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스의 현상학적 서술에서 주체 출현을 드러내는 과정을 초기 철학을 중심으로 살펴 볼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익명적 존재에서 주체로, 다시 주체에서 타자로의 이행이 발생하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이 이행을 일컬어 레비나스는 ‘존재론적 모험’이라 부른다.
다른 말로 하자면 ‘초월’이다.
진정한 삶의 부재로부터 ‘형이상학적 욕망’이 발생하고, 인간의 삶과 철학은 진정한 삶을 향한 부단히 넘어감, 곧 초월임을 레비나스는 지적한다.
초월을 기술하기 위해 레비나스는 ‘전체성과 무한’
‘동일자 (자기)와 타자’
‘통일성과 다원성’
‘내재성과 외재성’
‘내재와 초월’
‘존재와 존재와 다른 것’ ‘존재론과 형이상학’ 등 일련의 대립된 낱말짝을 사용한다… 레비나스는 “형이상학은 존재론에 선행한다”는 논제를 내세운다. 파르메니데스부터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서양 철학은 ‘동일자에 의한 타자의 흡수’를 겨냥하는 ‘존재론’이었다고 보고 이것을 지양할 수 있는 ‘타자의 형이상학’이 존재론에 대해 우위성을 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레비나스는 전통적인 주체 개념을 철저히 해체한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누구보다 강하게 ‘주체성’을 변호한다.
이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스트들과 구별된다.
1. 존재론적 분리와 익명적 존재
레비나스의 존재론은 하이데거의 존재론, 특히 ‘존재’와 ‘존재자’의 구별을 뜻하는 ‘존재론적 차이’를 전제한다.
레비나스는 존재와 존재자의 구별은 하이데거 철학의 가장 심오한 요소이며 이 구별이 자신의 철학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의 존재 개념은 하이데거와 다르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존재는 빛이나 밝음보다는 무거움과 어두움으로 체험된다.
인간이 갖는 불안은 ‘무에 대한 불안’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불안’이다… 존재는 그것이 지닌 익명성과 어두움, 인간에게 주는 공포 때문에 문제가 된다.
인간은 존재로부터 도피 또는 탈출하고자 부단히 시도한다… 존재는 하이데거에서 보듯이 줌 또는 은사나 혜택이 아니라 무거움과 공포를 체험하는 대상이다.
공포의 대상으로서 존재함을 레비나스는 ‘존재자 없는 존재’란 이름으로 다룬다.
레비나스는 존재의 근원적,
일차적 의미를 ‘존재자 없는 존재’를 통해 드러내 보인다.
어떤 것이 아니면서,
그렇다고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무’를 우리는 어디서 경험할 수 있는가? 레비나스는 밤의 경험을 그 예로 든다… ‘존재’에 이르는 또 다른 통로로 레비나스는 불면의 경험을 든다.
‘존재’는 주체가 없는 존재이며 그 자신으로 존재하는 인격이 그곳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을 향해 ‘나’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자의 부재는 레비나스가 말하는 ‘존재 사건’의 특징이다.
2. 주체의 출현과 존재 가짐: ‘여기’와 ‘지금’
레비나스는 주체의 성립 과정을 익명적 혼돈 상태인 ‘존재자 없는 존재,’ 곧 ‘존재한다’는 동사로부터 ‘존재자’라고 일컬을 수 있는 명사의 출현으로 이해한다.
레비나스의 홀로 서기로서의 주체는 존재의 익명성에 매몰되지 않고 존재를 자기 것으로 소유한다.
주체는 익명적인 존재의 속성에서 존재를 자신의 속성으로 만든다.
존재는 주체의 출현으로 인해 더 이상 이름과 얼굴 없는 존재, 시작과 끝이 없는 존재가 아니라 주체의 소유가 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현존재는 ‘엑지스텐츠,’ 즉 자기 ‘밖에 서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 현존재는 자기 자신을 떠나,
밖으로, 세계로 향해 초월하는 존재이다… 레비나스는 하이데거와 달리 주체의 근원적인,
일차적인 존재방식을 ‘홀로 서기’로 본다. 주체는 먼저 밖에서 안으로의 운동이다. 안으로의 운동, 내재성의 성립이 선행된 다음, 안에서 밖으로의 초월이 가능하다.
