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혁명사
13 버크와 페인의 엇갈린 예언
에드먼드 버크(1729-1797)와 토머스 페인(1737-1809)은 <<프랑스혁명에 대한 성찰>>과 <<인권>>
등을 통해 프랑스혁명에 대해 치열한 논쟁을 벌임.
버크는 프랑스혁명이 독재와 공포정치로 전락할 것으로 생각,
페인은 프랑스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공화주의’를 성취함으로써 번영을 이룩하고 유럽혁명으로 수출될 것으로 생각.
정치사상적 차원에서 버크와 페인은 각각 보수주의와 진보주의(혹은 공화주의)를 대표하는 사상가.
버크는 왕정을 옹호,
페인은 공화정을 지지.
그러나 버크의 보수주의를 수구주의로 봐서는 안 됨.
버크가 반대한 것은 개혁이 아니라 혁명이라는 과격하고 급진적인 수단.
프랑스혁명 전까지 버크의 일관된 사상은 자유주의,
버크는 프랑스혁명이 프랑스인들의 자유를 억압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음.
<<성찰>>에서는 프랑스혁명이 독재와 공포로 파국을 맞을 것이라는 예언을 자주 접할 수 있음.
미국 독립혁명과 달리 프랑스혁명은 영국의 헌정을 위협하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버크로 하여금
<<성찰>>을 쓰게 함.
버크는 프랑스의 혁명가들을 과거 로마제국의 문명을 파괴한 게르만 정복자들에 비유.
버크는 추상적인 계몽주의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버크에게 자연법과 자연권은 형이상학적으로 진리이지만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는 허위.
버크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평등하게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사회 속에서 불평등하게 태어나는 것이기에 평등 자체가 반자연적.
버크는 평등이 ‘공포’와 ‘교수대’로 이어질 것임을 정확히 예언.
또한 국민의회는 소유권이 자연권이라고 선언했으나 교회재산을 몰수함으로써 그 선언이 허구임을 자인한 셈.
버크가
<<성찰>>을 집필할 무렵,
공화주의는 혁명가들의 이념 속에 들어오지 않았음.
버크는 ‘민주정’이 전제정보다 훨씬 잔혹할 것임을 예견.
버크는 프랑스혁명이 결국 민중적 장군의 지배로 끝맺을 것임을 예언.
또한 버크는 ‘공포정치’의 도래에 대해서도 예언.
프랑스혁명이 추상적이며 형이상학적인 자연법에 의거했기 때문에 공포정치로 탈선했다는 버크의 성찰은 이데올로그나 공리주의자들 같은
19세기 초 자유주의 이론가들에게 계승됨.
페인의
<<인권>>은 버크의
<<성찰>>을 반박하는 것이기에 프랑스혁명을 옹호하는 내용으로 가득함.
페인은 시종일관 공화주의라는 시각으로 프랑스혁명을 바라봄.
페인은 인민이 스스로 통치자를 선택하는 것은 “인간의 권리”라고 말함.
프랑스 혁명은 “인간의 권리에 대한 이성적 성찰”
속에서 일어난 혁명.
또한 “왕정은 전쟁,
공화정은 평화”라는 단순 도식은
<<인권>>에서 누누이 강조됨.
국왕탈주미수사건 이후 공화주의가 구체화.
페인은 프랑스혁명이 혁명을 넘어 “인간의 갱생”을 지향한다고 격찬.
그러나 루이16세 처형을 둘러싸고 로베스피에르의 적이 되고 왕정폐지 후 프랑스혁명에 대한 실망감을 드러냄.
버크는 공포정치의 도래를 예언했고,
페인은 공포정치를 직접 체험.
페인에 의하면 “진정한 공화주의자들은 로베스피에르의 시대에 가장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버크 또한 로베스피에르를 극렬하게 비난.
혁명이 공포정치로 전락한 이유는?
