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13일 월요일
타인의 얼굴: 레비나스의 철학 (강영안, 문학과 지성사, 2005) 중 4장 향유, 거주, 얼굴: [전체성과 무한]을 통해 본 레비나스의 중기 철학
1961년 출판한 그의 대표작 [전체성과 무한]에서… ‘분리’를 중요한 개념으로 설정한다. 자기 스스로 섬, 곧 자기 정립은 자신을 타인과 사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고 자신이 설 수 있는 자리를 ‘세계 속에서’ 점유하는 것을 뜻한다. “인간 자신이 곧 존재론”이란 말은 이 점을 드러낸다… 존재자를 인식하고, 파학하며, 소유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가 레비나스가 말하는 ‘존재론’이다.
거주와 노동에는 사물을 전체화하고 소유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나(동일자)의 범주와 도식으로 환원하는 이론과 활동(과학, 과학기술, 노동, 문화)을 레비나스는 ‘존재론’이라 부르고 있다. 존재론은 전체성의 이념과 자기 실현의 이념, 이 두 축 위에 서 있다.
존재론은 그러므로 단순히 거부 대상이 될 수 없다. “인간 자신이 곧 존재론”이라면 존재론을 단순히 거부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뿐더러 의미도 없다… [전체성과 무한]이 무한자의 이념을 바탕으로 한 ‘주체성의 변호’라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레비나스가 변호하는 주체의 주체성은 앞에서도 강조했듯이 ‘타인을 영접하고 손님으로 받아들이는 행위’에서 성립한다. 타인을 영접하고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레비나스가 말하는 ‘초월’이다. 사물을 인식하고, 노동하고, 미래에 대해 불안을 갖는 것은 부차적이고, 타인을 영접하고 손님으로 대접하는 것이 주체의 주체성을 성립하는 일차적 조건이다.
타인과의 거리는 타자가 타자로서 나에게 환원될 수 없는 ‘외재성’을 갖듯이 바깥과 구별되는 ‘내면성’이 나에게 있을 때 성립한다. ‘내면성’과 ‘외재성,’ 나와 타인, ‘동일자’와 ‘타자’ 사이에 거리가 형성되는 것을 레비나스는 ‘분리’라고 부른다. 내가 나로서 독립성을 가짐은 다른 것과 분리된 고유의 내면성을 가짐을 뜻한다. 세계 안에서의 인간의 존재 방식은 하이데거가 그리는 것처럼 ‘이미 자기 밖에 나와 있는 존재’가 아니다.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안이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 내면성이 없는 곳에는 밖으로 향한 초월이 없다. 초월은 언제나 ‘동일자와 타자의 분리’를 전제한다. 분리가 없이는 초월이 없다. 그러므로 초월 운동은 ‘자기 복귀’를 전제한다. 자기 복귀, 내면성의 형성, 또는 자아의 자기성의 확립을 레비나스는 ‘향유’와 ‘거주’의 행위로 본다. 향유와 거주는 ‘인간이 곧 존재론’이란 사실을 해명할 뿐 아니라 동일자와 타자, 내면성과 외재성의 분리에 구체적인 내용을 채워준다.
1. 삶에 대한 사랑과 향유
음식, 공기, 햇볕, 빛, 잠, 심지어는 생각, 이와 같은 것은 ‘표상의 대상’(후설)이나 삶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 또는 ‘도구’(하이데거)가 아니라는 사실을 레비나스는 강조한다. 음식을 먹고, 맑은 공기를 마시고, 좋은 음악을 듣고, 대화를 나누고, 일을 즐기는 것은 삶의 과정이고 삶의 내용이다.
삶을 채워주는 내용과의 관계를 즐김과 누림, 곧 향유jouisance로 보는 데는 하이데거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삶에 대한 염려와 불안은 하이데거에 따르면 세계 안에서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이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염려와 불안보다 즐김과 누림, 곧 향유가 세계와의 일차적인 관계라고 본다.
