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상호주관성
후설은 상호주관성이 지극히 중대한 주제라고 생각,
양적 관점에서만 보더라도 이 주제에 많은 지면을 할애,
이 분석은 후설 ‘체계’에 중요한 개선책을 이룸,
상호주관성에 대한 후설의 분석을 고려해야만 후설의 초월론적 관념론 입장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음,
후설은 방법론적 유아론자 methodological solipsist로 간주되어 왔지만,
그럼에도 초월론적 철학의 상호주관적 변형이라는 문제에 착수함
유아론
후설의 현상학은 본성상 유아론적이라고 비난받음,
후설의 상호주관성의 현상학은 두 가지 상호 관련된 난점을 지니는 듯 보임:
첫째, 타자로서의 타자가 그저 구성의 산물 이상의 것이어야만 한다면,
도대체 내가 어떻게 타자를 구성할 수 있는가?
둘째, 다른 주관성으로서의 타자의 특징이 접근 불가능성이라면,
다시 말해 언제나 나에 대한 소여를 초월한다면,
타자의 소여를 기술하는 것은 현상학적으로 어떻게 가능할까?
이로부터 후설은 상호주관성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다고 비판,
그러나 실제 상황은 훨씬 복잡
초월론적 상호주관성
후설에 따르면,
나의 지각들은 상호주관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존재,
즉 나에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실재하는 존재를 나에게 제시,
나는 대상들,
사건들, 행위들을 사적인 것이 아니라 공공의 것으로 경험,
따라서 존재론적 분석은,
그것이 세계의 존재의미를 상호주관적으로 타당한 것으로 드러내는 한,
다른 주관성과의 초월론적 관련성의 해명에 이르게 하며,
따라서 결국 초월론적 상호주관성의 탐구에 이르게 함
초월론적 현상학은 언뜻 보기에만 유아론적,
원초적 환원을 도입하는 이유는 본성상 방법론적,
초월론적 환원의 철저한 완수는 결국 초월론적 상호주관성의 해명에 이르게 할 것,
후설은 상호주관성의 문제가 객관적 실재성과 초재(초월론적 존재)의 구성을 파악하는 열쇠라고 확신
상호주관성에 대한 후설의 현상학적 탐구는 상호주관성의 초월론적 혹은 구성적 기능에 대한 분석이며,
그의 성찰적 목표는 정확히 말해 초월론적 상호주관성 이론을 정식화하는 것이지 구체적 사회성이나 특수한 나-너 관계에 대한 상세한 탐구를 제공하는 것이 아님
현상학적 접근에 따르면,
상호주관성은 삼인칭적 관점에서는 적절하게 탐구될 수 없고,
일인칭적 관점에서 경험적으로 나타난 것 속에서 분석되어야 함,
상호주관성은 오직 철저한 ‘나 자신에게 묻기’를 통한 초월론적 문제로서 다뤄져야 함,
즉 타자를 전제하는 나의 경험들과 더불어 다른 주관과의 관계에 대한 나의 경험만이 ‘상호주관적’이라 불릴 자격이 있음
후설의 상호주관성 이론은 가정된 것보다 훨씬 복잡함,
후설은 여러 가지 종류의 상호주관성을 다루었고,
이 때문에 신체를 매개로 하는 상호주관성에 대한 후설의 설명에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그의 분석의 전체 토대가 무너지리라고 가정하는 종류의 비판은 막아낼 수 있음,
자하비는 후설의 상호주관성 분석의 본질적인 부분은 구성하는 상호주관성에 대한 설명이라고 생각
타자에 대한 경험
후설에서 타자에 대한 구체적 경험은 언제나 신체적 현출 속에서의 타자에 대한 경험,
이러한 이유로 구체적 상호주관성은 육화된 주관들 사이의 관계,
타자에 대한 나의 경험은 실제 경험이며 후설은 이 경험의 구조를 해명하고자 함,
타자에 대한 경험의 발생과 그것의 특정한 전제들에 대한 해명,
우리는 타인경험,
특히 경험하는 주관의 본성과 관계하는 것들의 가능 조건을 밝혀야 함,
나로 하여금 다른 신체를 신체화된 다른 주관성으로 인식하게끔 하는 것은 정확히 나의 신체의 독특한 주관-객관 지위
내가 나 자신에게 접근하는 것과 동일하게 타자의 의식에 접근한다면,
타자는 타자이기를 그칠 것이고 대신 나 자신의 일부가 됨,
타자의 자기소여는 접근할 수 없고 나에게 초월적,
그러나 내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정확히 그러한 한계,
타자가 정확히 자신의 접근불가능성 속에서 경험되는 한,
우리는 주관-주관 관계를 다룸,
