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블링큰의 무지와 한인 시민사회의 역할 (미주중앙일보 기고문)
지난 18일 토니 블링큰 미 국무부 부장관이 한 일본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미주 한인 시민단체들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작년 말 한국과 일본 정부의 합의를 지지하라고 요구했다. 이는 실제로 미국의 고위관리가 “미국 내 한인단체들의 항의활동 자제”를 요구한 것이며, 이에 대해 미주 한인 시민단체들은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그의 발언은 특히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다. 먼저, 미국 고위외교관이 한일관계에 대해 정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블링큰은 미 행정부 내에서 아시아전문가라기보다는 유럽전문가이긴 하지만, 그가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고, 과거사에 엄격한 유럽에서 청소년기를 보냈으며,
하버드와 컬럼비아에서 미국 최고의 엘리트 교육까지 받았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그가 역사적으로 가장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범죄 중 하나인 일본군의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이토록 무지하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그러나 사실 이 문제는 그에게만 개인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더 큰 문제는 미국의 정치지도자들 대다수가 ‘위안부’ 문제 뿐만 아니라 ‘난징대학살’이나 ‘731부대의 생체실험’ 등과 같은 과거 일본제국주의와 일본군에 의해 행해졌던 수많은 전쟁범죄나 잔학행위들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며, 일본이 지금까지도 이 문제들에 대해 제대로 인정하고 사과하거나 배상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잘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또한 많은 미국인들이 태프트-가쓰라 밀약으로 미국이 일본의 한국지배권을 승인한 적이 있고, 731부대와 같은 경우 생체실험 자료를 넘겨받는 대가로 2차대전 후 제대로 처벌한 적도 없었다는 사실도 모른다.
둘째, 미국의 고위관료가 시민단체에 정부의 합의를 따르라고 요구했다는 점이다.
특히, 미주 한인 시민단체에 한일 정부의 합의에 반대하는 의견을 표명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 중 하나인 ‘표현의 자유’에 대한 심각한 위반이다. 미국은 수정헌법 1조를 통해 표현의 자유를 어떠한 경우에도 침해할 수 없는 기본적인 권리로 인정하고 있으며, 정치적 의사표현의 자유는 미국 민주주의의 가장 큰 자랑이 되어왔다.
이러한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그가 미주한인 시민단체에 정부간 합의에 따르라고 요구하는 것은 그가 한국이나 미국 내 한인들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인식을 잘 보여준다. 그는 미국 시민단체들에게도 정부의 결정에 따르라고 쉽게 요구할 수 있을 것인가? 지금도 고통의 기억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위안부피해자들이 합의과정에서 완전히 배제된 이번 합의에 대한 한인사회와 시민단체의 반대는 정당하고, 그 표현을 위한 여러 권리들은 완전히 보장되어야 한다.
이번 한일 정부의 위안부 합의는 미국이 한미일 세 나라의 안보협력을 강화하고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정부에 유무형의 압력을 넣은 결과이며 이러한 면에서 이번 위안부 합의의 최종 승자는 미국이라는 평가도 있다.
블링큰 부장관의 발언은 이러한 평가를 뒷받침해주는 근거로 작용할 수 있으며, 그렇다면 이로 인해 미국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자국의 이익을 위해 인권과 인도주의를 헐값에 팔아넘겼다는 비난을 듣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미 국무부는 블링큰 부장관의 발언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해야 한다.
또한 이러한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한인사회의 노력도 필요하다. 먼저, 미주 한인들은 인권,
정의, 평화와 같은 문제에 항상 관심을 가져야 하며, 정치적 역량을 키워서 미국의 정치인들이 한국과 한인사회를 더 이상 가벼운 상대로 보지 않도록 해야 한다. 둘째, 미국 정치인들이나 일반 시민들에게 과거 일본이 저지른 끔찍한 전쟁범죄나 반인도적 범죄들에 대해 알리고, 일본 정부는 아직까지도 이에 대해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도 함께 알려나가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지금 한인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 캘리포니아 위안부 교육 지지서명운동은 그 의미가 매우 크다고 할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