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레비나스 철학의 배경
레비나스 사상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책은 히브리 전통의 성경과 탈무드, 어릴 때부터 읽었던 러시아 문학, 그리고 후설과 하이데거의 책이었다.
레비나스는 후설로부터 자신의 철학을 펼칠 수 있는 방법을 배웠다.
현상학은 삶의 잊혀진 경험을 드러내고 그 의미를 성찰하는 작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삶을 지탱해주고 있는 타자 및 그 타자에 대한 책임을 보여주는 작업으로 이해되었다.
레비나스를 강하게 이끈 것은 1927년에 출판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었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하이데거 사상으로부터 곧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그 뒤로 레비나스는 결코 포기하지 않고 하이데거 철학과 끊임없이 대결하게 된다.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의 관계…
자아와 타자 문제를 철학의 중심 주제로 삼는 계기가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추측은 아닐 것이다.
레비나스는 1935년 프란츠 로젠츠바이크의 [구원의 별]을 깊이 공부한다. [전체성과 무한]에서 레비나스는 전체성의 이념에 대항하는 로젠츠바이크의 사상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 많을 정도로 그 영향이 자신의 저작에 깊이 퍼져 있다고 토로한다.
3. 레비나스 철학의 프로그램:
‘주체성의 변호’
레비나스는 유럽의 전체주의는 유럽 철학 자체가 빚어낸 파국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레비나스는 “전쟁 가운데 스스로내미는 존재의 얼굴은 서양 철학을 지배하는 전체성이라는 개념 속에 고착되어 있다”고 말한다. 전쟁의 폭력과 서양 철학은 다 같이 전체주의적이다. 둘 다 인간의 인격을 하나의 체계에 종속시킨다는 것이다.
전체 체계 속에 들어맞지 않는 부분은 어떤 권리도 누리지 못하고 결국에는 제거된다. 전쟁의 폭력은 미리 설정한 전체 속에 맞지 않는 부분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폭력은 근원적으로 인간의 절대적,
인격적 가치를 부인하고 전체성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철학으로부터 흘러나온다…
레비나스는 인간을 전체의 한 부분으로 보는 전체주의적 철학에 대하여 인간의 존엄성과 책임의 이름으로 대항한다.
전체주의 속에서는 한 개체의 고유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레비나스는, 서양 철학은 대체로 질적 다양성 또는 다원성을 수적 다양성으로 대치하고 이것을 또다시 일원성 또는 단일성으로 환원하는 철학이었다고 본다…
나와 다른 것, 나와 다른 이는 다름 자체로 인정받고 존경받기보다는 나의 세계로 환원되거나 아니면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제외된다.
다른 이의 존재를 인정하더라도 다른 이는 나와 나란히,
나와 함께 존재하는 존재자나 아니면 나를 감시하는 시선일 뿐 나의 존재 형성에는 무관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철학적 흐름에 대항해서 다른 이, 즉 타인의 존재과 인간 존재에 차지하고 있는 자리를 드러내 보이고자 한다.
레비나스는 ‘다른 이’,
즉 타인은 결코 ‘나’로 환원될 수 없는 사람임을 강조한다.
다른 이의 존재를 그토록 강조한 까닭은 주체의 주체성을 올바르게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그는 주체의 존재를 절대화한 근대 관념론 전통에 대해서 비파적이었지만 ‘주체의 죽음’
또는 ‘인간의 죽음’을 운위한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레비나스는 전체 속에 귀속될 수 없는,
이른바 ‘무한자’의 이념을 바탕으로 ‘주체성의 변호’를 시도한다.
레비나스 철학의 궁극적 지향점은 주체성을 다시 세우는 것이다. [정체성과 무한] 서두에서 그의 책은 “무한자의 이념에 바탕을 둔 주체성의 변호”이며 무한자의 이념에 근거한 주체성이란 타자를 받아들이는 주체성임을 밝히고 있다.