그리고 그것이 비대칭성을 포함한다는 것은 주관-주관 관계의 현상학적 기술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
경험하는 주관과 경험된 주관 사이에는 차이가 있음,
비대칭성이 없다면 상호주관성이 없고,
그저 차별화되지 않는 집합체만 있을 뿐
타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혹은 다른 어떤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들과 대조적인 것으로서 자아를 전제하는 의미를 지니는 관계 개념을 사용하는 것,
다른 것은 정확히 나에게 다른 것이며,
타자는 정확히 나와의 관계 속에서 타자이지,
그것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타자인 것이 아님,
나는 타자를 구성할 때 타자를 창조하는 것도,
고안하는 것도,
산출하는 것도 아님
후설은 초월론적 주관의 자기구성의 문제로 올 때 상호주관성에 결정적 중요성을 돌림,
완전한 구체성 속에 있는 어떠한 주관(심지어 타자조차)도 타자에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음
구성하는 상호주관성
후설은 세계의 객관성과 초월은 상호주관적으로 구성된다고 주장,
이러한 구성의 해명은 초월론적 상호주관성에 대한 분석,
더 구체적으로는 다른 주관에 대한 나의 경험의 고찰을 요구한다고 주장
그러나 타자를 경험한 후에야 주관이 객관성을 구성할 수 있다는 것은 왜 그러한가?
타자는 왜 객관적 세계에 대한 나의 경험의 가능성의 필요조건인가?
기본적으로 후설의 테제는 객관적 타당성에 대한 나의 경험은 다른 주관성의 초월(과 접근불가능성)에 대한 나의 경험에 의해 가능해지며,
이러한 초월이 세계에 객관적 타당성을 부여한다는 것
다른 주관성은 왜 초월적 대상의 구성을 위한 근본적 가능조건인가?
왜 대상은 오직 타자를 통해서만 초월적인 것으로서 현출할 수 있는가?
대상은 그것이 타자에 의해서도 경험될 수 있다면 한갓 나의 지향적 상관자로 환원될 수 없으며,
대상의 상호주관적 경험 가능성은 대상의 사실적 초월을 보증,
원리적으로 타자들에 의해 경험될 수 없는 것은 초월성과 객관성을 가질 수 없음
다른 사람의 몸에 대한 경험에서 우리는 자신의 경험과 타자의 경험이 일치함을 알게 됨,
후설에 따르면,
이러한 일치는 상호주관적 대상,
즉 타자들에 의해서도 경험되고 (경험될 수 있는)
대상에 대한 모든 뒤따르는 경험의 토대
특별한 종류의 타자 경험이란 곧 내가 경험하는 나 자신을 타자로 경험하는 상황,
이러한 종류의 ‘원본적 상호공존’에서 나는 나를 객관화하는 타자의 파악을 인수하고,
나의 자기파악은 타자를 매개로 이루어지며,
나는 스스로를 낯설게 경험하게 됨,
이것이 객관적 세계의 구성에 결정적 중요성을 가짐,
타자가 나에게 그럴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타자에게 다른 자아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나 자신의 구성적 중요성에 두드러진 변화가 일어남
타자와 만날 때 세계에 대한 나의 관점은 단지 많은 관점들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깨닫게 됨,
그러나 이것을 깨닫게 되면 나는 더 이상 경험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나의 특권적 지위를 유지할 수 없음,
경험의 주체가 나인가 타자인가 하는 것은 경험의 타당성에 있어서 어떠한 차이도 없음
타자가 나와 같은 것을 경험한다는 것을 내가 경험할 때,
그리고 나 자신이 타자에 의해 경험된다는 것을 내가 경험할 때 나의 경험은 변함,
이 때부터 나의 경험 대상은 더 이상 그저 나에게만 존재하는 것으로 환원될 수 없음,
타자를 통해서 그것은 주관을 초월하는 타당성을 가지고 구성됨,
나는 더 이상 그것을 나와 나의 사실적 실존에 의존하는 것으로 경험하지 않음,
반대로 상호주관적 대상으로서 그것에는 나의 유일한 실존을 초월하는 존재의 자율성이 부여됨
요약하자면,
후설은 초월성,
객관성, 실재성이라는 범주와 그들의 의미는 상호주관적으로 구성된다고 주장,
이러한 타당성 범주들은 다른 주관을 경험한 주관에 의해서만 구성될 수 있음,
또한 내재성,
주관성, 현출이라는 범주도 마찬가지
후설은 또한 세계와의 지향적 관계 속에서 상호주관성의 자리를 논의,
즉 후설은 나의 지향성이 다른 주관에 대한 나의 구체적 경험 이전에,