‘여기’: 주체 구성 요건으로서의 장소성
레비나스에 따르면 의식 주체를 통한 ‘존재’
극복은 존재 속에서의 주체의 ‘자기 정립’ ‘자리 잡기’를 통해 가능하다.
주체는 의식이 하나의 장소 속에 자리함
(장소화)을 통해 주체로서 서게 된다. 주체는 여기, 이곳에 존재하고, 이곳을 출발점으로 삼아 세계로 향해 나아간다.
주체를 ‘여기’에 위치시키는 것은 의식에 출발점을 제공할 뿐 아니라 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돌아올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주체는 그러면 무엇을 통해 ‘여기’와 관계하는가?
주체가 구체적인 장소와 관계하는 통로를,
레비나스는 놀랍게도 잠이라고 말한다… ‘주체가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할 수 있고 동시에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올 수 있음을 뜻한다.
의식이 ‘여기에 자리 잡기’ 위한 구체적인 가능 조건은 신체이다.
이제 주체는 두 가지 방식으로 규정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주체는 한편으로 익명적인 존재 사건으로부터의 해방으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개체적인 독립체로 ‘여기’에 자신을 정립하는 자로 규정된다.
‘여기’에 자리 잡음은 ‘순간’ ‘현재’와 관계한다.
주체는 ‘지금’
순간의 홀로 서기로서 가능하다. 의식이 자리를 잡음으로써 순간이 현재로서 구성된다.
‘현재로서의 순간’은 무엇을 뜻하는가?
‘지금’: 주체 구성 요건으로서의 순간
레비나스가 드러내는 ‘순간’은 ‘존재’에서 떨어져 나온 순간이다.
새로운 탄생으로서의 순간은 존재의 시작이고 존재의 정복이다.
‘순간으로서의 현재’는 어떻게 가능한가?
레비나스는 순수 ‘존재’로부텉 독립적인 존재자의 출현, 곧 순수 ‘존재’의 어둠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주장하는 주체의 출현을 통해서 ‘순간으로서의 현재’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주체는 ‘존재’의 중립적인 비시간성에 대항하여 스스로 시작함으로써 ‘순간’을 만들고 순간에 이름을 부여한다. 현재, 곧 순간으로서의 현재는 과거와 미래와 관계하기 전에 주체가 자기 자신에 현존하는 순간이다. 순간으로서의 현재는 ‘주체의 실현’이다. 자기 자신에의 현존,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출발과 복귀,
이것으로 인해 새로운 ‘지금,’ 새로운 ‘시작’이 시작될 수 있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
자기 자신으로 돌아옴으로써 주체는 ‘자기’로서, 자기 자시과 동일한 존재로서 자신을 확인한다.
주체는 어떤 다른 것을 통해서,
다른 것과의 관계에서 ‘자기’로서 정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과의 관계를 통해서 자기 동일성을 유지한다. 주체는 단순한 존재자가아니라 자기 자신을 소유하는 존재자이다. 주체의 자기 동일성은 내재성, 즉 자기 자신과의 친숙성이다. 자기 동일성은 실체 속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순간마다 자기를 확인할 때 성립되는 역동적 과정이다.
익명적인 순수 존재에 맞서 ‘순간마다’
자기 자신을 확인하는 행위를 통해 주체는 자기 자신으로 설 수 있다.
주체가 자기 자신에서 시작할 수 있다는 것, 자신을 다시 새로운 시작의 기점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은, 레비나스에게서는 인간의 근원적인 자유를 설명하는 실마리가 된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근원적 자유는 이것 또는 저것을 선택하기 이전에 자신을 정립하고 자신으로서 시작할 수 있는 자유이다. 이 자유는 주체로서의 주체의 출현을 가능케 하는 자유요,
존재의 익명성 속에 함몰되지 않고 자신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유지할 수 있는 자유이다.
3. 존재의 무거움과 초월의 욕망
그러나 주체의 자유는 절대적이 아니다. 익명적인 존재를 자신의 존재로 수용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존재의 정복이나 다른 한 편으로는 존재의 ‘무게’를 자신의 어깨에 걸머짐을 뜻한다. 존재의 익명성이 안겨주는 공포감을 벗어나,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지탱하는 주체로 설 때, 주체가 자신에 대해 갖는 책임,
존재에 관해 갖는 무거움이 바로 이 자유이다. 그러므로 주체가 누리는 자유는 역설적이다.
