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30일 월요일

처음 읽는 브뤼노 라투르: 하이브리드 세계의 하이브리드 사상 5장, 6장 발췌요약

 5 결합의 사회학

들어가기: 라투르의 사회학적 양면성

라투르는 초기 저작에서부터 과학과 기술에 대한 자신의 이론이 사회학의 핵심 문제들, 특히 이른바 미시/거시 문제에 매우 유효하다고 주장. 그러나 다른 한편 그는 기성 사회학계의 다수와 거리를 , 특히 비판사회학 냉소적. 대표적 인물은 피에르 부드디외.

과학과 기술이라는 주제에서 출발한 라투르는 점차 사회에 대한 일반적이고 대안적인 이론을 개발하는 몰두. 라투르 사회이론의 이러한 일반화는 2005 [사회적인 것의 재조립] 출간으로 정점. 라투르는 책에서 처음으로 사회학, 사회적인 , “사회적 설”" 대한 자신의 독자적인 생각을 종합적으로 제시.

[사회적인 것의 재조립]에서 라투르는 자신의 결합의 사회학 사회적인 것의 사회학전체와 구분. 에밀 뒤르켐 이후의 사회적인 것의 사회학은 사회 구조, 사회 분화, 그리고 특히 사회 질서를 다룸. 요컨대 사회 하나의 확립된 실재의 영역으로 간주. 사회적인 것은 일종의 물질로 여겨짐. 그러나 라투르가 제시하는 결합의 사회학에서는 사회적 물”" 같은 것은 없음. 사회적인 것은 단지 연결되거나 결합되는 . 사회학은 이종적 요소들의 연결 속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이동(또는 번역) 추적함으로써만 사회적인 묘사.

사회에서 집합체로

라투르는 사회를 개별적 행위자들로 파편화시키는 반대하며, “사회 집합체 대체. 결합의 사회학의 관점에서 , “사회라는 개념이 갖는 적어도 가지 심각한 결함. 첫째, “사회라는 용어는 너무 많은 것을 나타내는 동시에 너무 적은 것을 나타냄. 너무 많다는 것은 모든 것이 사회이기때문, 그러나 또한 사회라는 개념은 1800년대에 걸쳐 국민국가라는 오직 하나의, 역사적으로 매우 특수한 형태의 인간 공동체와 동의어가 되었기 때문에 너무 적은 것을 나타냄.

번째 문제는 사회라는 개념이 공간적, 지리적 범위를 너무 경직되게 구획하며 그럼으로써 사회적 거리를 연구할 가능성을 심각하게 제한. 라투르가 그려온 테크노사이언스적 행위자-연결망들의 지도는 결코 국민국가들의 경계를 존중하지 않았음. 결합의 사회학의 주요 논점들 가운데 하나는 행위자-연결망들이 고정불변의 지리적 경계를 갖지 않는다는 .

  번째이자 마지막 결함은 가장 좁은 의미에서 사회라는 용어가 오직 인간만으로 구성된 공동체를 가정한다는 . 라투르는 행위자-연결망을 물질적으로 이종적인 관점에서 생각, 이러한 생각은 이종적 집합체들의 지도를 그리는 것을 주요 과제로 삼는 결합의 사회학에도 그대로 적용. 라투르에게 사회적인 것은 기본적으로 인간 행위자들과 비인간 행위자들 간의 모든 연결 또는 결합을 묘사하는 . 여기에는 가지 중요한 논점이 있는데, 첫째, 사회학은 비인간 행위자들을 연구 범위에 넣어야 한다는 , 두번째, 결합의 사회학은 언제나 새로운 연결들의 문제이며 따라서 끊임없는 이동과 변화를 겪고 있는 집합체를 다룬다는 . 결합의 사회학이 추구하는 목표는 이종적 집합체를 재구주화하고 있는 행위자들 자체를 따라가는.