‘~으로 삶을 산다’는 것은 표상과 반성, 이론과 지식이 있기에 앞서 즐김이요 누림이다. 삶은 결코 벌거숭이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내용이 있는 삶이고 내용을 즐기는 삶이다. 이것을 레비나스는 ‘삶에 대한 사랑’또는 ‘자기애’라 표현한다. 삶은 본질적으로 삶에 대한 사랑이며 자기애이다.
2. 요소 세계
레비나스에 따르면 우리는 사물을 그 자체 고립된 것으로 체험하기보다는 무엇이라 분명히 규정할 수 없이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계로 체험한다. 세계는 원래 사물들의 총체이기보다는 삶의 ‘요소element’이다… 요소로서의 세계는 무규정성을 특징으로 한다. 세계는 쉽게 대상화할 수 없을뿐더러 손쉽게 다룰 수 있는 도구로도 환원할 수 없다.
요소에는 내용은 있지만 그것을 담을 형식이 없다. 이것을 일컬어 레비나스는 ‘형식없는 내용’이라 부른다. 요소는 얼굴도 없고 이름도 없다. 그러므로 요소에 대해서는 주체와 대상 관계를 형성할 수 없다. 요소에 에워싸임으로써만 우리는 요소와 관계할 수 있다…. 따라서 요소는 이름을 가진 하나의 특정한 실체로 접근할 수 없다. 이런 뜻에서 레비나스는 요소를 ‘실체 없는 성질’이요 ‘떠받침 없는 성질’이라고 규정한다.
요소 세계는 사람이 사는 삶의 환경milieu이다. 세계, 요소, 환경은 여기서 동의어로 쓰인다… 물, 공기, 따뜻함, 이와 같은 것들은 사물로 환원할 수 없다.
삶의 세계가 우리에게 ‘요소’라면 향유의 차원에서 만나는 사물들의 존재를 질서 정연한 목적성의 체계에 따라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요소로서의 세계는 소유로서의 세계에 선행한다.
3. 향유와 주체의 주체성
향유를 사람이 세계와 가지는 일차적 관계로 보고 세계를 사물의 체계가 되기 이전의 ‘요소적’ 세계로 보는 것은 주체의 주체성을 새롭게 규정하기 위한 것이다. 요소적 세계와의 향유적 관계를 통해 레비나스는 주체의 근원적 존재 방식을 드러내보고자 한 것이다.
1. 주체의 주체성은 향유에 기원을 둔다… 주체성의 기원인 이 향유는 순수 의존성도 순수 독립성도 아니다. 향유는 ‘의존성을 통한 독립성’이다… 주체는 의존성을 독립성으로 바꾸고 세계를 자신의 세계로 만들어간다… 향유의 주체는 의존성 가운데서 독립해 있다. 주체는 다른 것과 분리돼 있다. 분리는 주체를 다른 주체와 구별하는 근거이다. 그런데 분리는 자동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향유를 통해 발생한다… 이것이 좀더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사건은 자아를 통한 ‘전체화’이다. 향유 가운데 자아는 자신을 에워싼 세계를 자신의 세계로 변형시키기 시작한다… 향유는 나 자신이 나 자신으로 실현하는 과정이고 이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하나의 개별적 인격으로 등장한다.