첫번째는 ‘상황론’,
전쟁과 내전이라는 국가 존망의 위기 상황이 공포정치라는 비상조치를 요구했다는 것,
반면에 수정주의 역사가들은 혁명 자체를 공포정치의 원인으로 봄.
혁명은 전쟁을 동반하고 전쟁은 공포정치를 동반하니 결국 혁명은 공포정치를 동반한다는 것.
공포정치는 페인에게는 탈선이었으나 버크에게는 혁명 본래의 행보.
보수주의자 버크는 이 모든 것을 내다봄.
페인의 이상주의는 고상했으나 비현실적.
버크와 페인은 프랑스혁명의 증인이자 예언자.
페인은 버크가 예견했던 공포정치와 군사독재때문에 고초를 겪었고 좌절.
페인의 공화주의 예언은 장기적으로는 실현됨.
14 미슐레의 공화주의 프랑스 혁명사
쥘 미슐레
(1798-1874)는 근대 프랑스 역사학의 비조.
그의
<<프랑스혁명사>>는 1847년부터 1853년까지 6년에 걸쳐 출간.
미슐레의 공화주의 혁명사는 민중이 주역인 혁명사.
미슐레는 혁명을 두 시기로 나누며 두 시기에 대해 대조적인 평가를 내림.
민중이 주도한 시기는 “인간적이고 온정적”이었던 반면,
엘리트 예컨대 로베스피에르 같은 혁명가가 민중을 배제하고 혁명을 주도한 시기는 혁명을 파괴한 시기.
자코뱅 클럽은 자발적이며 자연적인 혁명의 감시인으로 출발했으나 최종적으로 파리코뮌을 제거하고 당통파를 제거함으로써 민중으로부터 이완되었고,
혁명의 추진력을 상실.
자코뱅주의는 대내적으로 혁명의 적들을 제거하기보다는 만들어냈으며,
대외적으로는 프랑스와 혁명에 대한 증오심을 높이는 결과를 초래.
왜 해방이었던 혁명이 폭력과 억압으로 변질된 것인가?
혁명에 실망한 민중이 집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자코뱅 클럽의 구성이 민중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엘리트들이 권력투쟁에 빠져 자해적인 공포정치를 자행했기 때문.
한마디로 민중과 엘리트가 유리되었기 때문.
미슐레는 외부적으로는 유럽왕국들,
특히 영국이 혁명의 적이었고,
내부적으로는 방데 전쟁 등 농민반란이 혁명의 적.
또한 그는 혁명정부의 반교회 정책을 지지.
미슐레의 반교권주의는 유명.
<<프랑스혁명사>>
전편에 가득.
미슐레에게 혁명은 구체제의 전제정으로부터 민중을 해방시킨 위대한 사건이었는데,
군주와 교회는 바로 그 전제정의 동반자.
미슐레는 동시대 사회주의 역사학에 비판적.
프랑스혁명에서는 빈곤문제나 사회문제보다 관념문제가 더 중요.
혁명은 “결핍의 자식이 아니라 철학(계몽사상)의 자식”.
미슐레에 따르면 로베스피에르는 사회주의를 공격했고 그로 인해 급진적인 파리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해 패배하고 그것 때문에 죽었음.
프랑스혁명가들 가운데 바뵈프를 제외하고 엄밀한 의미의 사회주의자로 꼽힐 사람은 없었음.
미슐레는 프랑스혁명을 ‘경작지를 소유하게 된 농민’--‘급진적인 파리 민중’--‘혁명 엘리트’의 세 요소가 만들어내는 드라마로 파악.
미슐레가 보기에 로비스피에르는 고결하고 진보적인 혁명가라기보다 “정치적 위선자”.
미슐레가 시도한 공화주의 프랑스혁명사의 주인공은 민중.
미슐레는 혁명이 본궤도를 달리던 시기를 민중 혹은 민중과 엘리트가 함께 혁명을 주도하던
1789년 7월 14일부터 1792년 8월 10일까지로 봄.