결합의 사회학은 기존 사회학과 가지 기본적인 측면에서 구분. 첫째, 결합의 사회학은 가변적인 공간적, 지리적 외연을 갖는 사회적 연결들에 초점을 맞춤, 둘째, 고전 사회학이 사회 질서와 구조, 재생산에 초점을 맞춘 것과 대조적으로, 결합의 사회학은 진행 중인 변형 과정으로서의 사회적인 것에 초점을 맞춤, 셋째, 결합의 사회학은 순수한 인간 사회라는 관념을 인간 행위자와 비인간 행위자로 구성되는 이종적 집합체 (행위소)라는 관념으로 대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라투르가 행위자 구조 문제, 인간 개인 집단적 사회 질서라는 문제에 특권적인 역할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 라투르는 나아가 사회학자들이 전통적인 행위자/구조 이분법을 완전히 잊거나 비켜가야 한다고 주장. 대신 인간 행위소와 비인간 행위소가 맺는 관계들이, 보다 일반적으로는 사회와 자연 간의 관계들이 라투르의 사회학에서 핵심적인 관심사.

사회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으며 오히려 설명되어야 한다

라투르는 점점 테크노사이언스를 사회적 시각에서 설명한다는 생각에 회의적. 과학과 기술이 사회적인 것의 형성과 발전에서 핵심적인 요인이기 때문에, 그러한 발전들을 설명하기 위해 특정한 사회적 맥락을 이용하는 것은 거의 무의미하다는 . , 사회적 맥락 자체가 상당한 정도로 테크노사이언스의 산물이라는 .

일반적으로 사회적 설명은 설명의 대상을, 대상 자체보다 근본적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사회적 힘으로 대체하려 . 그러한 사회적 메커니즘은 규범, 권력, 이해관계일 수도 있고 자본주의, 산업화, 세계화 같은 거대현상일 수도 있음. 사회학적 설명은 행위자 자신의 이해를 부인하거나 거부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특히 비판적 사회학자 경우에 더욱 그러함.

라투르는 사회적 환원주의로 기우는 모든 생각들에 대해 비판적. 모든 구성원들이 안정된 사회 존재와 윤곽에 이미 동의하는 경우에는, 그런 식의 환원적인 사회적 설명이 제한된 유효성을 가질 있지만, 사회적 설명을 자유자재로 적용하는 것은 수많은 문제를 발생시킴. , 사회적 설명이 사회학을 일종의 슈퍼 과학으로 바꾸는 경향이 있다는 .

사회학적으로 설명되는 것에 대해 반발한 번째 집단은 자연과학자들이고, 이것이 바로 1990년대 과학 전쟁 배경, 이는 주로 미국에서 벌어진 사회구성주의적인문학자들과 실재론적자연과학자들 간의 대결. 이에 대한 보다 사회학적인 대응으로 라투르는 자신을 비판하는 자연과학자들을 보다 진지하게 받아들임. 사회구성주의자들은 설명의 객체를 시야에서 놓침. 이러한 배경에서 결합의 사회학의 주요 과제는 강한사회적 설명에 대한 대안을 확립하는 .

결합의 사회학은 상징적 상호작용론의 새로운 버전이 아니며 사회학이 특정한 상호작용과 특정한 행위자를 창출하고 무대를 연출하는 수많은 연결 가닥들을 추적해야 한다는 . 결합의 사회학의 기본 논점은 무엇이 사회적 세계를 구성하는가라는 물음은 단번에 대답할 수도 없고 대답해서도 되는, 근본적으로 열린 (형이상학적) 질문이라는 .

이러한 의미에서 결합의 사회학은 이론인 만큼 방법이며, 라투르는 상당한 정도로 경험주의적언어를 채택. 좋은 사회학이란 사회적 실재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를 통해 행위자들을 따라감으로써만 수행될 수도 있다고 말함.

테크노 탐정으로서 사회학자 라투르

 누가 아라미스를 죽였는가? 방법론적, 분석적 전략이라는 관점에서 라투르는 맞춤 제작된 일회용설명을 만들려고 했던 . 사회학적 이론은 어떤 특수한 연구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지 않음. 그러한 답은 지난한 탐구 작업을 통해 발견되어야 . 이처럼 설명의 고유한 적합성 고수하는 것이 결합의 사회학이 추구하는 하나의 이상. 이는 경험적이고 맥락적이며 문제 중심의 접근법을 요구.