2. 주체의 내면성과 유일성은 향유를 통해 구성된다. 나와 타인, 동일자와 타자는 향유를 통해 주체의 내면성이 형성될 때 그 때 비로소 실제로 분리된다… 향유를 통해 내면성이 형성되고 내면성을 통해 ‘자신’과 ‘자신 아닌 것’ 사이의 분리가 출현한다. 따라서 향유를 통해 자아가 비로소 출현한다고 레비나스는 보고 있다… 향유는 ‘자신 안으로 물러남’이고 자신으로의 귀환이다. 향유는 자아의 자기성을 형성한다… 향유를 통한 자아의 자기성을 바탕으로 해서 이제 누구와도 맞바꿀 수 없는 자아의 유일성이 성립된다. 에펠탑이나 모나리자처럼 이와 비슷한 유의 견본이 오직 하나 있다는 데 자아의 유일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자아의 유일성은 어떤 유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 어떤 개념으로도 담을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고 레비나스는 생각한다. 보편과 개별의 구별을 뛰어넘어 향유하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에 자아의 유일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개체와 개체를 구별해주는 개별성의 원리는 질료가 다르거나(아리스토텔레스) 다른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라이프니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누리는 향유와 행복에 있다. 레비나스는 향유야말로 진정한 ‘개별화의 원리’라고 주장한다.
3. 향유와 행복이 ‘개별화의 원리’이며 향유를 통해 각 주체의 주체성이 성립된다는 사실은 각 인격에는 어떤 무엇으로도 환원할 수 없고 소외시킬 수 없는 고유성과 존엄성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내가 존재의 주체가 되는 것은 단지 내가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있는 것도 아니고 존재의 짐을 스스로 짊어진다는 사실에 있는 것도 아니라 내면성의 확보를 통해, 즉 향유를 통해 단순한 존재를 초월한다는 사실에 있다. 이와 같은 존재 초월이 가능한 존재가 ‘인간’이다… 개인은 저마다 향유의 주체로서 신비를 지니고 있다. 개인은 종족으로, 혈통으로, 또는 사회 집단으로 또는 누구와의 관계로 환원될 수 없다. 이것은, 나의 나됨(자기성)과 타인의 타자성은 결코 상대화할 수 없는 절대적 성격을 띠고 있음을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인격은 철저하게 다원적이다. 인격은 어떤 명목으로도 전체화할 수 없다는 것이 레비나스 철학의 기본 신조이다.
4. 요소 세계의 무규정성과 내일에 대한 불안
요소 세계에서 맛보는 즐거움은 그러나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만족감을 맛보는 순간, 내일에 대한 불안이 고개를 내민다. 요소 세계 속에 사는 동안 세계는 나에게 무규정성으로, 아무것도 아닌 그 무엇으로, 내가 어쩔 수 없는 대상으로 체험된다.
요소는 현재, 지금 이 순간 나의 향유 속에 현존할 뿐이다. 요소는 나를 떠받치는 기반이고 그것의 익명성, 무규정성으로 인해 나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힘으로 남아 있다. 그것은 마치 얼굴 없는 신처럼 말을 건넬 수도 없고 호소할 수도 없다. 요소의 이와 같은 부정적인 측면을 레비나스는 ‘있음il y a,’ 즉 ‘존재자 없는 존재’라고 부른다.
향유 안에서의 주체의 취약성은 요소로부터 오는 위협 때문만은 아니다. 향유 자체에 주체의 존재를 위협하는 요소가 들어 있다… 향유의 주체는 무엇을 누릴 때 자시이 아닌 다른 것, 즉 타자에 늘 의존해 있다. 주체는 향유의 내용에 대해 절대적 주권을 행사하지 못한다.
향유 속에 자아가 누리는 자유는 그러므로 절대 자유가 아니라 한계 있는 자유라고 레비나스는 보고 있다. 자유의 한계성은 스스로 자신의 출생을 선택할 수 없었다거나 이미 어떤 상황에 처해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한계성이 아니라, 현재 순간의 향유가 향유의 내용이 되어주는 요소 세계의 익명성을 통제할 수 있는 어떠한 수단도 보장해 줄 수 없다는 데서 오는 한계이다.
요소의 위협은 인간에게 두 가지 반응을 일으킨다… 첫번째 반응은 신화적 반응이다. 요소의 무규정적인 불확실성은 신화적 신앙이 뿌리내릴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한다… 거주와 노동은 요소의 위협에 대해서 인간이 보이는 두번째 반응이다. 집을 짓고 거주하며, 노동하는 것은 인간의 자기 긍정, 자기 자신의 독립성을 실현하는 일이다.
