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10일 금요일

존재론적, 우편적: 자크 데리다에 대하여 (아즈마 히로키 저, 조영일 역) 제4장 존재론적, 우편적 중 4. 우편적 (340-402) 발췌 요약


3장에서는 데리다가  하이데거적 사고에 저항했는가와 데리다가  저항을 그와 같은 텍스트 형태로 전개했는가 대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참조 텍스트를 데리다와 데리다학파에 한정해서 거기서 사용되는 은유의 내재적 정리를 통해 우편적 탈구축 정식화를 시도했다. 이어서 4장의 논의에서는 참조 텍스트를 데리다 바깥에서 찾아 보다 일반적으로 논리학과 존재론과 정신분석의 관계 속에서 우편적 탈구축 위치를 부여하고자 했다.

보다 많은 계보=실을 발견하면 텍스트=직물은 그런 만큼 더욱 치밀하게 풀어헤쳐지고 우편적 탈구축의 상은 점점 명확해진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으면 된다. 이제 본서의 방향은 여기에서 마지막으로 프로이트와 데리다의 그런 통찰을 이끄는 실에 대해 정리해 두고 3장에서 잠시 제쳐둔 질문인 데리다의 텍스트 형태가 가진 의미로 다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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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는 1937 [끝이 있는 분석과 끝이 없는 분석]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한다. 논문의 VII절에서 그는 자아기능으로 가장 풍족한 심리적 조작들을 만들어냄으로써 분석의 임무는 완수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분석은 끝없는 과제이기도 하다. 끝나지 않는 것일까. 분석가와 피분석가 사이에는 항상 전이 생긴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분석치료의 전망에 영향을 주고, 저항이라는 방식으로 치료를 곤란하게 하는 계기들에서 분석가의 고유성 또한 어떤 장소를 점하게된다. 분석가의 인격이 피분석가의 증상에 영향을 주고, 그로부터 영향을 받는 순환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분석은 한편으로는 끝이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끝이 없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다시 길은 시작된다?)

끝이 있는 분석과 끝이 없는 분석은 자아분석 이드분석 이론적으로 대응한다. 분석가는 분석대상의 이드의 아직 지배되고 있지 않는 부분을 자아의 총합 안으로 넣기 위해 상대의 자아와 동맹을 맺는다. 그리고 동맹관계는 이드에 대한 자아의 지배 충분히 강화되면 종언을 맞는다. 이것이 자아분석이다. 그러나 이드에서 자아로의 작용 자체는 이후에도 잔존한다. 따라서 정신분석은 항상 증상의 재래에 시달린다. 그렇기 때문에 분석가는 피분석가의 이드에도 발을 들여놓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이드분석이다.

분석가와 피분석가 사이에서 욕망이 서로 전이하는 (전이/역전이) 레벨에서 분석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양자의 이드는 서로가 서로를 참조하는 거울상 관계에 말려들게 된다. 분석은 분석가와 피분석가 사이의 전이, 프로이트 자신이 사용한 표현을 사용하자면, 양자의 감정관계 의해 끝없는 것이 된다. 뒤집어 말하면, 끝없는 분석은 전이에 의해 뒷받침된다. 전이의 개념은 정신분석기법의 역사에서 아는 wissen’, 의식의 무력함의 발견과 깊이 결부되어 있다. 전이=무의식적 조건의 정비가 =의식에 선행한다. Wissen 규정하는 wollen, 지를 규정하는 의지라는 이런 관점은 니체나 하이데거의 통찰과 깊이 호응하고 있다. 의지는 어떤 무의식적 작용에 의해 뒷받침된다. 언어=지는 그런 작용에 의해 매개되고서야 비로소 힘을 갖는다. 하이데거에서 wollen 위상에 대한 논의는관심론으로서 전개되고 있다. 의지=관심은 존재자의 영역을 앞선다.

데리다의 [서명 사건 콘텍스트] [유한책임회사 abc] 채용한 스타일의 대조성에 주목해 보자. 둘은 논리적 탈구축과 우편적 탈구축을 대표하고 있다. [서명 사건 콘텍스트] [목소리와 현상]이나 [에크리튀르와 차이] 논문들과 마찬가지로 학술논문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유한책임회사 abc] 전형적이 2 텍스트로서 논문 체제를 갖추고 있지 않다. 이러한 대조는 데리다의 스타일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 것만은 아니라 설의 반론에 대한, 보다 정확히는 반론=응답하는 자체에 대한 데리다의 사고와 내용적으로 연동하고 있다.

데리다는 [유한책임회사 abc]에서 설이 데리다 자신의 주장에 대한 다른 감정적 가치평가를 부여하고 데리다의 주장을 다른 형태로 반복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데리다에 따르면 설의 반론은 그의 이드에 이해 인도되고 있다. 하지만 그는 힘을 자각하고 있지 못하고 조작할 수도 없기 때문에 상대의 주장을 무의식적으로 반복하게 된다.

[유한책임회사 abc] 설에 대한 그의 Sec=지적 접근의 무력함과 결과로 생긴 강한 저항을 전제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데리다는 설의 wollen 조작하기 위해 wissen과는 다른 위상에서의 전략을 세운다 (이드분석). 이처럼 [서명 사건 콘텍스트] [유한책임회사 abc] 스타일상의 차이는 내용적으로는 자아분석과 이드분석, wissen wollen 심급차이에 대응하고 있다. 그리고 텍스트는 각기 논리적 탈구축과 우편적 탈구축을 대표하는 스타일로 씌여졌다.

