구분을 다루려는 최신의,
가장 덜 성공적인 시도로 묘사
3. 신과 종교의 관념에 대한 라투르의 개입은 앞서의 개략적 언급이 시사하는 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함.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는 대안적 질서화 양식을 확립하려는 시도로 읽혀야 함.
라투르의 비근대 헌법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출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며,
하나의 선언.
한 가지 가능한 결론은 우리가 결코 근대적이지도 않았고 무근대적이지도 않았다는 것.
대신 우리는 그 두 가지 모두의 방식으로 세계를 질서화해왔고 계속 질서화하고 있음.
4장 정치생태학
들어가는 글:
새로운 정치생태학을 향하여
라투르는
[자연의 정치학]에서 자연을 마치 세계 속에 있는 초월적이고 비인간적이며 존재론적으로 분리된 영역으로 간주하는 근대 헌법의 한 측면에 관심.
라투르는 지난
3-4백년 동안 지속되어 온 테크노사이언스적 근대화를 계속할지,
아니면 우리의 집합적 삶을 “생태화”할지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
라투르의 정치철학은 생태정치철학이며,
그는 생태위협을 현대 세계를 결정적으로 정의하는 요소로 생각,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
진단을 차용.
지금까지 근대 헌법은 서구인들이 두 가지 유형의 대표,
즉 정치적 대표와 과학적 대표를 통합하는 것을 금지.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지탱하기 어려워짐.
라투르는 인간과
(유사)객체가 동시에 대표되는 “사물의 의회”의 창설을 주장.
이는 주체와 객체,
가치와 사실,
정치와 공학에 대한 우리의 정신적 지평을 재편할 기회를 제공.
이 점에서 라투르에게 정치생태학은 “정치적 인식론”의 수행을 의미.
이 장은 두 가지 상이한 수준에서 논의를 전개.
첫 번째,
상대적으로 추상적인 수준은 대표의 문제와 관련,
사실과 가치라는 철학적 범주들을 재사유할 것을 요구.
두 번째,
상대적으로 구체적인 수준은 수많은 환경 위험,
하이브리드들, 생태적 유사객체들과 관련.
그가 정치생태학과 정치적 생태주의에 관여하는 것은,
이 운동이 해방과 민주주의를 우한 진보적인 역사적 투쟁을 재정식화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라고 생각하기 때문.
정치적 인식론과 이중의 대표
라투르에게 근대라는 시대의 가장 주된 특징은 집합적 삶을 자연과 사회,
과학과 정치로 분리하는 근본적인 이분법.
따라서 하이브리드화 작업을 명시적이고 정당한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정치적 집합체로서의 우리의 과제.
문제는 과학적 대표 메커니즘과 정치적 대표 메커니즘의 관계를 전체적으로 재사유함으로써 인간들과 비인간들의 집합적 삶을 질서화하는 하나의 통합적이고 집합적이며 “실험적으로 형이상학적인”
과정에 도달하는 것.
즉, 사물의 의회를 구성하는 것.
사물의 의회는 “과학의 정치화”
또는 “정치의 과학화”로 귀결되지 않음.
라투르는 과학철학자들의 “인식론적 경찰”의 입장과 대조적으로 과학과 정치 사이에 있는 권력의 분배와 균형에 관한 명시적 성찰로서 “정치적 인식론”을 실천.
정치적 인식론은 이자벨 스텡거스의 “코스모폴리틱스”로 칭할 수 있음.
이에 따르면 정치는 자연 안에 존재.
이 점에서 정치란 우리의 공통적이고 이종적인 “코스모스”의 구성을 다룸.
“코스모폴리틱스”의 근본적인 질문은 사람과 사물을 모두 고려하는 좋은 공동세계를 어떻게 창출할 것인가 하는 것.
사물의 의회를 형성하는 데 있어 주요한 과제는 과학과 정치 양자의 강점과 특이성을 동시에 존중하는 방식으로 이러한 집합적인 실험적 과정을 조직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
인식론에서 절합으로:
순환하는 사실들
라투르의 규범적 과학철학을 논하기 위한 적절한 출발점은 “순환하는 지시체”라는 개념으로,
그가 [판도라의 희망]에서 제시한 것.
“사실”이 기호적,
물질적 연결의 복합적 연결망들을 통해 순환하는 존재라는 점에 분석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
라투르는 언어와 세계가 과학적 실천 안에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언어와 세계의 분리를 상대화하는 접근법으로 근대주의적,
시각적 은유를 대체해야 한다는 것.
바로 이것이 순환 지시체라는 용어가 정확히 의미하는 것.
