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신저의 새로운 세계질서 구상에 대한 비판적 평가
서평: 헨리 키신저 세계질서 (Henry Kissinger World
Order)
작년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에게서 러브콜을 받았던 대표적인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인 키신저는 이 책에서 새로운 세계질서의 수립이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지금까지 진정한 의미에서의 “세계질서”가 수립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단지 유럽사에서 우연한 계기로 형성된 웨스트팔리아 세계질서가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세계질서의 역할을 담당하면서 유지되어 왔을 뿐이다.
유럽에서 국가주권과 세력균형에 기반한 웨스트팔리아 체제가 형성될 때, 중국이나 중동 등 세계 다른 지역에서도 세계질서에 대한 대안적 구상이 존재했지만, 유럽의 팽창으로 인해 이러한 노력은 실패하고 결국 웨스트팔리아 체제로 흡수되었다.
그는 이 책에서 현재 세계질서를 대변하고 있는 웨스트팔리아 체제의 형성과 역사적 전개과정,
이슬람의 세계질서에 대한 구상과 역사적 전개과정, 아시아적 세계질서에 대한 구상과 역사적 전개과정, 그리고 미국의 세계질서에 대한 구상과 역사적 전개과정을 각각 구체적으로 서술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핵과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이 시대에는 전지구적 차원에서 새로운 세계질서의 수립이 요청되고, 이를 위해서는 각 지역 안에서 질서에 대한 개념을 먼저 수립한 후 이 개념들을 연결시키려는 일관된 전략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결국 “웨스트팔리아 체제의 현대화”라고 할 수 있다.
키신저는 1923년 독일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온 가족이 1938년 나찌의 유태인 탄압을 피해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이주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미육군으로 참전해서 주로 독일에서 복무한 이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학사, 석사, 박사학위를 모두 하버드에서 받은 후 하버드 교수로 재직했으며,
닉슨 행정부와 포드 행정부 때에는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역임했다.
이렇듯 학자와 외교관으로서 최고의 명성을 쌓은 키신저는 철저한 현실주의자로서
1969년부터 1977년 사이의 미국외교정책 형성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쳤고 그 이후로도 꾸준한 저술활동 등을 통해 여전히 많은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그는 특히 베트남전 종식과 사회주의 국가와의 데탕트 외교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베트남전 종식에 대한 공헌으로 1973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노벨평화상 수상은 역대 노벨상 수상 중 가장 논란이 큰 수상으로 이로 인해 두 명의 노벨상 위원이 항의차원에서 위원직을 사임했고,
키신저와 노벨평화상을 공동수상하기로 되어 있던 북베트남의 레 둑 토는 수상을 거부했다.
특히 베트남전 당시의 그의 정책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많은데,
예를 들어 캄보디아와 라오스에 대한 공격을 최대한 자제했다는 이 책의 주장과는 반대로, 많은 민간인 사상자를 낸 캄보디아에 대한 미군공습과 1970년의 캄보디아 침략은 그에게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이 책에서 남베트남의 군사반란에 대한 미군의 지속적 지지는 군사정권이 민주주의 제도를 정착시킬 것이라는 기대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여전히 사과나 반성의 태도를 보여주지 않고 있다.
더 나아가 키신저는 이 책에서 중동문제를 언급하면서 이란의 이슬람 혁명으로 인해 미국으로 망명해야 했던 팔라비 왕조를 일방적으로 두둔하고,
이스라엘이나 이스라엘에 우호적이었던 중동국가들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견해만을 제시하며, 사담 후세인 제거를 위한 이라크전쟁의 필요성에 대해서만 언급하면서, 팔라비 왕조의 부패나 반민주성, 이스라엘의 국제법 위반이나 침략행위, 이라크 전쟁의 구실이었던 이라크에서의 알카에다와 대량학살무기의 부재 등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 등 매우 객관적이지 않다.
이 책을 읽다 보면 키신저의 논리정연함,
박학다식함, 국제정치의 이론과 현실을 예리하게 접목시키는 능력 등에 놀라게 된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웨스트팔리아 체제의 보편성을 주장하면서 이 체제의 근본적인 한계인 국가주권의 인정은 형식에만 그칠 뿐, 실제 국제정치에서는 국가주권이 쉽게 무시되고 강대국의 힘의 논리만이 지배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으며, 이슬람 문화에 대한 설명에서도 새무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에 나오는 차별적인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듯한 모습도 보인다.
이처럼 이론적으로 보수적이고 정치적으로 위험한 키신저의 지지를 그토록 받고 싶어했던 지난 대선의 힐러리 클린턴을 생각해 볼 때, 만약 클린턴이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미국주도의 세계질서 유지를 위해 매우 호전적이고 지배적인 외교정책을 펴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 많은 설득력을 갖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현재 트럼프 대통령이 취하는 외교정책이 더 바람직하다는 이야기는 물론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미국의 자유주의자들이나 진보주의자들은 키신저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해체하고 국제사회의 모든 국가가 진정한 협력을 바탕으로 세계평화와 번영에 기여할 수 있는 새로운 국제정치 이론과 정책을 발굴해서 제시해야 할 시급한 과제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미국의 자유주의자들이나 진보주의자들은 키신저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해체하고 국제사회의 모든 국가가 진정한 협력을 바탕으로 세계평화와 번영에 기여할 수 있는 새로운 국제정치 이론과 정책을 발굴해서 제시해야 할 시급한 과제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