민중이 혁명 전선에서 물러나고 엘리트 혁명가들이 혁명을 주도하면서 혁명은 궤도에서 이탈.
15 한나 아렌트와 프랑스혁명
아렌트(1906-1975)는 <<혁명론>>(1963)에서 미국혁명과 프랑스혁명을 비교한 후,
미국혁명은 성공한 반면 프랑스혁명은 실패했다고 판정.
아렌트는 <서론>에서 전쟁과 혁명의 관계를 살펴보면서 전쟁과 혁명은 ‘폭력’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고 주장.
아렌트에 의하면 미국혁명의 “새로운 시작”은 공화국의 수립이었으며,
프랑스혁명의 “새로운 시작”은 ‘자유’.
프랑스혁명가들은 공화주의적 자유를 원함.
공화주의적 자유는 평등한 시민이 ‘공화국’의 정치에 참여하는 것.
아렌트는 이러한 자유에는 전체주의적 요소가 있다고 지적하고 로베스피에르가 혁명정부의 지배를
(폭정에 대한)
“자유의 전제”라는 역설적인 표현으로 정의한 것에 주목.
아렌트는 프랑스혁명이 ‘탈선’한 것을 빈자들의 개입때문이라고 설명.
역사가들은 프랑스혁명이 빈곤의 혁명인가 번영의 혁명인가를 놓고 논쟁을 벌였지만 아렌트는 역사가들의 논의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음.
미슐레는 민중의 빈곤을 프랑스혁명의 주요 원인으로 봤지만 토크빌은 경제적 발전과 자유의 확대가 혁명을 추동했다고 주장.
라부르스는 18세기 프랑스의 경제적 번영에도 불구하고 농민들과 도시 민중들은 오히려 빈곤해졌다고 봄으로써 ‘번영의 혁명’과 ‘빈곤의 혁명’을 절충.
부유해진 부르조아가 혁명을 시작했으며,
빈곤해진 민중이 혁명에 참여하여 혁명을 추동했다는 설명 가능.
상퀼로트는 빈자들인가?
상퀼로트에 빈자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모두 빈자는 아니었음.
상퀼로트의 적은 부자가 아니라 특권계급이었음.
이상의 논의를 통해 볼 때 아렌트가 프랑스혁명에 개입한 민중을 ‘빈자’라고 규정한 것은 지나치게 단순.
아렌트에 따르면 프랑스혁명이 미국혁명과 다른 경로를 취하게 된 것은 빈자들이 개입해서 사회적 평등을 요구했기 때문인데,
이러한 ‘사회혁명’을 우해 제시된 개념이 ‘행복’.
이 때의 행복은 공적 행복,
또는 공화주의적 행복,
공동체의 행복.
아렌트는 프랑스혁명이 미국혁명과 달리 공화주의를 계속 유지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프랑스혁명이 절대군주정의 뒤를 이었기 때문이라고 주장.
미국혁명가들이 정부 권력을 제한할 필요성에 동의하고 영국의 헌정 체제를 모델로 삼은 몽테스키외의 권력분립론을 자명한 원리로 받아들인 반면,
프랑스혁명가들이 절대군주론의 이론적 대체물인 루소의 일반의지론을 자명한 원리로 받아들인 것은 두 나라의 정치문화가 달랐기 때문.
아렌트에 의하면 프랑스혁명은 실패.
프랑스혁명은 미국혁명과 마찬가지로 공화국을 수립하면서 혁명의 길에 들어섰으나,
빈자들이 혁명에 개입하면서 ‘정의’가 ‘법’을 위협했고 역사적으로 누적된 고질적인 사회문제가 사회혁명을 일으켜 최종적으로 ‘자유의 전제’,
‘덕의 공표’,
‘공포정치’의 나락으로 떨어짐.
아렌트의 기준으로 보면 공화국을 수립한 미국혁명이 진정한 혁명.