5. ‘여성적인 것’과 집과 거주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것, 자기를 환경과 분리하여 자기성을 확립하는 일은 집을 짓는 일 가운데 구체화된다. 레비나스는 [존재에서 존재자로]에서 잠과 휴식을 자기에게로 되돌아오는 과정으로 묘사하지만, [전체성과 무한]에서는 집을 짓고 그 안에서 거주하는 것을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레비나스는 순수의식의 관념론적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주체는 언제나 육화된 주체이다. 주체는 신체로서 거주할 때 비로소 주체로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주체의 내면성은 하나의 신체로서 주체가 언제나 또다시 자신에게 복귀한다는 사실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주체는 집을 통해 거주 주체로서 자신을 세울 때 세계를 관찰하고 세계를 자신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이와 같은 관점은, 사유를 통해 주체의 존재를 근거짓고자 한 관념론과 대립된다… 거주 공간으로서의 집으로의 복귀는 ‘친밀성’으로 묘사된다.
친밀성은 어떠게 가능한가? 그것은 타인의 등장으로 가능하다. 하지만 이 때 타인은 벌거벗은 얼굴로 나를 질책하고 불의를 고발하는 타인의 모습보다는 ‘다소곳이’ 나를 수용하는 타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다소곳이 나를 수용하는 타인을 일컬어 레비나스는 ‘여자’라고 부른다. “여자는 내면으로의 전향, 집과 거주의 내면성의 조건”이다. 레비나스는 부버의 ‘너와 나’의 관계에서 ‘너’는 거주 공간 안에서 관계하는 타인, 곧 여성적 타자임을 강조한다… 여성적 타자의 존재는 거친 현실 속에 말할 수 없는 ‘연약성’과 ‘부드러움’을 심어놓는다.
여성적 타자는 누구인가? 레비나스가 말하는 여자는 현실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여자’일 필요가 없다. 대부분의 경우, 레비나스는 조금 중립적인 뜨스로 ‘여성적인 것’이란 말을 더 많이 사용한다. ‘다소곳한 타자’는 ‘향유’ ‘거주’ ‘신체성’ 등과 같이 하나의 철학적 표현법일 뿐이다. ‘다소곳한 타자’는, 만일 여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남자일 수 있다. 이것은 내면으로의 전향과 거주를 가능케 하는 타자의 친밀성, 나를 그의 손님으로 수용하는 타자의 너그러운 환대를 표현하는 것일 뿐이다.
6. 노동과 소유
레비나스의 서술에 따르면 주체의 성립과 자기 주장은 거주로 끝나지 않는다. 노동과 소유가 거주에 뒤따른다… 노동과 소유는 거주와 반대로 세계를 정복하고 지배하는 방식이다. 레비나스는 노동을 향유와 대비시킨다. 향유의 경우 주체는 대상을 소유하지 않는다. 향유의 대상은 언제나 무규정적인 요소로 남아 있고 요소 세계는 여전히 주체를 위협한다. 하지만 집을 짓고 그 안에 거주하고 노동함으로써 주체는 요소 세계를 마치 하나의 ‘사물’처럼 소유한다.
노동을 통한 소유를 레비나스는 ‘손’에 대한 분석을 통해 보여준다… 요소 세계의 익명성과 무규정성은 노동을 통해 해체되고 요소 세계는 하나의 사물로서 분명한 의미와 기능을 갖게 된다. 손은 이렇게 노동을 통해 요소 세계의 위협을 차단하고 미래를 예측, 통제한다. 주체가 노동의 결과로서 사물을 소유할 때 요소 세계는 지속성을 가진 사물, 곧 ‘실체’의 세계로 전환한다.
