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차이 그 자체
1절 차이와 어두운 바탕
차이는 본래적 규정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바로 그런 상태이다.
두 사물 ‘사이’의 차이는 단지 경험적인 차이에 불과하고,
그에 상응하는 보통의 규정들은 외생적 규정들에 불과하다.
(84)
재현의 네 측면 (4중의 뿌리,
행복한 국면,
큰 차이와 작은 차이)
재현의 요소는 네 가지 주요한 측면들을 지닌다—규정되지 않은 개념의 형식 안에서 등장하는 동일성,
규정 가능한 궁극적 개념들 간의 관계 안에서 성립하는 유비,
개념 내부적 규정들의 관계 안에서 성립하는 대립,
개념 자체의 규정된 대상 안에서 나타나는 유사성.
이런 형태들은 매개가 지닌 네 개의 머리 혹은 네 개의 끈과 같다.
(87)
2절 개념적 차이:
가장 크고 가장 완전한 차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한다.
가장 크면서도 가장 완전한 차이가 있다.
차이 일반은 상이성 혹은 이타성과 구별된다.
(88)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른 차이의 논리학:
차이의 개념과 개념적 차이의 혼동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차이의 차이는 거짓된 운반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서는 차이가 본성을 바꾸는 것을 결코 볼 수 없다.
또한 가장 보편적인 것과 가장 독특한 것을 각각의 직접성 안에 묶어놓는 어떤 차이의 분화소를 찾을 수도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차이의 고유한 개념을 설정한다는 것이 차이를 개념 일반 안에 기입하는 것으로 뒤바뀐다.
차이의 개념을 규정한다는 것이 차이를 규정되지 않은 개념의 동일성 안에 기입하는 것으로 뒤바뀐다.
(92)
종적 차이와 유적 차이
차이의 철학을 위한 새로운 기회가 찾아온 것이 아닐까?
(94)
재현의 네 측면:
개념의 동일성,
판단의 유비,
술어들의 대립,
지각된 것의 유사성
종적 차이가 차이를 규정되지 않은 개념 일반의 동일성 안으로 기입하는 데 그친다면,
이제 (분배적이고 위계적인)
유적 차이는 차이를 규정 가능한 가장 일반적인 개념들의 유사-동일성 안에 기입하는 데 그친다…
이 두 종류의 기입은 서로 보완적이고,
같은 공리에 기초하고 있으며,
동시에 행복한 국면의 경계를 자의적으로 그려놓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차이의 철학 전체는 이런 이중적 기입을 핵심으로 한다.
(96)
차이와 유기적 재현
유적 차이와 종적 차이들은 재현 안에서 공모 관계를 맺는다
(97)… 그러나 둘 중 어느 관점에 서든,
본래적 차이는 오로지 반성적 개념으로만 드러날 뿐이다.
(98)
3절 일의성과 차이
존재론적 명제는 하나밖에 없었다.
“존재는 일의적이다.”라는 명제가 그것이다.
오로지 하나의 존재론만이 있었다.
둔스 스코투스의 존재론이 그것이다.
(99)
존재는 모든 양상들에 대해 ‘동등’하다. 그러나 그 양상들 자체는 서로 동등하지 않다.
존재는 모든 양상들에 대해 단 하나의 의미에서 언명된다.
그러나 그 양상들 자체는 서로 같은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일의적 존재의 본질은 개체화하는 차이들에 관계하는 데 있다.
그러나 그 차이들은 서로 같은 본질을 지니지 않으며,
또한 존재의 본질을 변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즉 존재는 차이 자체를 통해 언명된다.
(101)
분배의 두 유형
분배는…
전혀 다른 두 가지 뜻을 지닌다…
우선 배당된 몫을 함축하는 분배…
즉 문제는 이미 분배된 것 자체를 할당하는 데 있다…
그러나 이와는 전적으로 다른 분배가 있다.
그것은 유목적이라 불러야 하는 분배로서,
소유지도 울타리도 척도도 없는 유목적 노모스이다.
(101-2)
동등한 존재는 중개나 매개 없이 모든 사물들에 직접적으로 현전한다…
그러므로 존재의 일의성은 또한 존재의 동등성을,
평등을 의미한다.