사회적 질서: 상호주관성에서 상호객관성으로

라투르가 사회 질서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권력과 지배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사회학의 핵심 원리로 제시하는 것은 오도의 소지가 있음. 오히려 (상호작용적 사회학과 대조적으로) 사회적 행위자들의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특성에 대한 관념이 거의 없다는 것이 라투르 사회학의 특징. 라투르는 사회적 질서의 문제에 대한 일반적인 해답은 있을 없다고 학신. 해답은 사람들 간의 어떤 특정한 종류의 상호주관적 관계 속에서는 찾아질 없음.

상징적 상호작용론의 전통에서 사회적 질서는 궁극적으로 공유된 의미 구성체, 공유된 상징, 공유된 언어를 기준으로 설명됨. 라투르는 상호작용이나 상징, 언어의 중요성을 부인하지 않지만, 그러한 현상들에 존재론적 우선성을 부여하는 관념을 자신의 사회학의 기초로 삼는 것은 거부. 라투르의 주장에 따르면 상징적 상호작용론은 영장류 사회를 묘사할 때는 완벽하게 들어맞지만 인간 사회를 묘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

이러한 배경에서 라투르는 인간의 상호작용은 기본적으로 상호주관성의 문제가 아니라 상호객관성 문제라고 주장. 라투르가 말하는 사회적 상호작용의 프레이밍 순수하게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으로 이해해야 . 인간들 사이의 사회적 상호작용은 사전에 형성된 프레임 없이는 일어날 없음. 나아가 사회적 질서의 문제와 관련해 비인간 행위소가 인간보다 오래 지속되고 튼튼하며 의지할 만한 방식으로 행위하는 경향이 있음.

라투르는 상호객관성에 대한 이러한 논의를 사회학의 실천을 위한 가지 대략적 규칙으로 요약. 첫째는 사물을 사회적 사실로 취급하는 , 둘째는 행위자/구조 논쟁, 혹은 상호작용과 사회 관의 관계와 과련, 라투르는 그러한 이원론을 완전히 잊고, 대신 인간 행위소와 비인간 행위소 사이에서 일어나는 특성들의 교환에 초점을 맞출 것을 권함. 셋째, 라투르는 사회학이 소위 미시/거시 문제에 대한 영원한 이론적 집착을 끝내고, 대신 국지적 상호작용 세계적 조망 각각 만들어지는 과정을 경험적으로 따라가야 한다고 제안.

언명 체제: 법과 종교적 상징의 객관성

 라투르에게 비근대 세계는 존재 양식들, 그의 용어로 언명 체제들 다원성 속에 존재. 모든 언명 체제들에는 자신들만의 특정한 진리 생산 메커니즘이 있음. 그러나 과학학이 과학의 이지지를 근본적으로 바꾸었듯이 나머지 진리 체제들에 대해서도 새롭게 재묘사할 필요가 있음.

2002년에 라투르는 결합의 사회학에 기초해 법적 객관성을 전면적으로 재묘사하는 책을 출간. [법의 공장]에서 라투르는 법의 생산이 특정한 형태의 상호객관적인 질서화 과정에 의존한다는 것을 밝히고 판결의 법적 생산과 사실의 과학적 생산 간의 명시적 비교에 착수. 과학이 순환 지시체의 끝없는 연쇄들을 이용하는 반면, 법은 법적 자격, 심의, 결정을 가능케 하는 의무의 연쇄들 생산하는 문제와 관련. 과정에서 법에 수반되는 것은 객체 없는 객관성. “과학자들은 명확한 객체에 대해 어눌하게 말하고 법률가들은 모호한 객체에 대해 명확한 언어로 말한다.”