노동과 소유,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거주는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 이것은 해방을 뜻한다… 노동과 소유를 통해 주체는 ‘참여’로 특징지어지는 신화적 세계를 벗어나 자신을 타자로부터 ‘분리’하고 이를 통해 고유한 주체로서 자유를 획득한다. 이러한 자유는 언제나 자기 중심적이다. 노동과 소유는 그 자체로 자기 중심적이다. 타자로 향한 초월이나 타자에 대한 환대가 이 자체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노동과 소유,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해주는 거주가 지닌 두번째 측면이다. 노동과 소유는 모든 것을 자아 속에서 전체화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곧 존재론’이라고 할 때 레비나스가 강조하고자 한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노동과 소유뿐만 아니라 인간의 지식(과학, 기술)도 전체화의 수단이다… 자아는 세계를 대상화하고 세계를 이론적으로 파악하고자 시도한다.
이러한 일련의 행위가 겨냥하는 것은 세계를 파악하고 이해하고 결국 자신의 소유로 지배하기 위한 것이다. 개념화는 손에 거머쥠을 뜻한다. 세계를 거머쥠으로써 자아는 세계를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개념화의 결과인 과학과 그것의 실제적인 적용인 과학 기술은 세계 안에서 자아의 존재 실현을 위한 수단으로 등장한다. 과학과 기술은 자아에게 새로운 힘과 능력을 부여한다. “동일자를 통한 타자의 규정”인 과학과 기술은 중립적이 아니라 하나의 권력 행사라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모든 종류의 권력 행사를 부인하지 않는다. “인간 자체가 존재론”이란 말에는 권력에 대한 인정이 담겨 있다. 지식을 통한 권력 행사는 요소 세계 안에서 인간의 존재 유지 노력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불가피한 것이다.
[전체성과 무한] 제2부에서 레비나스가 펼치고 있는 존재경제론은 후설과 하이데거 철학에 대한 반성을 담고 있다. 레비나스는 후설의 지향성 개념을 수용하면서도 표상하는 행위를 출발점으로 삼지 않고 표상적 지향성에 선행하는 향유와 거주를 더욱더 근원적인지향성으로 이해한다. 표상적 지향성은 레비나스에 따르면 향유와 거주의 지향성을 통해 근거지어진다… 인간 주체성은 의식에 선행하는 신체성을 통해 성립한다는 사실을 레비나스는 강조한다.
향유와 거주에 대한 레비나스의 묘사는 하이데거에 대한 반론도 담고 있다. 삶이란 일차적으로 염려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삶은 레비나스에 따르면 근심과 걱정, ‘존재해야 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즐김과 누림, 곧 향유하는 데 있다. 삶의 내용은 그 자체가 목적일 뿐 도구 전체성 속의 한 부분으로 자리하지 않는다… 삶은 곧 향유라는 것은 또한 초월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내면성의 성립이 선행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것은 하이데거가 인간을 세계 안에 이미 던져진 존재로 볼 때 뜻했던 것과 다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 존재 자체가 이미 초월이다. 인간은 이미 자기 밖에 있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초월이 가능한 근거로서 내면으로의 복귀를 논의한다. 내면성의 성립, 곧 요소 세계와의 ‘분리’와 타자와의 ‘분리’가 없이 어떻게 초월이 가능하겠느냐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동일성의 영역 안에, 동일성을 가능하게 해주는 근거로서 언제나 ‘타자’의 존재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했다. 노동의 가능 조건으로 본 거주의 경우 ‘여성적 타자’의 존재가 고려되었다… 노동의 가능 조건으로서 ‘타자의 현존’을 레비나스는 ‘대화’와 관련시켜 보고 있다… 동일자의 영역, 또는 전체성의 영역으로 환원할 수 없는 ‘무한(무한자, 무한성)’의 차원을 보여주자는 것이 레비나스 철학이 겨냥한 목적이다.