일의적 존재는 유목적 분배이자 왕관을 쓴 무정부 상태이다.
(104)
일의성과 유비의 화해 불가능성
개체화하는 차이가 종적 차이와 본성상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먼저 보여주어야 하는 것은 개체화의 선행성이다 (106)… 그것은 일의성 안에서 존재하거나 존재해야만 하는 것은 개체화하는 차이들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존재하거나 존재해야만 하는 것은 존재,
본연의 차이인 존재이다.
존재는 차이를 통해 언명된다는 의미에서 차이 자체이다…
존재는 일의적이다.
그런 존재 안에서,
그 존재에 대해서 우리가,
우리의 개체성이 다의적인 것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다.
(107)
일의성의 역사적 단계들:
둔스 스코투스,
스피노자, 니체
철학의 역사에서 존재의 일의성이 정교화되는 과정은 중요한 세 단계를 거친다.
첫 번째 단계를 대표하는 인물은 둔스 스코투스이다 (107)… 우선 추상적인 개념 안에서 존재를 중성화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일의적 존재를 단지 사유하기만 했을 뿐이다.
그리고 기독교의 요구들에 따라 그가 피하려고 애쓰는 적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범신론이라는 적이다 (108)… 두 번째 단계에서 스피노자는 상당한 진전을 이루어낸다.
그는 일의적 존재를 중립적이거나 무차별적으로 사유하는 대신 순수한 긍정의 대상으로 만든다.
일의적 존재는 단일하고 보편적이며 무한한 실체와 하나를 이룬다.
신 또는 자연으로 정립되는 것이다
(109)… 스피노자에 이르러 일의적 존재는 더 이상 중립성을 띠지 않는다.
다만 표현성을 띠게 된다.
일의적 존재는 표현적이고 긍정적인 진정한 명제가 된다.
(110)
영원회귀 안의 반복은 존재의 일의성을 정의한다
니체가 영원회귀를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영원회귀는 동일자의 회귀를 의미할 수 없다.
오히려 모든 선행하는 동일성이 폐기되고 와해되는 어떤 세계(힘의 의지의 세계)를 가정하기 때문이다.
회귀는 존재이다.
하지만 오직 생성의 존재일 뿐이다.
영원회귀는 ‘같은 것’을 되돌아오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성하는 것에 대해 회귀가 그 유일한 같음을 구성하는 것이다.
회귀, 그것은 생성 자체의 동일하게-되기이다. 따라서 회귀는 유일한 동일성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차적인 역량에 해당하는 동일성,
차이의 동일성일 뿐이다.
그것은 차이나는 것을 통해 언명되고 차이나는 것의 둘레를 도는 동일자이다.
차이에 의해 산출되는 이런 동일성은 ‘반복’으로 규정된다.
(111)
영원회귀는 존재의 일의성이며 그런 일의성의 실제적 실현이다.
영원회귀 안에서 일의적 존재는 단지 사유되고 긍정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실현된다…
영원회귀의 바퀴는 차이에서 출발하여 반복을 산출하는 동시에 반복에서 출발하여 차이를 선별한다.
(113)
4절 차이와 망아적 재현:
무한대와 무한소
자기 자신 안에서 그런 무한을 발견할 때,
재현은 더 이상 유기적 재현이 아니라 망아적 재현의 모습을 취한다…
즉 이제 개념은 전체이다…
개념은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이르기까지 온갖 변신을 취하는 규정을 따라다니면서 그 규정과 더불어 짝을 이룬다.
그리고 그 규정을 근거의 자리에 놓는 가운데 순수한 차이로 재현한다…
근거는 하나이면서 언제나 똑같은 ‘총제적’
계기이다. 근거는 또한 차이가 소멸하는 동시에 생산되는 계기,
사라지는 동시에 나타나는 국면이다.
(114-5)
이유로서의 근거
이런 의미에서 망아적 재현은 차이를 만든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차이를 선별하지만 이렇게 차이를 근거와 관계짓는 무한을 도입하는 가운데 선별하기 때문이다
(116)… 망아적 재현의 원리는 근거에,
그 재현의 요소는 무한에 있다.