즉 기호적인 것(언어)과 물질적인 것(세계)은 너무나 매끈하게 결합되고 구체적으로 얽혀 있어서 그 둘 간의 어떠한 존재론적 분리도 인식될 수 없음.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하나의 거대한 존재론적 분리가 아니라,
다수의 상대적인 차이들.
순환 지시체라는 개념을 통해서 라투르는 과학 지식에 대한 완전한 실재론적인 이해에 가까이 다가섬.
사실 그의 이론을 “초실재론적”이라고 해도 무방.
라투르는 이자벨 스텡거스의 논점을 발전시켜 화이트헤드의 “명제”
개념을 통해 우리를 주변 세계에 지속적으로 연결시키는 그러한 해석적 제안에 대해 논함.
명제란 새롭고 특수하며 때로는 놀라운 방식으로 세계와 관계 맺을 가능성을 가리킴.
명제를 참 또는 거짓,
혹은 대응의 문제로 보는 인식론에 대한 대안으로서,
그리고 자신의 규범적 과학 이론의 핵심으로서 라투르는 명제가 잘 절합되는가 아니면 부실하게 절합되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
이러한 맥락에서 절합(articulation)이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세밀해지는 구분들,
갈수록 미묘해지는 뉘앙스들,
그리고 더욱더 늘어나는 연결들과 객체들을 어느만큼 인식하는라는 문제.
현실정치에서 사물정치로:
객체지향적 민주주의
사물정치는 “사물”과 “집회”를 함께 뜻하는 독일어 단어 ‘Ding’에서 따온 것으로,
질적으로 새로운 유형의 정치를 의미.
사물의 의회와 사물의 정치는 다름아닌 사물을
(곧 유사객체,
하이브리드, 물질적 객체를)
정치적 토론과 갈등,
타협의 중심에 놓는 것.
현실정치(Realpolitik)에 대한 대안.
환경 정치가 그 핵심 주제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사물정치 분석이 좁은 의미의 생태주의에 한정되지는 않음.
사물정치를 통해 라투르는 사물의 객관성을 다른 각도에서 묘사.
즉 사물을 “우려물”(matter
of concern)로 제시하는 것.
우려물에는 “자연적으로 주어진”
사실이 행사하지 않는 온갖 특성들이 있음.
우려물은 풍부하고 복잡하며 불확실하고 놀라울 뿐 아니라 인공적으로 구성되는 것.
동시에 인공적으로 만들어짐으로써 우려물은 오히려 더욱 실재적인 것이 되며,
이런 의미에서 더욱 객관적인 것이 됨.
이처럼 우려물,
즉 하이브리드 객체는 근본적으로 열려 있고 불확실한 특징으로 인해 태생적으로 정치적.
라투르는 정치적 갈등들의 대상인 다양한 객체들의 특정한 상황에 맞는 다양한 사물의 의회들,
즉 “하이브리드 정치 포럼들”을 구상.
라투르의 정치철학은 과학과 정치의 의미를 두 가지 다른 방향으로 재정의하려는 대칭적 전략을 추구.
과학과 정치를 본질적으로 상이하고 존재론적으로 분리된 활동으로 인식해서도 안 되며 과학과 정치를 완전히 중첩되는 것으로 봐서도 안 됨.
같은 문제들을 다루지만 매우 다른 수단과 자원을 이용하는,
또한 서로를 보완하고 서로를 풍부하게 하는 실천의 형태로서 과학과 정치의 상을 그림.
근대화할 것인가,
생태화할 것인가?
라투르는 환경주의자들이 당면한 역설적인 정치 상황의 원인,
첫째, 생태적 이슈들이 전 사회적 삶 속에서 점진적으로 정상화된다는 것,
둘째, 환경 정치의 급격한 전문화,
이러한 맥락에서 라투르는 환경주의자들에게 단기간에 성과를 얻기 위해 오도적인 근대주의 과학 개념을 맹목적으로 모방하지 말라고 권고.
그 대신 생태주의 옹호자들은 구성주의적 과학학의 새로운 지식정치에서 교훈을 얻어야 함.
“생태화”를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정치적 생태주의는 인간의 영향으로부터 자연을 구하는 문제가 아니라,
실천을 통해 인간과 비인간,
사회와 자연 간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행위성과 역할,
권력 관계를 재분배하는 문제.
라투르의 정치철학에서 생태학은 우리가 전통적으로 환경이나 자연 보호의 문제로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를 내포.