7. 얼굴의 현현
타인의 존재는 나에게 무엇인가? 레비나스는 타자를 나의 동료 이상으로 본다. 타자는 무한자의 계시이고 전혀 새로운 형이상학적 차원을 열어준다… 타자의 얼굴은 우리 ‘밖에서’ 우리의 유한성의 테두리를 깨뜨리고 우리의 삶에 개입한다.
얼굴의 현상은 레비나스에게서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얼굴의 만남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사물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을 열어준다.
얼굴이 자기 스스로 내보이는 방식을 레비나스는 ‘계시’라 부른다. 계시라는 종교적 용어를 쓴 까닭은 얼굴의 현현은 내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타나는 절대적 경험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사태를 일컬어 ‘맥락없는 의미화의 가능성’이라 부른다. 얼굴의 현현은 역사적, 사회학적, 문화적 또는 심리학적 지시 체계로 환원될 수 없는 고유한 의미를 지닌다. 얼굴의 자기 표현으로부터 “의미화는 의미 부여에 선행한다”는 레비나스의 중요한 논제가 나온다.
타자의 얼굴에서 오는 힘은 상처바을 가능성, 무저항성에 근거해 있다. 얼굴이 상처받을 수 있고 외부적인 힘에 대해 저항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바로 이 때문에 얼굴로부터 도덕적 호소력이 나온다… 타자의 곤궁과 궁핑은 하나의 명령으로 나에게 다가온다. 나는 얼굴의 호소를 거절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곧 불의를 자행하는 일이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우리의 행위가 갖는 의미는 타자의 윤리적 호소를 통해 규정된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무저항은 나의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연약성과는 다른 개념이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얼굴은 동정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정의로워야 한다는 요구를 하는 것이다.
타자의 얼굴의 현현은 하나의 모순에 직면하게 만든다. 얼굴은 타자의 무력함과 주인됨을 동시에 계시하기 때문이다. 가장 낮은 것은 가장 높은 것과 결합한다.
얼굴의 현현을 통해 나의 자발성에 제동이 가해진다. 타자의 곤궁과 무력함에 부딪힐 때 나는 내 자신이 죄인임을, 부당하게 나의 소유와 부와 권리를 향유한 사람임을 인식한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죄책의 경험은 나의 자유가 자의적이고 내 자신의 욕구에 기인한다는 의식에서 유래한다. 진정한 죄책 경험은 타자에 대한 ‘욕망desir’에서 비롯된다.
레비나스는 죄책과 실패를 구별하듯이 욕망과 욕구besoin를 구별한다. 욕구는 나에게 결핍된 것을 채우려는 동기에서 우러나오지만 욕망은 “우리가 태어나지 않은 땅에 대한 동경” “눈에 보이지 않는 자”에 대한 그리움에서 생겨난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는 부버가 말하는 ‘너’와 구별된다. 타자는 나와 너의 친밀한 관계 속에 용해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는 나에게 거리를 두고 있고 나에게 낯선 이로, 나의 삶에 완전히 포섭될 수 없는 자로 남아 있다. 각자는 타자에게 ‘낯선 이’다… 타자는 나에 대해서 완전한 초월과 외재성이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는 내가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무한성이다. 이 무한성은 그러나 익명성은 아니다… 타자의 얼굴을 받아들임으로써 나는 인간의 보편적 결속과 평등의 차원에 들어간다.
타자를 처음부터 나와 동등한 자로 생각할 때 타자는 나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뿐더러 나와 마찬가지로 자기 실현을 추구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레바나스는 타자와의 비대칭성, 불균등성이 인간들 사이의 진정한 평등을 이룰 수 있는 기초이고 이런 의미의 평등만이 약자를 착취하는 강자의 법을 폐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타자를 내 집으로 받아들이는 것, 즉 그를 내 손님으로 환대하는 가운데 구체적인 윤리성이 시작되며 내 자신은 내면성, 내재성의 세계를 벗어나 진정한 초월의 주체, 도덕적 주체가 될 수 있다.