즉 아프리오리하게 이미 다른 주관과의 관련을 함축한다고 주장,
후설은 또한 구성적 기능은 우리들의 상속된 언어적 정상성 (우리의 전통)에서 드러나는 익명적 공동체에 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
대상은 다른 주관들과 관련되어 있으며 바로 그 때문에 그 대상은 본질적으로 상호주관적,
대상은 나에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복수의 가능한 주관들과 관계함,
그리고 내가 이러한 상호주관적으로 접근 가능한 대상들을 향할 때마다 나의 지향성도 복수의 가능한 주관들을 지시함,
즉 나의 지각적 지향성은 내가 타자를 경험하느냐 아니냐와 관계없이,
그리고 타자들이 실제로 존재하느냐 아니냐와 관계없이 타자에의 지시연관을 포함,
따라서 나의 지각적 지향성은 후설이 ‘열린 상호주관성’이라고 부르는 그 무엇과의 아프리오리한 관계를 포함
주관성-상호/주관성
후설은 주관이 오직 공동체의 일원인 한에서만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고,
다시 말해 자아는 오직 사회적 존재로서,
즉 사회성의 일원으로서만 존재한다고 주장함과 동시에 철저한 자기 반성은 필연적으로 절대적 상호주관성의 발견으로 이끈다고 주장,
즉 후설은 초월론적 주관성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초월론적 상호주관성에 의존한다고 생각
후설은 “주관성은 오직 상호주관성 안에서만 그것인 바대로 존재”한다고 주장,
그러나 자신의 상호주관성의 현상학이 초월론적 상호주관성의 문제를 무시하는 칸트적 전통을 따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관성의 철학과 단절된다고 생각하지도 않음
후설의 초월론적 근원자아의 유일성에 대한 강조와 상호주관성의 근본적 중요성에 대한 강조는 모순되는가?
두 가지 해법,
첫번째, 후설이 자아에 우선성을 두다가 상호주관성에 우선성을 두면서 입장을 바꿨다는 해석,
두번째, 후설은 결코 자아론적 출발점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그 결과 상호주관성은 피상적 수준에 머물게 되었다는 해석,
그러나 근원 자아의 유일성에 대한 강조가 초월론적,
철학적 기획의 상호주관적 변형과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함,
후설의 초월론적 상호주관성은 삼인칭적 관점에서 기술되고 분석될 수 있는,
세계 내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구조가 아니라 자아 자신이 참여하는 주관들 사이의 관계,
주관성과 상호주관성은 서로 경쟁하는 선택지들이 아니라 서로 보완적이고 상호의존적 개념
D. 생활세계
생활세계 (선과학적 경험 세계)
에 대한 후설의 분석은 후설의 가장 잘 알려진 연구 중 하나이며 현상학 바깥 (사회학)에서 가장 폭넓게 수용되고 있는 연구 중 하나,
생활세계에 대한 후설의 분석은 첫째,
과학적 이론과 실천적으로 정향된 선과학적 경험 사이의 관계를 해명하고 객관주의와 과학주의에 의문을 제기,
둘째, 현상학적 환원으로의 새로운 입문 혹은 길,
후설 사유의 수많은 데카르트적 동기들을 문제 삼고 주관성과 세계의 관계를 [이념들 I]에서와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이해,
셋째, 역사성,
세대성, 전통, 정상성 같은 개념들이 초월론적 철학적 중요성을 띠고 주어지는 한,
상호주관성에 대한 분석의 철저화로 간주
생활세계와 학문의 위기
[유럽 학문의 위기와 초월론적 현상학]에서 가장 체계적으로 다루어짐,
후설은 과학의 객관주의 패러다임을 비판하기 위해 생활세계에 대한 분석에 착수
후설이 결코 실재에 대한 과학적 탐구가 틀리고,
부당하고, 불필요하다고 암시했던 것은 아님,
후설이 비판하고자 했던 부분은 과학의 우쭐대는 자기이해에 있는 어떤 요소들,
후설은 실재가 과학에 의해 정의된다는 과학적 가정에 도전하고 과학의 객관주의에 의문 제기,
즉 후설에 따르면 과학이 실재에 대한 절대적 기술,
즉 전지적 관점에서의 기술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
과학적 이론이 그것의 이념화에 있어서 비록 구체적이고 직관적으로 주어지는 생활세계를 초월할지라도 생활세계는 준거점과 의미 토대로 남아 있음
생활세계란 정확히 무엇인가?