생태학은 정치적 실천을 통해 비인간적 자연,
과학적 객관성,
그리고 인간 및 비인간 행위소들 간의 복잡한 관계라는 기본적인 근대주의적 질문을 다시 열린 상태로 만드는 역할을 해온 운동의 이름.
라투르의 정치생태학은 단순히 “인간중심적”
가치에서 “생태중심적”
가치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중심적인 것으로부터 탈중심화되는 것으로의”
이동.
비근대 헌법:
좋은 공동세계
생태화는 인간과 비인간의 집합적 삶,
즉 공동의 코스모스를 조직하기 위한 근본적으로 새로운 모델을 찾으려는 집합적 운동을 지칭.
새로운 과제는 바로 비근대 세계의 수많은 생태적 하이브리드들을 민주적일 뿐만 아니라 민감하고 실재적인 방식으로 다룰 수 있도록 보장하는 제도적 절차의 틀을 잡는 것.
라투르는 사물들 또한 공적인 토론과 협상을 요구받도록 하는 자유주의적,
대의제적, “숙의적” 민주주의의 재구성을 촉구.
하이브리드들을 실험적 민주주의의 일부로 간주하려면,
그것들을 미리 주어진 객체가 아니라 우려물로 다뤄야 함.
이와 동시에 라투르는 그러한 실험적 정치 과정이 새로운 역량과 권력,
보장으로 이루어진 상대적으로 잘 정의된 분립을 요구한다고 봄.
대의제 민주주의를 폐지할 것이 아니라 그 양원제 시스템을 재정의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
사물의 의회 건설현장
라투르는 지금까지 “사실”과 “가치”의 개념 속에 숨어 있던 갈등하는 고려사항들을 명확히 하고 질서화하고 재분배하며,
그럼으로써 결국 정치생태학을 위한 보다 실재적인 과정을 창출하려 함.
기본적으로 라투르는 새로운 양원 시스템을 구상.
상원은 어떤 하이브리드들이 집합체의 일부로 포함될지를 결정하고,
하원은 포함되는 모든 하이브리드들이 어떻게 공존할지를 결정.
그림 4.1 참조 (p.
185).
라투르의 정치생태학의 핵심 주장 가운데 하나는 사물의 의회가 민주적 정당성과 생태정치적 민감성을 담보하는 유일한 방법은 과학적,
정치적, 도덕적, 경제적 기술의 담지자들을 함께 결합하는 데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이 네 가지 직업이 모두 집합체의 네 가지 과제 각각의 해결에 공헌해야 한다는 것.
이러한 의미에서 당혹,
협의, 위계, 제도란 각각의 직업이 역사적으로 쌓아 온 경험과 기술,
도구를 동원해 해결해야 하는 실로 집합적인 도전.
사물의 의회는 근대성의 모든 주요한 차원에 대한 전반적인 재사유를 의미.
결론:
생태학, 과학, 민주주의 사이에서
정치생태학은 근대성의 위기에서 발생하는 정치의 유형.
이는 또한 우리가 코스모폴리틱스라는 용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시사.
정치생태학은 시간의 정치에서 공간의 정치로의 이행.
근대성의 현실정치가 “진보”와 “발전”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해될 수 있었던 데 반해,
비근대적 사물정치는 “동시성”의 코스모폴리틱스라는 관념을 통해 가장 잘 이해됨.
그러나 한편 과학학과 환경운동 사이에,
혹은 정치생태학에 대한 철학적 해석과 경험적 관찰 사이에 내재적인 연결이 있다는 라투르의 주장은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가라는 질문 제기 가능.
사물의 의회가 지닌 특이성은 급진적 성격에 있음.
라투르가 제시하는 정치생태학은
(울리히 벡의 주장처럼)
단순히 과학의 재조정이나 억제가 아니라,
과학과 정치,
객체와 주체,
사실과 가치,
자연과 사회 간의 근대적 구분을 전면적으로 수정할 것을 요구.
그러나 라투르는 이에대한 충분한 경험적 실례를 제시하지는 못함.
라투르 정치철학의 급진적 측면은 자연의 개념을 완전히 재정립하는 것.
또한 라투르의 정치철학은 이성적 추론의 공적인 사용에 대한 단호한 믿음에 기초.
결론적으로 라투르의 광범위한 정치생태학적 개입은 대답보다 질문을 더 많이 남김.
라투르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세 가지 도전,
즉 생태 위험,
근대성의 종말,
과학적 객관성의 위기를 결합하는 방식은 지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정교하고 급진적이며 영감을 자극.
정치생태학은 우리가 함께 공유하는 우려물이어야 함.
오직 함께할 때에만 우리는 우리 인간들이 비인간 동료들과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인정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