번째 진리 언명의 체제인 종교라는 언명 체제는 특수한 종류의 인격적 현전, 고유하게 충만하고 강렬한 순간의 현전을 생산하는 문제와 관련. 종교적 언명 체제와 과학적 사실 생산의 비교에서 라투르는 종교와 과학 간의 갈등에 대한 근대적 논쟁 자체가 커다란 오해라고 주장. 그는 과학과 종교 사이에는 어떠한 접점도 없다고 주장.

라투르의 결합의 사회학에서 등장하는 분화 이론 특유한 버전에 따르면, 비근대 세계는 과학, , 종교로 예시된 바와 같이 다원적인 언명 체제들로 구성. 라투르의 언명 체제들은 서로 다를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존재론적으로 겹치지 않음. 언명 체제들은 공약 불가능한 것에 가까움. 이처럼 다양한 언명 체제들을 묘사하기 위해 우리는 연구되고 있는 현상의 고유한 측면들을 존중하는 민감한 어휘를 필요로 . 일반적인 사회학적 메타언어를 이용해 이러한 언명 체제들을 묘사하려는 시도는 실패할 운명. 다시 사회적 세계를 구성하는 것은 열린 형이상학적 질문이며, 그에 대한 사회학적 대답은 사회적 세계의 수많은 비환원적 존재 양식들을 연구함으로써만 가능.

국지화와 세계화: 사회적 삶의 상이한 규모들

사회적 세계는 언명 존재 체제들의 다원성으로 수평적으로분화될 아니라, 작거나 행위자들로, 그리고 국지적이거나 세계적인 행위자-연결망들로 수직적으로도분화. 여기에서 미시/거시 분제 발생. 라투르는 거시와 미시 간의 차이, 크고 작은 행위소들 간의 차이는 결코 자연적이거나 영구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진행 중인 사회적 과정 속에서 형성되고 협상되며 변형된다고 주장. 사회학의 경험적 과제는 국지적 미시 상호작용들과 세계적 거시 효과들이 사회적 속에서 제각기 창출되는 국지화 세계화 과정을 연구하는 있음.

홉스에게 거시 행위자의 구성을 설명하는 핵심은 사회계약에 관한 합의, 그러나 라투르와 칼롱은 계약의 관념을 훨씬 넓은 번역의 개념으로 대체. 칼롱과 라투르는 거시 행위자들을 많은 수의 블랙박스들 위에 자리잡고 있는 미시 행위자들 정의.

올리곱티콘

 제러미 벤담이 18세기에 수감자들을 완벽하게 감시할 있는 이상적인 감옥으로 구상했던 판옵티콘과 달리, 라투르의 올리곱티콘들은 전체적인 조망 생산할 있는 위치에 있지 않음, 사회적 속에서 단일하고 압도적으로 우월한 거시 행위자 (또는 리바이어던)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음. 대신 복수의 경쟁하는 거시 행위자들, 달리 말해 경쟁하는 올리곱티콘들만이 있을 . 올리곱티콘은 사회적인 것에 대한 제한적이지만 견고한 대표를 창출하는 모든 종류의 연결망 배치를 의미.

파노라마

파노라마는 안에서 국지적 상호작용들이 해석되고 분류되는, 그대로 어떤 상상된 전체에 대한 이미지. 올리곱티콘과 달리 파노라마는 전체를 조망. 파노라마는 모든 것을 보는 동시에 아무 것도 보지 못함. 그러나 점이 파노라마를 반드시 무용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아님. 오히려 반대. 행위자들이 세계를 항해하기 위해 사용하는 사회적 지도로서 파노라마는 그들의 행위를 조정하고 대안적 미래를 상상하는 것을 도움.

파노라마를 가지고 하지 말아야 하는 유일한 일은 파노라마를 사회 영역 자체와 혼동하는 . 그러한 과제를 위해서는 올리곱티콘을 배치하는 것이 훨씬 적절. 올리곱티콘의 거시 구조화하는 연결선들은 가시적이고 탐지 가능하기 때문. 거시 구조화 뿐만 아니라 국지화도 오랜 기간의 사전 프레이밍 과정을 통해서 사회적으로 생산된 최종 산물.