간단히 대답하는 것은 불가능,
후설의 개념은 다의적,
일반적으로 우리는 생활세계에 대한 존재론적 개념과 초월론적 개념을 구분해야 함,
존재론적 개념은 선학문적으로 주어지는 경험의 세계와 학문 이론들을 흡수하면서 발생하며 지속적으로 변형되는 생활세계로 나뉠 수 있음,
그러나 생활세계는 여전히 불변하는 형태학적 morphological 구조를 가짐,
그러므로 여전히 존재론적 본질을 해명할 수 있음,
후설은 생활세계가 그것의 형태학적 유형화로 특징지어지며 모든 가능한 생활세계에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구조가 있다고 주장
그렇다면 이러한 본질적 구조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후설의 답변은 불분명,
종종 공통의 시공간적 세계형식과 같은 수많은 형식적 특성들을 강조,
그리고 자연은 무조건적이고 보편적이고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훨씬 상이하고 구체적인 접근법을 채택,
즉 모든 생활세계는 기능하는 신체에 상호 연관되어 있고 생활세계가 구조화되는 보편적 틀을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신체성과 여기에 속한 모든 것들이라고 주장
생활세계에 대한 존재론적 분석과 다른 과학적 영역에 대한 존재론적 분석 사이에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경우 모두 자연적 태도에 속하며 따라서 초월론적 환원의 수행을 전제하지 않은 존재론적 분석,
그러나 생활세계에 대한 후설의 분석이 초월론적 기획과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님,
생활세계는 주관적 관점들에 의해 구성되고 초월론적 (상호)주관성에, 혹은 세계의식을 지닌 상호주관적 삶에 상호 연관됨
정상성과 전통
후설 후기 사상의 특징은 초월론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의 관계에 대한 결정적 재검토이며 그 결과 초월론적 영역이 확장됨,
이러한 재검토는 상호주관성에 대한 관심에서 생겨났으며,
이 때문에 후설은 세대성,
전통, 역사성, 정상성의 초월론적 의의를 고찰함
우리의 경험은 정상성의 기대에 의해 인도,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 이전 경험들과 충돌하면 우리는 비정상성을 경험하게 됨,
정상성은 관습성,
관습성은 존재에 있어서 개인을 초월
주관들 간의 불일지에 대해 후설은 오직 공동체의 정상적인 구성원들 간의
(불)일치만이 관련된다고 강조,
‘모든 사람’이란 정상성의 주관들에 속한 사람이자,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공동체를 통해서 꼭 정상적인 사람,
오직 이러한 사람들하고만 우리는 진리와 거짓에 대해,
우리의 공통의 생활세계에 대한 존재와 비존재에 대해 논쟁 가능,
오직 정상적인 사람만이 상호구성적인 존재로 파악됨
정상적인 주관들 사이의 불일치의 경험은 우리가 상이한 관점들을 포함할 수 있는 한에서,
세계에 대한 한층 심화된 이해로 이끌 뿐만 아니라,
우리가 우리 모두에게 타당할 진리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하는 한,
학문적 객관성의 구성을 동기지을 수 있음
후설은 몇 가지 서로 다른 단계의 객관성 구별 가능 주장,
첫째, 일상생활에 충분하고 단지 어떤 제한된 상호주관성과 상호 관련된 객관성의 종류,
둘째, 모든 주관들에게 무조건적으로 타당한 ‘엄밀한’
또는 학문적 객관성,
최후의 가장 높은 단계의 구성과 관련하여 후설은 글의 중요성 언급
후설에 따르면 학문적 이론들은 실천적 삶 때문에 점차 증가,
역사적으로 지평을 확장하는 수많은 ‘근원설립들’이 발생,
그러나 이해의 새로운 유형들은 친숙하고 자명해져 그것의 역사적이고 주관적인 기원이 망각되고 심지어 그것들이 참된 실재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간주됨,
그러나 이론적인,
이념화하는 태도는 역사적으로 발달한 방법의 산물일 뿐,
