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방지법과 필리버스터
법치주의는 사람이 아니라 법이 국가를 통치한다는 뜻으로 근대입헌국가의 자유주의적 통치원리 중 하나이다. 그러나 법은 국민들의 자유나 권리를 제약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 진정한 의미는 법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국민의 기본권을 제약해서는 안된다는 것으로 궁극적으로 국가권력의 자의적인 지배를 막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법은 필요하다고 여겨질 때만 최소한으로 제정되어야 하고 법 제정은 신중해야 한다.
지금 대한민국은 테러방지법 제정을 둘러싸고 여야간에 첨예한 긴장과 갈등이 조성되고 있다. 새누리당은 국회의장의 직권상정이라는 극단적 방식을 통해 이 법을 통과시키려고 하고 있으며, 야당들은 필러버스터(무제한토론)라는 최후의 수단까지 사용하며 이 법의 통과를 막으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여당에 의해 현재 진행되고 있는 테러방지법 통과노력은 몇 가지 심각한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먼저, 절차상의 문제이다.
현재 테러방지법은 정의화 국회의장의 직권으로 상정되었다. 그러나 2012년에 개정된 국회법은 국회의장 직권상정을 ‘천재지변,
전시 또는 사변 등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 국회의장이 각 교섭단체 대표의원과 합의한 경우’로만 제한하고 있다. 정의화 의장은 “북한의 테러위험이 공공연한 현실은 국가비상사태에 준”하기 때문에 테러방지법의 직권상정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지금 한국이 국가비상사태에 직면하고 있는가?
지금이 진짜 국가비상사태라면 왜 정부의 어떤 단위에서도 비상위원회가 소집된 적이 없고 공무원들은 비상근무를 하지 않는가? 왜 군대는 비상동원령을 내리지 않는가?
경찰청장은 이 엄중한 시기에 왜 해외출장을 다녀왔는가? 결국 청와대나 여당이 말하는 국가비상사태는 테러방지법을 하루라도 빨리 통과시키기 위한 그들만의 비상사태인 것이다.
만약 테러방지법이 며칠 안에 통과되지 않으면 대한민국은 테러로 인해 큰 피해를 입을 것인가? 아니다. 우리에게는 테러방지법이라는 이름의 법만 없을 뿐 테러를 대비하기 위한 각종 법령과 기구가 이미 마련되어 있다. 악명 높은 국가보안법을 비롯해서, 국정원의 활동을 돕기 위한 국가정보원법,
적의 침투 도발이나 그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통합방위법,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비상대비자원관리법 등이 있고,
국무총리가 의장으로 있는 국가테러대책회의를 비롯해서 중앙통합방위협의회,
국민안전처, 각군과 경찰의 대테러특공대 등도 있다.
사이버테러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정보통신기반보호법, 전기통신사업법, 통신비밀보호법 등이 있다.
테러 자금 관련 법안도 범죄수익은닉규제법과 금융거래정보보고법, 외환관리법, 공중등협박목적자금조달금지법 (일명 테러자금조달금지법)
등이 있다.
즉, 현존하는 기구 또는 제도를 잘 이용하면 테러에 대한 사전 대비와 사후 수습이 가능하다. 그러나 문제는 정부여당이 이 제도와 기구를 효과적으로 관리할 능력과 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황교안 국무총리가 국가테러대책회의 의장이 자신인지도 몰랐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많은 사람들이 테러방지법은 테러를 막자는 것인데 야당이나 시민단체는 왜 반대를 하는가라고 묻는다.