16 알베르 소블의 마르크스주의 프랑스혁명사
알베르 소블(1914-1982)은 <<프랑스혁명사>>에서 혁명 직전 농민들에게 부과되었던 “봉건적 부과조가 과중하고 굴욕적”이었다고 주장,
그러나 폴 부아가
<<서부의 농민들>>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다름.
소불의 농촌은 중세적인 반면,
폴 부아의 농촌은 근대적.
귀족의 특권에 대한 소불의 설명도 정확하지 않음.
소불은 영주와 농노의 관계를 설명한 다음 “봉건적 생산양식의 구조적 위기”를 기술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 설명 틀 속으로 들어감.
소불에 따르면
1791년 헌법에서 드러나듯이 이 때까지의 혁명은 부르주아를 위한 부르지아를 위한 혁명이었기 때문에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혁명으로 심화되어야 했음.
소불은 부르주아 혁명에 대한 평가가 인색한 만큼이나 부르주아 혁명가들에 대한 평가도 인색.
부르주아 혁명은
1792년 8월 10일 파리 민중과 연맹군이 튈르리 왕궁을 공격하여 왕정을 붕괴시킴으로써 민중혁명 단계로 넘어감.
소불은 “1792년
8월 10일 혁명이 시작되었다”고 봄.
제2의 프랑스혁명,
민중혁명, 진정한 혁명이 시작되었다는 것.
1793년 5월 31일~6월 2일 파리 민중의 의회 압박으로 지롱드파가 몰락하고 산악파가 권력을 장악한 사건을 두고 소불은 스승인 조르주 르페브르의 뒤를 이어 “1793년
5월 31일과 6월 2일의 혁명”이라고 부름.
소불에 따르면 민중은 여세를 몰아 산악파에 공포정치와 통제경제를 요구했으나 로베스피에르를 위시한 산악파 의원들은
1794년 3월 에베르파를 제거함으로써 파리 민중과의 연대를 끊고 부르주아 혁명으로 복귀.
혁명의 종식.
소불은 “1792년
8월 10일의 혁명”부터 1795년 목월 봉기까지의 시기를 ‘자유의 전제,
혁명정부와 민중운동’이라는 제목으로 기술.
이 시기는 민중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민중운동이 끝나는 시기.
소불은 “공포정치는 본질적으로 반란자와 반역자들로부터 국민과 혁명을 지키려는 방어수단”이었으며 “공포정치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는 신중해야 한다”고 주장.
소불이 근대의 농민을 중세의 농노처럼 묘사한 것,
귀족의 특권을 과장한 것,
부르주아 혁명의 성과에 대해 지나치게 인색한 것,
민중혁명의 폭력성에 대해 둔감한 것 등은 이념적 편향성에서 나온 것.
17 프랑수아 퓌레의 수정주의 프랑스혁명사
프랑수아 퓌레(1927-1997)는 브로델이 제시한 ‘장기 지속’이라는 관점에서 프랑스혁명을 바라봄.
프랑스혁명을 이러한 시각에서 바라보면 혁명이라는 ‘사건’의 의미가 축소됨.
퓌레는 프랑스혁명에 대한 해석을 놓고 당대의 지배적인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임.
퓌레에 따르면 프랑스혁명은 여러 ‘혁명들’로 구성,
‘전혁명’, ‘국민의회의 혁명’,
‘파리와 도시들의 혁명’,
‘농촌의 혁명’.
퓌레가 보기에 진정한 의미의 혁명은 ‘국민의회의 혁명’,
나머지 두 혁명은 퓌레와 리셰의 유명한 개념에 의하면 ‘이탈’.
“프랑스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다”라는 공식은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의 신념,
퓌레는 혁명 전 자유주의적 귀족들과 제3신분 지식인들이 계몽주의 사상을 공유했고 절대군주정을 거부했으며 “새로운 엘리트”를 형성했음을 강조하면서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사회경제적 프레임 거부.
퓌레에 의하면 국민의회의 혁명은 도시 민중과 농민들의 개입과 압력으로 계몽주의가 설정한 궤도를 이탈(derapage).