이러한 사실이 이후 망각됨
그러나 이러한 후설의 강조가 학문적 이념성들을 경험적이고 사실적인 실재성으로 환원하려는 시도는 아님,
후설의 결론은 칸트적인 초월 철학의 정적 본성에 대한 비판,
후설의 결론은 학문적 합리성으로 가능해지는 구성적 수행은 발생을 갖고 시대를 거쳐 발달한다는 것,
현재의 형태에서 학문은 하나의 전통이고 하나의 문화적 형성물임
한편,
후설은 다양한 단계의 정상성과 객관성 사이에 상관관계가 존재한다고 주장,
심지어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존재와 진리도 주관 상관적 정상성,
즉 합리적 주관들의 정상성과 상호관련되어 있음
후설의 정상성과 역사성:
“원래 나에게서 (근원설립하면서)
생겨난 것은 나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시대의 아이’다. 나는, 자신의 전통을 갖고,
세대적 주관들과 함께,
그리고 가장 가깝고 가장 먼 선조들과 함께 다시 새로운 방식으로 공동체를 갖는,
가장 넓은 우리-공동체 속에 있다.
그리고 그러한 공동체는 나에게 영향을 행사했고,
나는 상속자로서의 나로 존재한다.”
(Hua 14/223)
후설에게 고여 있는 세계는 없음,
세계는 우리에게 오직 정상성과 비정상성의 상대성 속에서만 주어지기 때문,
세계의 존재는 겉보기에만 안정적일 뿐,
실제로 그것은 원리적으로 무너질 수 있는 정상성에 의한 구성물
그러나 후설이 현상학적 출발점으로써 초월론적 자아를 생활세계의 역사적 공동체로 대체했다고 결론짓는 것이 가능할까?
아니다. 후설이 비록 초월론적 상호주관성을 초월론적 토대로 간주했을지라도 후설의 현상학적 접근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
나를 중심에 두는 것 없이는 공동체도 없고,
따라서 상호주관성이 펼쳐질 수 있는 초월론적인 원초적 자아가 없이는 어떠한 세대적 상호주관성도 없음,
후설에 따르면,
‘우리’는 나로부터 나와서 동시대의 타자들과 과거의 타자들과 미래의 타자들로 뻗어나간다.
역사적으로 우선인 것은 우리의 현재다.
후설이 명확하고 단호한 방식으로 역사성과 초월성을 통합시켰다는 주장은 무리,
그러나 후설 철학의 범위와 포괄성은 인정해야 함,
후설이 고전적인 데카르트-칸트적인 주체 철학을 옹호하지는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후설은 유아론자가 아니라 오히려 상호주관성 문제를 가장 중요한 초월론적 철학적 개념으로 다루었다는 사실은 설명되어야 함
결론
에드문트 후설:
20세기 철학의 중심인물 중 한 명,
현상학의 창시자였고 지향성 이론과 생활세계 개념 발전,
하이데거의 스승
후설이 고전적 현전의 형이상학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거나 후설의 사유가 토대주의적이고 관념론적이며 유아론적으로 남아 있었다는 비판은 모두 낡은 것,
후설이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나치 시기 그의 철학을 가르칠 수 없었고 독일 철학자들의 한 세대 전체가 후설 대신 하이데거 현상학으로 훈련받음,
심지어 프랑스에서도 후설을 하이데거의 시각으로 읽음,
그러나 [후설 전집]
출간으로 후설 현상학의 핵심 개념에 대한 보충적 이해가 가능해지고 이전에 알 수 없었던 후설 사유의 면모들이 드러남
한편 통상적으로 후설의 사유가 몇 가지 상이한 국면으로 구분될 수 있다는 설명은 어느 정도 맞을지라도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음,
그의 강연과 연구수고들을 읽으면 후설 사유의 연속성이 자명해짐,
이를 통해 후설 사상에서 사실성,
수동성, 타자성, 윤리학의 차원이 강조되고 후설 사상의 발달에서 통일성과 정합성이 드러남
셸러,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레비나스, 슈츠, 리쾨르, 앙리, 데리다와 같은 철학자들이 자신들의 철학 상당 부분을 후설에 빚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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