주관성은 우리가 획득하는 무언가라는 . 우리는 사회적 관계들을 통해 주관성에 참여하는 것이지, 애초부터 주관성을 자연스럽게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님. 이러한 맥락에서 라투르는 사회적인 내에서 순환하는 주관성에 대한 일종의 명제로서 부가 확장” (plug-in) 개념을 제시.

요약하면 사회적 삶이란 국지적 상호작용과 세계적 거시 현상의 생산이라는 현재 진행중인 효과들을 발생시키는 연속적인 실천의 연쇄로서 경험적으로 분석될 있다고 라투르는 주장. 결합의 사회학이 공헌한 바는 행위자들 자신에게 미시/거시의 문제를 해결할 수단을 갖도록 것이며, 따라서 미시/거시가 이상 사회학자들이 기본적인 이론적 문제가 되지 않아도 되도록 .

미시/거시 문제는 규범적 관점 역시 제기. 규모와 크기의 간계가 사회적 속에서 끊임없이 협상되는 것이라면, 그러한 관계를 사회학적으로 고정시키는 것은 언제나 강한 거시 행휘자들에게 유리하도록 작동. 강한 거시 행위자들은 규모의 해체에 대해 면역력을 갖게. 사회학이 비판적일 있는 것은 행위소들이 다른 행위소들을 지배할 있도록 하는 실천적이고 물질적인 작업의 연쇄를 가시화할 . 원거리에서는 비판적일 없음. “비판적 거리라는 말은 무비판적인 정형화된 문구일 . 비판적이기 위해서는 관심 대상에 가까이 다가가야 . 사회학자가 행위자 대신에 없는 것이 가지 있다면 그것은 행위자의 규모를 결정하는 . 행위자의 규모는 갑자기 변함. 크고 작다는 것은 도덕적 문제.

결론: 사회학의 쳇바퀴에서의 라투르

라투르는 사회와 사회적인 것은 자체로는 아무것도 설명할 없으며 오히려 설명되어야 한다고 주장. 결합의 사회학과 더불어 사회학의 이론적 핵심은 이상 개인과 사회, 행위자와 구조 간의 관계가 아니라, 사회와 자연, 정확하게는 인간 행위소와 비인간 행위소 간의 관계. 결합의 사회학은 사회적인 것이 갖는 구성요소들의 목록을 갱신하고 사회적 존재의 새로운 후보자들을 제안할 있기 때문에 라투르는 바로 점에서 결합의 사회학이 정치적 적실성을 갖는다고 주장.

가지 반론들. 첫째, 사회성에 대한 라투르의 정의 자체가 사회적 삶에서 변화와 불안정성, “유동성 역할을 과도하게 강조하고, 내구성 있고 안정적이며 구조적인 측면을 철저히 이론화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의 문제. 둘째, 라투르가 사회적인 것과 자연적인 간의 구분을 폐기한다는 것을 생각할 , 그렇게 함으로써 사회학이 사회적 현상을 설명할 없게 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 셋째, 라투르의 사회적 존재론이 갈래로 나뉘는 하다는 지적. 그가 사회적 삶의 극단(형이상학적-존재론적인 것과 경험적-맥락적인 )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는 . 넷째, 비판사회학자들은 라투르의 결합의 사회학이 규범적인 힘과 사회비판적 잠재력을 결여하고 있다고 주장.