주체의 등장과 함께 ‘세계’가 등장한다.
주체는 여기,
지금 자신을 구성함으로써 비로소 하이데거적인 ‘세계 안의 존재’가 된다.
이렇게 보면 ‘세계 안의 존재’는 익명적 존재 사건으로부터 홀로 서는 존재자의 출현을 전제한다. 홀로 서는 존재자는 ‘지금’ ‘여기’에 신체적으로 자신을 구성함으로써 존재에 자신을 내맡기지 안고 오히려 존재를 자신의 것으로 소유한다. 존재는 이제 ‘나의 존재’가 되고 ‘존재 가짐’은 주체의 물질성과 분리되지 않는다.
존재의 무거움, 주체가 자신에 매여 있어야 하는 비극,
‘홀로 서기’의 무게를 지탱해야 하는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을 레비나스는 일단 ‘세계’라고 부른다…
‘향유’는 하나의 존재 방식이다. 인식, 과학, 노동, 소유, 이 모든 것을 레비나스는 ‘향유’로 이해한다.
레비나스는 인식, 즉 우리의 지적인 작업을 통해 존재의 전체성을 초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음을 힘주어 강조한다.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레비나스의 설명에 따르면 나와 다른 것은 결국 나를 통해 인식된다… 인식에는 환원할 수 없는 낯선 요소가 개입되어 있다…
인식은 물질성에 사로잡힌 주체를, 물질성과 거리를 두게 해주지만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해방시켜주지 못한다… 유아론은 궤변이나 일탈이 아니라 이성의 본질적 구조이다… 인식은 [전체성과 무한]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전체성의 틀을 스스로 깨뜨릴 수 없다. 그러면 존재의 무거움으로부터의 해방, ‘존재 저편으로’
‘존재와 다른’
차원으로의 초월이 어떻게 가능한가?
4. ‘존재 너머로’이 초월: 고통과 죽음
레비나스의 관심은 존재 저편으로의 초월을 그려내는 일이다… 무엇이 그와 같은 현상을 보여주는 경험인가? 고통과 죽음이 바로 그 경험이다.
고통은 ‘무의 불가능성’이다. 존재의 매임으로부터 도무지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것이 곧 고통이다.
죽음을 알 수 없는 것, 나에게서 유래되지 않은 것, 하나의 신비로 묘사함으로써 레비나스는 익명적 존재 사건에서 존재를 자신의 존재로 소유하는 주체의 능동성이 완전히 수동성으로 전환됨을 보여준다.
고통 속에서 죽음과 갖는 관계는 수동성의 경험이다… 죽음은 모든 ‘가능성의 불가능성’이다.
죽음에 대한 레비나스의 묘사는 하이데거의 관점과 전혀 다르다. 현존재의 존재 방식을 ‘죽음으로 향한 존재’로 볼 때 하이데거가 염두에 둔 것은 주체의 자유이다. 현존재는 자신이 죽음에 이르는 존재라는 의식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소유하고 미래를 기획할 수 있다.
죽음은 현존재에게 있어서 모든 다른 가능성을 가능케 하는 최고의 가능성,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뜻한다. 죽음은 그러므로 하이데거 철학에서는 자유의 사건이다.
죽음은 ‘절대 타자,’
나와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 있음을 보여주는 존재론적 사건이다… 죽음은 주체의 고독
(홀로 서기)을 깨뜨린다.
주체는 자신의 존재에 갇혀 있던 자리에서 전적으로 다른 타자를 만나게 된다.
타자의 존재는 나의 내면성과 구별되는 외재성이고 그야말로 이타성이다. 그러므로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관계를 ‘공감’이나 ‘감정 이입’
또는 ‘신비로운 연합’으로 볼 수 없다고 강조해서 말한다. 이와 같은 용어들은 여전히 존재 이편, 존재 안에서의 존재자와 존재자의 관계를 표시하기 때문이다.
5. 시간과 타자: 타자와의 만남
레비나스에 따르면 죽음을 통한 절대 타자와의 관계는 인간에게 미래를 열어준다… 홀로 서기 자체에는 미래가 없다…
손에 거머쥘 수 없고 내가 지배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미래는 나에게 타자이다. 미래와의 관계는 곧 타자와의 관계이다.