또한 퓌레는 지롱드파와 산악파가 벌인 투쟁이 그들의 사회적 적대감에 조응한다고 보지 않음.
지롱드파와 산악파의 투쟁은 사회적 적대감에서 분출된 투쟁이 아니라 권력을 잡기 위한 정치적 성격의 투쟁이었으며 상퀼로트는 산악파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이용한 “도구”.
상퀼로트는 “진보적인 혁명집단”이나 프롤레타리아혁명의 맹아가 아니라 그들의 무기는 폭력이었고,
그들의 행동은 반동적인 형태였을 뿐.
퓌레는 소불과 마조리크 같은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이 “목적론적 환상”에 입각하여 혁명을 바라보았다고 비판.
퓌레가 사회경제적인 관점을 버리고 취한 관점은 정치적인 관점.
왕이 귀족들과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한 것이 위기의 시작.
왕이 귀족의 요구에 항복함으로써 권력의 공백이 발생하여 권력투쟁이 벌어졌으며 그 틈으로 민중과 민중 이데올로기가 침투해 들어왔다는 것.
퓌레는 나중에 전쟁이 혁명에 내재되어 있었다고 주장하며 ‘이탈론’을 수정.
공포정치는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생겨난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혁명에서 생겨난 필연적인 현상.
퓌레는
1978년 <<프랑스혁명 해석>>과 1995년 <<환상의 과거,
20세기 공산주의 이념 연구>>에서 프랑스혁명과 러시아혁명의 상관관계를 분석.
러시아혁명은 자코뱅의 이데올로기를 이어받음.
퓌레에 의하면 이데올로기란 혁명의식을 떠받치는 두 개의 신념체계,
하나는 모든 개인적,
도덕적, 지적 문제를 정치적인 문제로 환원하여 정치적인 해결 대상으로 보는 신념체계,
다른 하나는 인간의 행동과 지식과 도덕 사이에는 완전한 합치가 존재한다는 신념체계.
퓌레는 프랑스혁명과 볼셰비즘의 유사성을 강조하고 ‘전체주의’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프랑스혁명과 볼셰비즘을 비교.
퓌레의 수정주의 프랑스혁명사는 마르크스주의 프랑스혁명사의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 권자를 허무는 데 기여.
또한
<<혁명의 교리문답>>에서 자코뱅 해석을 비판하는 것을 넘어 혁명사 연구의 새로운 길을 개척했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
18 장클레망 마르탱의 프랑스혁명 구하기
장클레망 마르탱(1948~)은 프랑수아 퓌레가 ‘정치’를 사건의 중요 설명 요인으로 설정함으로써 혁명사 연구를 혁신했다고 인정하면서도 공포정치가
1789년 혁명과 동시에 배태되어 있었다는 그의 지론과 방데 전쟁에 대한 해석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주장.
마르탱이 자코뱅 프랑스혁명사 해석을 지키기 위해 사용한 첫 번째 전략은 폭력의 ‘평범성’을 강조하는 것.
프랑스혁명이 더 폭력적이긴 했지만 폭력이 프랑스혁명에서만 자행된 것이 아님.
주르당은 프랑스혁명이 다른 혁명들보다 오히려 덜 폭력적이었다고 주장.
마르탱은 반혁명에 대한 폭력의 불가피성도 강조.
방데 학살에 대해 마르탱은 세부 사실에 대해서는 냉정한 판단을 내리면서도 이에 대해 “제노사이드 혹은 ‘민중학살’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
공포정치에 대한 마르탱의 입장은 ‘공포’는 인정하되 ‘공포정치’는 부정하는 것.
즉, 공포는 있었어도 정부 차원의 체계적이고 법적인 공포,
즉 ‘공포정치’는 없었다는 것.
1794년 목월
22일의 법은 처벌자를 줄이고 공포정치를 완화시키려는 의도로 제정되었다고 판단,
그러나 실제로는 이 법의 시행 이후 처형자가 오히려 급증.
