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홀로 있는 주체를 다루었다. 그가 존재자라는 사실,
오직 이 사실로 인해 주체는 홀로 있다. 주체의 고독은 그가 주인이 된 <존재한다>는 사실과의 관계에서 생겨난다.
이어서 우리는 존재자 안에서 일어나는 익명적 존재로부터의 해방이 자기에게 매임, 다시 말해 자기 확인의 매임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주체의 고독은 본래 아무런 도움이 없다는 사실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일종의 먹이로 내던져져 있으며,
자기 자신에게 걸려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물질성이다… 세계는 주체에게 향유의 형식으로 존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 주며 결과적으로는 자기에 대해 거리를 두고 존재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노동
하지만 공간을 통한 이 순간적인 초월도 고독의 탈피를 가져오지 못한다.
욕구의 구체성 속에서는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서 떼어 놓은 공간이 언제나 정복되어야 한다.
이 공간을 뛰어넘고 객체를 장악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손으로 노동해야 한다.
그렇지만 결국 노동에서,
즉 그의 노력, 아픔과 괴로움을 통해 주체는 한 존재자의 자유 속에 함축되어 있는 존재의 무게를 다시 발견한다.
고통과 죽음
아픔과 괴로움과 고통 속에서 우리는 고독의 비극을 형성하는 결정적 요소를 가장 순수한 모습으로 다시 보게 된다.
괴로움 속에는 어떠한 도피처도 없다… 고통이 그토록 뼈아픈 까닭은 그것을 회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고통은 무의 불가능성이다.
고통 그 자체에 완전히 묶여 있음을 그 본질로 하는 이 고통의 구조는 미지의 것에까지 연장될 수 있지만, 이것은 빛의 용어(개념)로는 도무지 옮길 수 없는 것이다…
죽음의 미지성은 죽음과의 관계가 빛을 통해서 맺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주체가 자신으로부터 유래하지 않는 것과 관계맺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주체가 신비와 관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이 고통을 통해,
모든 빛의 영역 밖에서, 자신을 예고하는 방식은 주체의 수동성의 경험이다…
지식에서는 모든 수동성이 빛의 매개를 통해서 능동성이 된다.
내가 만나는 대상은 파악되고, 간단히 말해서 나를 통해 구성된다. 그런데 죽음은 주체가 그 주인이 될 수 없는 사건,
그것과 관련해서 더 이상 주체가 아닌 그런 사건을 알려 준다.
죽음은 하이데거에게는 자유의 사건이다.
고통 속에서 주체는, 이와 반대로 가능한 것의 한계에 이른 것처럼 보인다.
주체는 자신이 묶여 있고, 압도되어 있고 어떤 방식에서는 수동적임을 발견한다.
죽음은 이러한 의미에서 관념론의 한계이다.
죽음과 미래
죽음이 어떠한 현재에도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은 죽음에 대한 우리의 도피에 기인하거나 용서받을 수 없는, 마지막 순간에 대한 건망증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은 손에 거머쥘 수 없으며 남성다운 힘과 주체의 영웅주의의 종말을 표시한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사건과 타자
죽음은 주체의 남성다운 힘의 한계가 된다…
죽음은 우리가 그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 즉 그에 대해 우리의 권력이 충분하지 못한 현실을 알려 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힘을 넘어서는 현실들은 이미 빛의 세계 안에서 스스로 나타낸다. 죽음의 접근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특정한 순간부터 할 수 있음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점이다.
바로 여기에서 주체는 주체로서 자신의 지배를 상실한다.
죽음, 그것은 계획을 세울 수 없음이다.
이러한 죽음의 접근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절대적으로 다른 것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다른 것이 짊어지고 있는 타자성은 향유를 통해 우리 자신의 것으로 동화시킬 수 있는 잠정적 규정으로서의 타자성이 아니라 그것의 존재 자체가 곧 타자성인 그런 의미의 타자성이다. 그러므로 나의 고독은 죽음을 통해 굳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통해 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는 다원주의적이다. 다원성 (복수성)은 여기서 존재자의 다수성이 아니라 바로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에서 나타난다… 나의 존재에 대한 타자의 영향력은 신비스럽다.
그것은 미지의 것이 아니라 인식될 수 없는 것이며,
어떠한 빛에 대해서도 저항적이다… 타자와의 관계는 우리에 대해 외재적이다. 타자와의 관계는 하나의 신비와의 관계이다. 그것은 그의 외재성이다.
아니면 그의 타자성이다.
타자와의 관계는, 빛을 서술하는 관계와는 뚜렷이 구별된 개념으로 특성을 그려야 한다.
에로스적 관계가 이에 대한 전형을 우리에게 제공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주체가 어떠한 가능성도 거머쥘 수 없는 죽음의 상황으로부터 타자와의 존재의 또 다른 특성을 끌어낼 수 잇다. 어떠한 방식으로도 손아귀에 쥘 수 없는 것은 미래이다. 미래의 외재성 (초월성)은, 미래가 절대적으로 예기치 않게 닥쳐온다는 사실로 인해서 공간적 외재성과는 전혀 다르다… 미래, 그것은 타자이다.
미래와의 관계,
그것은 타자와의 진정한 관계이다. 오로지 홀로 있는 주체에서 시간을 이야기한다는 것, 순수하게 개인적인 지속에 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타자와 타인
고통이 그토록 비장한 까닭은 존재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
존재 속에 걸려들었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라 죽음이 그것으로부터의 초월을 예고하는 빛과의 관계를 떠난다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상황은 주체가 그 사건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그것에 대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지만 그러면서도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은 타인과의 관계이며 타자와 얼굴과 얼굴을 마주 한 관계이며, 타인을 보여 주면서 동시에 빼앗는 얼굴과의 만남이다. <받아들인> 타자, 그것은 타인이다.
시간과 타인
미래와의 관계, 즉 현재 속에서의 미래의 현존은 타자와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 상황에서 비로소 실현되는 것처럼 보인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 상황은 진정한 시간의 실현이다. 미래로 향한 현재의 침식은 홀로 있는 주체의 일이 아니라 상호주관적인 관계이다.
시간의 조건은 인간들 사이의 관계 속에 그리고 역사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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