레비나스는 주체의 주체성,
즉 주체가 주체로서 자신의 모습을 갖출 수 있는 조건을 이론적 활동이나 기술적, 시런적 활동에서 찾기보다는 오히려 타인과의 윤리적 관계를 통해서 찾고자 한다. 주체가 주체로서 의미를 갖는 것은 지식 획득이나 기술적 역량에 달린 것이 아니라 타인을 수용하고 손님으로 환대하는 데 있다고 본다. 헐벗은 모습으로,
고통받는 모습으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의에 의해 짓밟힌 자의 모습으로 타인이 호소할 때 그를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책임지고, 그를 대신해서 짐을 지고, 사랑하고 섬기는 가운데 주체의 주체됨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향유의 존재로서의 나의 존재
레비나스는 자기성의 성립,
또는 개체성의 성립 없이는 타인의 영접과 타인에 대해 책임지는 윤리적 관계가 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자기성 또는 개체성은 먹고 마시고,
삶을 즐기는 가운데 발생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러한 존재 방식을 레비나스는 ‘향유’라고 부르고 향유,
즉 즐김과 누림을 통해 하나의 개체가 개체로서 자기성을 확보한다고 본다.
향유는 인간이 세계와 접촉하는 가장 근원적인 방식이다… 하지만 향유는 순간적인 것에 불과하다…
여기에 대한 반응이 거주와 노동이다.
타자의 존재와 윤리적 관계
레비나스는 인간의 욕망은 타자와의 열린 관계를 통해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레비나스의 철학적 사유는 타인의 존재가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밝히는 데 집중되어 있다… 그는 타자와의 관계를 “얼굴의 현현”을 통해 접근한다.
얼굴의 현현은 일상적으로 만나는 사물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 즉 참된 인간성의 차원을 열어 준다. 얼굴은 일종의 계시이다… 얼굴의 현현은 일종의 윤리적 호소이다.
얼굴은 나에게 명령하는 힘으로 다가온다.
이 힘은 강자의 힘이 아니라 상처받을 가능성, 무저항에서 오는 힘이다.
타인의 곤궁과 무력에 부딪힐 때 나는 내 자신이 죄인임을,
부당하게 나의 소유와 부와 권리를 향유한 사람임을 인식한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는 나와 너의 친밀한 관계 속에 용해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타자는 나에게 ‘낯선 이’로 남아 있다.
타자의 얼굴은 친밀성으로 환원할 수 없는 측면을 보여준다.
타자는 나에 대해서 완전한 초월과 외재성이다. 레비나스의 타자는 내가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무한성이다…
‘낯선 이’로서, ‘고아’와 ‘과부’로서의 타자의 얼굴은 보편적인 인간성을 열어주는 길이다…. 타자의 얼굴을 받아들임으로써 나는 인간의 보편적 결속과 평등의 차원에 들어간다.
윤리적 요구는 일반적인 생각에 따르면 동등한 관계를 전제한다. 레비나스는 그러나 진정한 윤리적 평등과 형제애는 인간 사이의 대칭적 관계를 통해 구축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타자는 나와 동등한 자가 아니다.
가난과 고통 속에서 있는 타자는 나의 주인이다…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비대칭성,
불균등성이 인간들 사이의 진정한 평등을 이룰 수 있는 기초이고, 이런 의미의 평등만이 약자를 착취하는 강자의 법을 폐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타인의 얼굴은 나의 자발적인 존재 확립과 무한한 자기 보존의 욕구에 도덕적 한계를 설정한다. 타인은 거주와 노동을 통해 이 세계에서 나와 내 가족의 안전을 추구하는 나의 이기심을 꾸짖고 윤리적 존재로서, 타인을 영접하고 환대하는 윤리적 주체로서 내 자신을 세우도록 요구한다.