미래와 현재가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은 어디에 있는가? 그 가능성을 레비나스는 이미 [시간과 타자]에서 탙자의 얼굴과의 만남에서 찾는다.
레비나스의 타자 개념에서 특이한 것은 타자를 단지 ‘다른 자아’로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타자는 나의 공감과 연민, 감정 이입의 대상이 아니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인은 성격과 외모, 심리와 상관없이 단지 내가 아니며, 나와 다르다는 사실만으로 수용하고 인정하는 타자이다.
타인은 나와 대칭적 관계, 나와 대등하게 맞설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전혀 예기치 못하고 전혀 나의 틀 속에 집어넣을 수 없는 사람이다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들).
6. 타자성과 여성성
레비나스는 존재의 전체성이 깨어질 수 있는 또 다른 예로 에로스의 경험을 든다.
전적으로 다른 것, 타자의 타자성,
그리고 내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면서 타자가 존재 사건 속에 개입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여성적인 것과의 관계, 곧 성애를 통해 발견할 수 있다고 레비나스는 생각한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성행위는 합일과 혼융 또는 용해 관계가 아니라 전적으로 다른 타자와의 만남이고 나로 환원할 수 없는 타자의 타자성을 체험하는 장소이다.
타자성은 성 관계를 통해 소멸되기는커녕 더 인정되고 유지된다…
성 관계에서 만나는 타인은 내가 손에 거머쥘 수 없는 신비 속에 있다.
‘여성성’이란 개념에는 신비로운 것, 알 수 없는 것뿐만 아니라 어떤 ‘빛’도 그 안으로 침투할 수 없다는 생각이 담겨 있다… 여성적인 것의 존재 방식 자체가 스스로 숨는 것이기 때문이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타자성을 만나는 원초적 경험을 에로스, 즉 성애에서 찾는다. 에로스에는 이론적 인식이나 투쟁이 개입되지 않는다. 고통과 죽음의 도래를 통해 열린 타자의 공간은 이제 에로스를 통해 인격적 타자, 전적인 타자로서의 타인을 만날 수 있는 공간으로 확대된다.
애무는 여자를 접촉하는 가운데 여자가 아닌 또 다른 하나의 타자를 접촉하는 행위이다…
뭔가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 애무의 본질이다… 애무는 이런 의미에서 ‘순수한, 내용 없는 미래’에 대한 기대이고 ‘손에 쥘 수 없는 것’에 대한 굶주림으로 충만해 있다.성교도 이와 같은 관점에서 이해된다.
죽음은 주체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너의 타자성 속에서 나를 상실하지 않고 나의 존재를 유지할 수 있는가? 레비나스는 ‘어버이란 존재’ 또는 ‘부모 자식 관계’에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다.
어버이와 아이의 관계를 “전혀 다른 사람이면서 동시에 내 자신인 낯선 이와의 관계,” 또는 “나와,
그사이 나에게 낯선 이가 된 내 자신과의 관계”로 묘사한다.
주체는 어버이가 됨으로써 그의 이기주의, 자신에게로의 영원한 회귀로부터 해방된다. 주체는 이제 타자와 타자의 미래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초월한다. 출산성을 통해 주체는 자기 자신의 유한성으로부터 구원받는다. 아이의 출산으로 새로운 미래,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7. 타자성의 철학으로
‘존재론적 모험’은 ‘나’라고 부를 수 있는 신체적 존재자
(주체)가 익명적 존재 사건으로부터 출현하여 타자와의 관계에 들어서는 과정이다.
이것을 레비나스는 ‘변증법’ 또는 ‘존재의 변증법’이라고 부른다.
초기의 레비나스 철학은 슈트라서가 적절하게 표현하듯 ‘존재론 비판’이다. 레비나스 철학의 목표는 존재를 동일성으로 환원하거나 또는 중성적 존재로 보아온 전통적인 서양 철학의 존재론을 비판하고 그것을 극복하자는 데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레비나스는 뒤르케임처럼 합일이나 통합을 이상적 사회 관계로 보는 이론을 비판한다.
레비나스의 철학은 초기부터 벌써 ‘타자의 사유’요, ‘타자의 철학’임을 나타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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