번째 비판과 관련해, 라투르가 결합의 사회학을 위해 도주로 또는 탈주의 조심스럽게 열어놓고 있다고 말할 있음. 변화의 편재성이 세계의 본질적인 특성이라거나, 결합의 사회학은 보편적인 사회학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 급진적인 변화를 겪는 상황에만 적용되어야 한다거나, 자신의 이론이 사회적 삶의 상대적 안정활르 설명할 없다는 가정 자체를 반박할 있음. 그러나 마지막 응답은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거의 설득력이 없을 . “자본주의에 대항해 무엇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라투르는 이렇게 답함. 먼저 그것의 존재를 믿는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

번째 비판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 그것이 결합의 사회학이 정확한 핵심이다라는 . 번째 비판과 관련해, 라투르는 그러한 전제는 받아들이지만 그것이 문제가 된다는 주장은 거부할 . 오히려 결합의 사회학은 형이상학과 사회학의 새로운 융합을 의도적으로 요구. 마지막으로 비판적 잠재력의 결여라는 반론과 관련해, 라투르는 비판적인 사회학적 거리라는 개념을 윤리적으로 옹호하지 않으며 오직 비판적 근접성만이 정당한 정치적 과정에 대한 사회학적 유형의 개입으로서 의미가 있다고 주장. 비판을 위한 가장 생산적인 접근법은 비판적인 사회학이 아니라 비판에 대한 사회학.

6 결론: 브뤼노 라투르의 계몽의 기획

라투르: 현대 세계의 사상가

라투르에 따르면 우리의 사고는 언제나 근대 헌법의 그릇된 이분법들, 사회와 자연, 주체와 객체, 언어와 실재 간의 이분법들에 의해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림, 따라서 근대 헌법에 대한 대안을 개발하는 외에 다른 현실적인 선택지는 없음. 그러나 그의 사유는 탈근대적인 것이 아니라 비근대적. 또한 라투르의 대안적 인식론은 확고히 구성주의적이며 과학적 실재론 한계를 넘어서지만, 결코 사회구성주의적이지는 않음. 마지막으로 라투르의 개념적 세계는 철저히 관계주의적이지만, 상대주의는 아님. 라투르는 지적 전체론”(holisim) 이상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임. 라투르의 지적 기획은 교차학제적 노력의 전형.

장에서 논의의 가이드라인은 라투르의 사유 전체에 일관된 ()비판적 계몽의 기획을 짚어내는 . 동시에 라투르의 사유가 1980년대 이래 어떻게 변해왔는지 드러내는 . 라투르가 제시하는 하이브리드적 비근대성의 전망에 접근할 .

탈사회적, 세계화된, 경합되는 세계?

라투르의 행위자-연결망, 말하자면 비인간적 관계들은 지역적 경계들과 국가적 경계들을 가로지름. 세계화와 테크노사이언스의 역할에 대한 라투르의 독창적인 접근법은 공통적이고 세계적인 실재의 생산이 결코 끝나지 않는 과정이며, 순간 실패하거나 붕괴되어 갈등으로 귀결될 있다는 또한 함의. 이것이 바로 코스모폴리틱스라는 용어에 내포된 핵심 논점.

형이상학적 지구란 코스모스, 세계주의, 보편주의에 대한 유럽 특유의 사유 전통을 가리킴. 이는 그리스 스토아학파에서 갈릴레오와 데카르트, 칸트와 헤겔로, 나아가 울리히 벡과 위르겐 하버마스 등의 현대 사상가로 이어지는 전통. 이들은 이성적 능력과 과학을 통해 인식할 있는, 단일하고 공통적이며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실재로 구성되는 하나의 코스모스를 상상한다는 점에서 모두 동일. 그러나 근대 헌법의 붕괴와 더불어 라투르는 그러한 기본 좌표조차 이상 당연한 것으로 여길 없게 되었다고 주장. 보편적 진리를 거론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자문화중심주의적 근본주의에 가까워질 위험이 있는 .

대칭적 인류학은 근본적으로 상이한 세계들을 독해하고 이해하며 식별하는 구성주의적 역량을 묘사하기 위해 라투르가 사용하는 용어. 오직 대칭적 인류학을 통해서만 우리”, 소위 근대 세계는 비근대 집합체들과 비교 가능한 것으로, 나아가 정치적, 도덕적으로 양립 가능한 것으로 제시.

라투르의 지적 기획에서의 이동들

라투르의 지적 기획에서 주제적 축은 사실은 제조된다 과학인류학의 기본적 관찰에서 비롯하는 결과들을 다루며, 존재론-형이상학적 축은 세계의 근본 요소들로서 과정, 내재성, 매개를 강조하는 일원론적사유를 중심으로 형성.