반면 유기적 재현의 원리는 형상에,
그 재현의 요소는 유한에 있다.
(117)
헤겔에 따른 차이의 논리학과 존재론:
모순
(헤겔에 있어)
차이가 자신의 고유한 개념을 발견하는 것은 바로 이 정립된 모순 안에서이다.
이 모순 안에서 차이는 부정성으로 규정된다.
(120)
라이프니츠에 따른 차이의 논리학과 존재론:
부차모순(연속성과 식별 불가능자들)
라이프니츠의 입장에서는 연속성의 법칙과 식별 불가능자들의 원리 사이에 결코 모순이 성립되지 않는다.
(125)
모든 모나드들은 공통적으로 세계를 표현하고 있지만,
세계는 자신의 표현들보다 앞서 실존한다.
그런데 세계는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 것의 바깥에서,
곧 모나드들 자체의 바깥에서는 진정 실존하지 않는다…
즉 신은 죄인 아담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먼저 아담이 죄를 지은 세계를 창조했다.
(126)
망아적 재현 혹은 무한한 재현의 불충분성
(라이프니츠나 헤겔 모두에게 있어)
무한한 재현은 불충분…
(왜냐하면) 무한한 재현은 재현의 전제 조건인 동일률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129)… 라이프니츠와 헤겔 사이에서는 차이에 대해 가정된 부정성이 부차모순적 제한으로 사유되는지,
아니면 모순적 대립으로 사유되는지의 여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무한한 동일성 그 자체가 분석적인 것으로 정립되는지,
아니면 종합적인 것으로 정립되는지의 여부도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차이는 여전히 동일성에 종속되어 있다.
차이는 부정적인 것으로 환원되고 있으며,
상사성과 유비 안에 갇혀 있다…
따라서 무한한 재현은 유한한 재현과 똑같은 결함을 지닌다.
그 결함은 차이의 고유한 개념을 차이의 기입과 혼동하는 데 있다.
개념 일반의 동일성 안으로 차이를 기입하는 것과 차이의 개념을 혼동하는 것이다.
(130)
5절 차이,
긍정, 부정
차이는 대립을 가정하지 않는다.
대립을 가정하는 것이 차이가 아니라 차이를 가정하는 것이 대립이다.
그리고 대립은 차이를 해소하기는커녕,
다시 말해서 근거로까지 끌고 가기는커녕,
차이를 왜곡하고 변질시킨다.
우리는 즉자적 차이 그 자체가 ‘이미’
모순이 아님을 말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나아가 차이는 모순으로 환원되거나 소급되는 것이 아님을 또한 말하고 있다
(133)… 부정적인 것,
부정성은 차이의 현상을 붙들지조차 못한다.
다만 차이의 환영이나 부대 현상만을 받아들일 뿐이다.
모든 정신현상학은 부대현상학이다.
(135)
가상으로서의 부정적 사태
차이의 철학이 거부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모든 규정은 부정”이라는 명제이다…
차이는 본질적으로 긍정의 대상,
긍정 자체이다.
긍정은 본질적으로 그 자체가 차이다.
(135-6)
부정적인 것의 배제와 영원회귀
다른 발상법을 따른다면 긍정이 일차적이다.
긍정은 차이,
거리를 긍정한다…
부정적인 것,
그것은 부대 현상이다
(139)… 차이는 긍정이다.
하지만 이 명제는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가령 차이는 긍정의 대상이라는 것,
긍정 자체는 다양체의 성질을 띤다는 것,
긍정은 창조라는 것,
그뿐 아니라 긍정은 창조되어야 한다는 것 등을 의미한다.
긍정은 차이를 긍정하는 긍정으로,
그 자체가 차이인 긍정으로 창조되어야 한다.
(141)
부정은 긍정의 결과이다.
이는 부정이 긍정에 뒤이어 나오거나 긍정의 옆쪽에서 출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부정은 보다 심층적인 발생적 요소의 그림자로서만 출현할 뿐이다…
재현 앞에서는 차이를 통해 긍정된 세계는 달아나기 마련이다.
재현은 단 하나의 중심만을 지닌다.