타인은 나의 존재를 위협하는 침입자가 아니라 오히려 내면성의 닫힌 세계에서 밖으로의 초월을 가능케 해주는 존재이다… 자아는 그를 에워싸고 있는 세계로부터 자신을 분리할 뿐만 아니라 타자로부터도 자신을 분리함으로써 스스로 개별적인 자기성을 확립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주체성은 레비나스에 따르면 타인의 존재를 자기 안으로 받아들이고 타인과 윤리적 관계를 형성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윤리적 관계를 넘어서:
에로스의 의미
그러나 만일 죽음이 삶의 끝이라면 윤리적 관계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죽음에 대항해서 인간은 주도권을 상실한다.
그렇지만 죽음은 나에게 언제나 연기되어 있다. 나는 지금 당장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 죽음은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으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타자로 남아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죽음의 의미는 변경될 수 있다고 레비나스는 생각한다.
타자를 선대하고 보살필 때, 힘없는 타자를 내가 죽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타자에 대한 사랑이 생기게 되고 죽음에 대한 불안은 사라진다. 죽음에 대한 불안은 이기적인 자기 세계에 머물러 있을 때 일어나는 것이다. 타자에 대한 선한 행위를 통해 나는 나의 존재의 무게 중심을 나에게서 타자에게로,
타자의 미래로 옮겨놓게 된다. 나의 유한한 존재는 ‘타자를 위한 존재’로 바뀌고 죽음의 무의미성과 비극성은 상실된다. 죽음은 삶의 마지막 지평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의 존재 의미는 내 자신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 그의 미래에 있기 때문이다. 자기 중심적인 존재 의미 부여에서 필연적으로 야기되는 죽음에 대한 불안은 타자를 위한 선행을 통하여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타자가 죽는다면 나의 선행은 그의 죽음과 함께 끝나고, 타자로 향한 초월도 하나의 환상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닌가? 레비나스는 이러한 귀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타자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지닌 매우 중요한 측면인 출산성에서 찾아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출산성은 남자와 여자의 성 관계를 통한 아이의 수태 가능성을 뜻한다. 남녀간의 사랑이 여기에 등장한다. 사랑은 여성적인 것의 출현과 더불어 시작된다…
여성적인 것은 이론적인 인식을 통해 접근될 수 없는 타자성의 특성을 가진다.
이 타자성이 여성적인 것의 본질이다.
레비나스는 이 감추어진 것을 찾는 몸짓을 에로스라고 본다… ‘감추어진 것,’ 그것은 무엇인가? 놀랍게도 레비나스는 이 감추어진 것, 전적으로 타자적인 것의 발견은 아이의 출산을 통해서 실현된다고 본다…
아이는 “타자가 된 나”이다. 나는 아버지가 됨으로써 나의 이기주의,
나에게로의 영원한 회귀로부터 해방된다. 자아는 이제 타자와 타자의 미래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초월한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미래와의 관계를 ‘출산성’이라고 부른다.
4. 주체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규정
레비나스는 그 어떤 철학자보다 일상적 경험이 인간의 존재 질서에서 지닌 심대한 의미를 밝혀준다… 인간은 신체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타자와 윤리적, 사회적 관계를 맺는 정신적 존재이다.
레비나스는 적어도 두 가지 의미로 인간 주체성을 규정한다…. 인간은… ‘내부성 (내면성)’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레비나스는 향유를 개체의 ‘개별화의 원리’로 본다…
내면성으로서의 주체성은 세계를 소유하고 지배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무한히 확장하려는 욕망, 즉 전체화에 대한 욕망을 보여준다.
이런 의미의 주체성과 구별해서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윤리적 관계를 통해 얻어지는 주체성을 말한다.
여기서 타자는…
절대적 외재성으로 묘사된다.. 타자의 출현과 더불어 내가 타자를 영접하고 대접할 때 진정한 의미의 주체성,
즉 ‘환대로서의 주체성’이 성립된다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출현으로 향유의 주체성,
곧 ‘자기성’
또는 ‘내재성’이 상실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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