다양한 맥락에서 라투르의 사유, 특히 ANT 여전히 사회구성주의”, “급진적 상대주의”, 그리고 권력에만 초점을 맞추는 마키아벨리주의 묘사됨. 그러나 이러한 비판들이 잘못된 것인지 살펴보자.

라투르와 사회구성주의

라투르를 사회구성주의라는 무리에 넣는 것은 옳지 않음. 라투르는 사회적인 이라는 바로 개념적 범주들을 의문시. 라투르야말로 사회구성주의와 연결되지 않고도 하드코어구성주의자가 있다는 살아 있는 증거.

라투르와 상대주의

라투르의 과학이론을 상대주의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 상대주의는 진리의 상대성 아니라 관계들의 진리”. 라투르의 사유는 일관되게 관계주의적”.

라투르와 정치철학

라투르는 사회적, 정치적 질서의 문제들에 대한 어떠한 해답도 자연, 과학, 인식론의 문제들에 대한 해답에 의해 단서가 달리고 그에 의존한다고 주장. 또한 라투르는 정치철학에서 자신의 주된 준거점을 점차 이동시키면서 변형을 겪음 (토머스 홉스에서 듀이로).

라투르는 비판적 계몽의 기획을 갖는가?

가지 개념적 배치: 비인간주의, 사회적 비판의 위기, 과학의 민주화

비인간주의

라투르의 비인간주의를 탈인간주의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은 크게 잘못된 해석. 라투르의 생태적 계몽의 기획은 오히려 인간주의가 참조하는 공동의 인간성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인간과 비인간 세계를 관계 짓는 다양한 연결들에 의존한다는 관계주의적 통찰에 기초. 라투르의 비인간주의는 일종의 확장된인간주의.

비판적 근접성

부르디외의 관점에서는 사회적인 것이 설명과 비판을 위해 사용될 있지만, 라투르의 관점에서는 사회적인 것은 아무 것도 설명할 없고 자체가 상세한 경험적, 역사적 연구를 통해 설명되어야 . 라투르는 비비판적인입장. 연구자로서 사람이 어떤 상태나 상황의 불확실한 미래에 충분히 밀접하고 깊숙이 개입할 상태나 상황이 바로 비판적 되는 .

과학의 민주화

근본적인 의미에서 정치적 인식론의 관건은 현재의 과학의 지배를 민주화함으로써 비판적 추론을 민주화하는 . 이런 의미에서 라투르는 과학의 세속화를 주장. 과학적 설명의 우월성을 거부해야 한다는 . 과학의 민주화란 자율성과 해방이라는 계몽의 문제를 확장하고 근본적으로 제고하기 위한 진보적 잠재성을 가진 제안.

참여적이고 상황적이며 구성적인 의미에서 라투르는 비판적인 지식인, 라투르에게는 비비판적 계옴의 기획이 분명히 있음. 이는 급진적으로 확장된 인간주의로, 비판적 거리가 아니라 비판적 근접성을 추구하는 지적 스타일이며, 집합적 삶에서 과학이 담당하는 역할을 민주화하는 . 궁극적으로 그의 사상은 탈구조주의적이거나 비타협적이라기보다는 우주론적이며 실험적.

해석적 전략: “당신은 비근대성을 믿습니까?”

라투르의 기획은 새로운 거대 서사 형이상학적 우주론 아님. 라투르의 기획은 불완전하고 역동적이며 관계적이고 단지 부분적으로만 일관된 연결망. 라투르의 작업에서 기대하지 말아야 것들 가운데 하나가 사회적 세계의 확고한 특성에 대한 참신하고 거대하며 긍정적인 이론. 대신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과정과 내재성, 매개에 기초한 형이상학적 사유이며, 이는 자연과 문화의 근대주의적 경계를 가로지르며 현대 세계의 수많은 하이브리드화에 대한 강력한 분석적 감수성을 키워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