그러나 이는 테러방지법이라는 이름때문에 발생한 오해이다. 법은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지금 새누리당이 국회선진화법을 폐지하고자 하는데,
그렇다면 새누리당은 국회선진화를 반대하고 국회를 후진화시키겠다는 말인가? 이름은 ‘선진화’이지만 내용은 후진화일수도 있고 (물론 국회선진화법이 후진적이라는 주장은 아니다),
이름은 ‘테러방지법’이지만 내용은 국정원에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부여하는 국정원권한강화법이거나 국민감시를 강화하기 위한 국민감시강화법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여당은 야당이 테러방지법 제정을 반대한다고 주장하지만 야당은 법안 자체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효율적인 법을 만들기 위해 내용의 수정을 요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상정되어 있는 법은 테러방지에 전혀 효율적이지 않으며 인권침해의 가능성이 대단히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당은 이와 같은 독소조항을 일부 제거하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한 후 합의처리하자고 주장하지만, 현재 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 상정되어 있는 테러방지법에는 많은 문제점들이 있지만 두 가지만 짚고자 한다. 첫째는 인권과 관련된 문제이다. 테러와 테러범에 대한 엄격한 정의를 내리지 않는다면 이 법이 통과된 후에 무엇이 ‘테러’이며 누가 ‘테러범’인지에 대한 임의규정이 가능하고 더 나아가 정황이나 의심만으로도 민간인에 대한 도청,
감청, 사찰, 수사 등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박근혜 대통령이 작년 민중총궐기에 참가한 사람들을 ‘테러리스트’에 비유한 적이 있고, 최근 원유철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테러방지법을 막기 위한 야당의원들의 필리버스터를 ‘테러’라고 말한 적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테러방지법이 통과된다면 앞으로 시위에 참가하거나 정부를 비판하는 야당의원들은 잠재적 테러리스트로서 국민으로서의 기본권이 침해당하고 광범위한 수사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국정원은 대공방첩 분야가 아닌 테러 의심자에 대해서도 감청이나 금융정보 수집 가능하다. 금융정보 수집은 영장없이도 가능한데 이는 대공방첩 수사에서도 국정원이 가져보지 못한 권한이다. 테러방지법에는 인권침해를 막기 위해 대테러 인권보호관
1명을 둔다고 되어 있으나 도대체 한 명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더 나아가 인권보호관의 자격, 임기 등 운영에 관한 사항은 따로 대통령령으로 정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는 이 법을 발의한 사람들이 얼마나 국민들의 인권보호에 대한 생각이 부족한지를 잘 보여준다.
둘째는 국정원과 관련된 문제이다. 굳이 예전 중정이나 안기부 시절까지 거론하지 않고 박근혜 정부 이후에 밝혀진 것만 보더라도 , 국정원은 이미 대선불법개입,
간첩조작, 민간인 사찰, 해킹프로그램 유포 등 불법적이고 탈법적인 일을 많이 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야당은 국정원을 견제하고 감독할 수 있는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국정원을 견제하기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지 않고 테러방지법이 통과된다면 지금도 강력한 국정원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게 된다.
더 나아가 국정원은 대테러업무를 정보기관이 총괄하지 않는 국가는 없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주요 선진국에서는 대테러업무를 정보기관과 분리된 별도의 기간이 담당하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은 CIA가 아닌 국가대테러센터,
영국은 국가안전 대테러부, 독일은 연방총리청 소속 연방헌법보호청에서 각각 담당한다.
즉, 테러에 대한 대비를 잘하기 위해서는 국정원의 개혁과 국정원의 적절한 위상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 상정되어 있는 법이 그대로 통과된다면, 국무총리 소속 대테러센터는 허수아비가 되고, 대신 해외정보수집에는 무능하고 국내정치공작에만 관심있는 국정원에 더 많은 권한을 주게 된다.
마지막으로 테러방지법 통과를 막기위해 현재 국회에서 야당의원들에 의해 진행되고 있는 필리버스터 (무제한토론)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박근혜 대통령은 야당의원들의 필리버스터를 두고 “어떤 나라도 없는 기막힌 현상”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필리버스터는 국회에서 다수당의 횡포를 막기 위한 제도이며,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영국,
미국, 캐나다 등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도 시행되고 있고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우리도 여야가 합의에 의해서 통과시킨 국회선진화법에 의해 40여 년만에 필리버스터가 소수당의 정당한 권리로 인정받았고 그러므로 지금 야당들은 국회내에서 합법적인 권리를 행사하고 있다. 또한 필리버스터는
19대 총선 당시 새누리당의 공약이기도 했다. 물론 필리버스터가 너무 자주 사용된다면 정치적으로 바람직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다수당이 소수당과의 대화와 타협없이 힘이나 머릿수로 밀어붙이려고 할 때 소수당의 입장을 방어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필리버스터 사용에 대한 비난보다는 왜 야당의원들이 지금 필리버스터를 이용해 법안을 저지하려고 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안보와 프라이버시, 그리고 민주주의 제도하에서 다수결의 원리와 소수자의 권리는 상충되는 면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논의되는 테러방지법이나 필리버스터는 단순한 찬반논의를 떠나 신중하게 논의될 필요가 있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박근혜 대통령이 소통과 포용의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고 “희생을 치르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겠느냐”면서 야당과 국민을 협박하는 정치를 하는 것을 볼 때 너무나 안타까울 뿐이다. <끝>
이 글은 LA 내일을 여는 사람들 홈페이지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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