(142)
차이는 요소,
궁극적 단위가 되어야 하며,
따라서 배후에 있는 다른 차이들과 관계해야 한다.
이 배후의 다른 차이들에 의해서 차이는 결코 동일한 정체성 안에 빠지지는 않으며 다만 분화의 길로 들어선다.
(143)
차이는 모든 사물들의 배후에 있다.
그러나 차이의 배후에는 아무것도 없다…
반복은 재현에 대립한다…
반복의 궁극적 요소는 계속되는 불일치에 있으며,
재현의 동일성에 대립한다.
(145-6)
6절 플라톤에 따른 차이의 논리학과 존재론
나눔의 방법에 등장하는 것들:
지망자와 근거의 시험,
물음과 문제,
(비)-존재와 부정적인 것
우리는 플라톤의 나눔의 방법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요구들에 입각해서 이해하려는 잘못된 관행을 지니고 있다…
나눔은 ‘일반화’를 뒤집어놓은 것이 아니다.
결코 종별화가 아닌 것이다.
문제는 종별화의 방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선별의 방법에 있다.
중요한 것은 하나의 규정된 유를 한정된 종들로 나누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혼잡한 종을 순수한 계통들로 나누는 것,
혹은 순수하지 않은 소재에서 출발하여 순수한 계통들을 선별하는 것이다.
(150-1)
차이는 더 이상 하나의 같은 유에 속하는 상반자들 사이의 차이가 아니다…
그것은 순수한 차이,
,차이의 순수한 개념이지 결코 개념 일반 안에서 매개된 차이,
유와 종들 안에서 매개된 차이가 아니다.
(151)
(플라톤의)
‘비-존재’라는 표현에서 ‘비’는 부정적인 것과는 다른 어떤 것을 표현한다…
그래서 한편 비-존재는 없고 부정은 가상적이며 근거가 없다.
다른 한편 비-존재는 있고 이 비-존재는 존재 안에 부정적인 것을 위치시키며 부정의 근거가 된다.
하지만 우리는 아마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비-존재는 있다.
그리고 동시에 부정적인 것은 가상적이다.
(158)
존재와 물음을 서로 관련짓는 어떤 존재론적인 ‘통로’,
‘틈’, ‘주름’ 같은 것이 있다.
이런 관계에서 볼 때,
존재는 본연의 차이 그 자체이다.
존재는 또한 비-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비-존재는 부정적인 것의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문제틀의 존재,
문제와 물음의 존재이다.
본연의 차이 자체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거꾸로 그것은 비-존재이고, 이 비-존재는 본연의 차이,
곧 반대가 아닌 다름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존재는 차라리 (비)-존재라 적어야 하고,
그보다는 ?-존재라고 적는 편이 훨씬 낫다…
우리가 (비)-존재를 부정적인 것과 혼동한다면,
모순은 불가피하게 존재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러나 모순은 여전히 겉모습이거나 부대 현상이다…
모순의 저편은 차이다.
비-존재의 저편은 (비)-존재이고, 부정적인 것의 저편은 문제와 물음이다.
(158-9)
7절 차이의 문제에서 결정적인 것:
허상과 허상의 저항
(플라톤에게)
차이는 여전히 같음이나 일자에 의존한다.
또 같음을 개념 일반의 동일성과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같음은 오히려 사물 ‘자체’인 이데아의 특징이다…
플라톤주의는 차이를 그 자체로 사유하지 않는다.
그 대신 차이를 이미 어떤 근거에 관련짓고 같음의 사태에 종속시키며,
또 신화적 형식을 통해 매개를 도입한다.
플라톤주의를 전복한다는 것,
그것은 모사에 대한 원본의 우위를 부인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이미지에 대한 원형의 우위를 부인한다는 것이며 허상[시뮬라크르]과 반영들의 지배를 찬양한다는 것이다.
(161-2)
재현이 동일성을 요소로,
유사한 것을 측정 단위로 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허상 안에 나타나는 바 그대로의 순수한 현전은 ‘계속되는 불일치’를 측정 단위로 한다.
다시 말해서 어떤 차이가 언제나 그 순수한 현전의 직접적이고 무매개적인 요소인 것이다.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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