8. 인간 존재와 죽음
죽음은 인간 존재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레비나스는 죽음을 무엇보다도 밖으로부터 오는 폭력과의 만남으로 이해한다. 죽음은 우리의 자유를 제거한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으로 향한 존재’로 본다. 하지만 죽음 자체를 인간은 사실로서 경험할 수 없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다만 그 가능성 뿐이다. 이 가능성은 불가능성의 가능성이요, 무의 가능성이다… 존재는 더 이상 확실성이 아니라 내가 내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개척하고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일 뿐이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하이데거와 달리 죽음을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로 보지 않을뿐더러 무의 가능성으로도 보지 않는다… 고통 속에서 느끼는 죽음은 불가능성의 가능성이 아니라 모든 가능성의 불가능성이다.
죽음은 자유의 기초가 아니라 인간의 무력, 그의 부자유의 경험이다. 죽음에 대항해서 인간은 그가 가진 주도권을 모두 상실한다. 따라서 죽음은 본질적으로 알 수 없는 신비요, 절대적 타자성으로부터 나를 지배하는 미래이다. 만일 죽음이 나의 존재에, 나의 자기 실현에 종언을 고한다고 할 때 나의 존재는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가? 레비나스의 대답은 타자를 위한 나의 존재 가운데서 죽음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그로 인해 나의 존재가 무의미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타자는 그의 초월성(외재성) 때문에 마치 죽음처럼 나의 자유를 위협하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그의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과 무력성 때문에 나에게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존재이다.
내가 타자를 선대하고 보살필 때 힘없는 타자를 내가 죽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타자에 대한 사랑이 생기고 죽음에 대한 불안이 사라진다… 나의 유한한 존재, 죽음으로 향한 나의 존재는 ‘타자를 위한 존재’로 바뀌고 이것을 통해 죽음의 무의미성과 비극성은 상실된다… 자기 중심적 존재 의미 부여에서 필연적으로 야기되는 죽음에 대한 불안은 타자를 위한 선행을 통하여 사라지고 만다.
9. 죽음 저편: 에로스와 출산성
출산성은 남자와 여자의 성관계를 통한 수태 가능성을 말한다. 출산성을 통해 시간은 무한성의 차원, 절대적 미래, 폭력과 죽음에 맞서는 무한한 잉여의 차원을 얻을 수 있다. 레비나스에게서 사랑은 언어와 더불어 타자와 관계할 수 있는 방식이다.
사랑, 곧 에로스는 여성적인 것의 출현과 더불어 시작한다… 이론적인 인식을 통해 접근할 수 없는 타자성의 특성을 여성적인 것은 지닌다. 레비나스는 이 타자성을 여성적인 것의 본질로 본다.
레비나스는 성애를 남성적인 체험과 관점에서 서술한다.
감추어진 것, 타자적인 것을 찾는 여행은 아이의 출산으로 실현된다… 아이는 ‘타자가 된 나’이다. 나는 아버지가 됨을 통해 나의 이기주의, 나에게로의 영원한 회귀에서 해방된다. 아이와의 관계를 일컬어 레비나스는 ‘출산성’이라 부른다. 출산성 안에서 이제 인간은 자신의 한계에서 해방된다… 에로스는 나에게 그리고 동일자의 영역 바깥에 감추어진 미래를 찾는다. 내가 거머잡을 수 없는 이 미래는 아이와의 관계를 통해 구체적으로 체험한다. 아이를 통해 과거는 그 결정적인 성격을 상실한다… 아이를 통해 열리는 미래의 시간은 과거의 짐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이 가능할 수 있도록 나에게 일종의 용서를 베푼다. 따라서 과거에 가능하도록 주어진 것을 새롭게 시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다시 얻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이렇게 말한다. “아이와의 관계, 다시 말해, 힘으로서가 아니라 출산성으로서의 타자와의 관계로 인해 우리는 절대적 미래 또는 무한한 시간과 관계를 맺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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