마르탱은 반대파들이 법의 본래 취지를 왜곡하여 처형을 양산하고 그 책임을 로베스피에르에게 돌리고자했다고 주장.
마르탱은 로베스피에르의 권력 집중을 두려워한 과격 공포정치가들이 목월의 법을 악용하여 죽음을 양산함으로써 로베스피에르를 독재자,
공포정치가로 만들었을 뿐 만 아니라 ‘열월 정변’을 일으켜 로베스피에르를 제거한 후 “공포정치”라는 말을 ‘만들어내어’
모든 책임을 로베스피에르에게 전가했다고 주장.
장클레망 마르탱의 ‘프랑스혁명 구하기’
전략은 로베스피에르를 위한 변명으로 귀착.
맺음말
자유와 평등의 혁명
1789년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서 자유는 자연권의 지위를 인정받은 반면,
평등은 그러지 못함.
제헌의회 의원들이 지향한 혁명은 자유의 혁명.
1793년 6월 2일 파리 민중의 지원을 받아 권력을 장악한 산악파는 민중의 요구에 맞게 자유와 평등의 관계를 재조정.
1794년 ‘열월 정변’으로 로베스피에르가 몰락하면서 덕의 공화국도 폐기.
1795년 제정된 열월파 국민공회 헌법으로 혁명이 본래의 부르주아 혁명으로 복귀.
1799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쿠데타를 일으켜 총재정부를 붕괴시킨 후 “혁명은 끝났다”고 선언,
1804년에는 황제정으로 복귀.
1804년 헌법에는 ‘인권선언’이 사라짐.
10년 후인
1814년에는 부르봉 왕조가 복귀함으로써
1789년 이전 체제로 돌아감.
이념적으로, 자유와 평등은 양립하기 어려운 가치,
자유는 기본적으로 자유경쟁을 보장하는 강자의 이념이기 때문.
자유를 보장할수록 불평등이 심해지고,
평등을 확대하면 자유가 위축,
이는 프랑스혁명 과정에서도 잘 나타남.
형제애
형제애와 박애는 비슷한 뜻을 지니면서도 정반대의 뜻을 지니기도 함.
박애는 ‘적’도 사랑하는 ‘휴머니즘’의 단어인 반면,
형제애는 형제만 사랑하고 적에게는 ‘죽음’을 내리는 전투 구호로 사용될 수도 있기 때문.
프라테르니테를 ‘박애’로 번역한 것은 프랑스혁명에 대한 예찬의 소산이지만 이렇게 확대해석할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님.
여자들의 이혼권,
유대인 시민권 부여,
노예 해방을 통해서 살펴볼 때,
프랑스혁명의 ‘휴머니즘’은 브리소,
콩도르세와 같은 지롱드파 혁명가들에 의해 고양됨.
로베스피에르가 이끈 산악파는 휴머니즘의 보편적인 대의보다는 외전과 내전으로부터 국가를 구한다는 이유로 ‘애국’을 강요할 뿐.
프랑스혁명의 희생자
프랑스혁명은 장기적으로 자유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데 기여,
그러나 단기적으로는 공포정치로 상징되는 파괴의 고통이 컸음.
혁명의 교훈
희생자가 많이 발생한 이유는 무엇일까?
혁명을 했기 때문.
프랑스혁명의 비극에 계몽사상의 책임이 있는가?
영향을 부정할 수 없지만,
프랑스혁명과 계몽사상을 하나의 ‘블록’으로 보지는 말아야 함.
공포정치에 영향을 준 것은 계몽사상이라기보다 루소주의.
민중이 계몽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진행된 혁명은 엄청난 부작용을 낳는다는 것을 프랑스혁명은 잔인하게 보여줌.
혁명은 미래를 위해 희망의 이념을 제시했지만 현실에서는 엄청난 희생자를 발생시켰음.
프랑스혁명의 실상은 혁명을 이상적인 사회 변혁의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이상주의자들에게 경종을 울림.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