데리다는 하이데거와 프로이트처럼 wissen 외부, 그의 술어로 말하자면 불가능한 대해 사고한다. 다만 그는 거기서 가지 , 논리적 탈구축과 우편적 탈구축을 병행하며 걷는다. 전자에서 데리다는 wissen 심급에서 wissen 한계를 호소한다. 작업은 형식적으로는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로 환원된다. 이에 반해 후자에서 데리다는 wollen 심급에서 wissen 대한 신뢰 (예를 들어, 로고스중심주의라고 불리는 ) 와해시킨다.

존재론적 탈구축과 우편적 탈구축은 모두 wissen 저편을 언어화하려고 한다. 다만 전자는 거기서 철학소의 고유명사화를, 후자는 전이화를 이용한다. 그렇다면 불가능한 단수로 파악하는 사고에 대한 데리다의 저항은 전이 관계에 있는 텍스트에서 행해질 필요가 있었을까. 철학소의 고유명화와 전이화라는 스타일상의 차이는 이론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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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의 [입장들] 따르면 탈구축은 증상의 저항과 항상 만나기 때문에 그런 저항이 요청하는 끝이 없는국면에서 탈구축은 이미 이론적/개념적/언설적인 , wissen 레벨에서 멈출 없고 우편적 탈구축의 기묘한 텍스트가 요청된다. 1970년대 초기 데리다는 전이적 기법을 고명 전략이라고 부르고 있다. 예를 들어 에크리튀르라는 단어는 이상 기존의 철학적 이항대립, 파롤/에크리튀르라는 대립을 따르지 않는 것을 지시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여기에서 데리다는 이항대립의 외부를 드러내기 위해 바로 그런 이항대립의 내부에 위치하는 오래된 이름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비틂은 탈구축의 이런 국면이 전이적이기 때문에 생긴다. 분석가 데리다는 새로운 샅태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피분석가가 사용한 오래된 말을 재응용할 수밖에 없다.

고명, 철학소의 전이화를 사용하는 데리다의 전략에 대한 이론적 함의를 살펴보자. 하이데거는 언어에 존재하는 plus 이용하기 위해 철학소를 고유명화했다. 데리다는 에크리튀르를 코라라는 개념=은유에 근접시켜 논한다. 하이데거의 단어=장소와 데리다의 에크리튀르=코라는 어떻게 다른가? 하이데거는 코라를 현존재의 이중주름성 위헤 기초짓는다. Plus 기원, 현존재의 Ort (근원적 장소) 필연적으로 한나밖에 없다. 반면에 데리다는 코라를 각각의 단어에 존재하는 이중성으로 파악한다. 모든 시니피앙에는 에크리튀르가 분신으로서 붙어있다. 하이데거의 세계=Da 시니피앙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니피앙은 존재자 일반을 의미한다. 그러나 데리다의 세계는 시니피앙과 에크리튀르의 이중겹침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지 위상은 절에서는 의식적 사고의 권내에서 사고동일성에 의해 처리되는 시니피앙(언어+사물표상) 무의식적 사고의 권내에서 지각동일성에 의해 처리되는 에크리튀르(사물표상)와의 차이로서 파악되고 있다. 하이데거의 현존재분석론과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모두 바로 Da 또는 공리계의 일관성에서 도출되고 있다. 그러나 데리다가 생각하기에 애당초 그런 전제 자체가 전도되어 있다. 현존재의 이중주름성이 앞서기전에, 괴델적 균열이 퍼지기 전에 원추 밑면의 층은 항상 이미 사물표상들로 산종되고 있다.

하이데거의 해석학적 스타일, 분석되는 텍스트나 시스템을 자신의 고유명=은어계로 강력히 동화시키고 그것의 내적 논리만을 따라서 전개하는 그의 텍스트 운동과 달리 데리다에게는 키워드 자체가 없다. 우편적 탈구축의 텍스트 전략은 분석가와 피분석가의 전이 관계, 독해대상이 되는 텍스트나 시스템에 속하는 고명의 재응용에 의해 규정된다. 그러므로 2 이후의 데리다는 개개의 분석상황으로부터 추상화되어 고유()화된 키워드를 가질 없다. 하이데거는 plus 주체의 자기언급적 구조로 설명한다. 그러나 데리다는 plus 언어 자체가 가진 보강구조, 시니피앙과 에크리튀르의 이중겹침성으로 설명한다. 시니피앙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에크리튀르, 존재자와 유령이라는 이중화된 Da 대한 데리다의 통찰은 스타일적으로 수많은 전이상황에서 서로 다른 철학소로부터 plus 발견하는 고명의 전략과 조응한다.

사고는 plus, 다룬다. 데리다의 존재자를 전이=중계한다. 수용기로서 작용하는 공허하고 중성적인 것으로, 하이데거의 ’, 새롭게 우연히 만나는 존재자를 항상 자신의 권내로 치환하고 동화시키는 바로 그런 치환작업에 의해 스스로를 존재자들을 넘어선 곳에 고정시키는 초월론성 운동이 갖는 충만한 고유성을 결코 가지지 않는다. 하이데거의 사고는 고유명을 다루며, 거기에서는 사고라는 철학소도 고유명화가 된다. 이에 반해 데리다의 사고는 코라에 드러나고, 거기에서 사고라는 단어는 항상 빈칸인 채로 방치된다. 단어는 vouloir 위상에서 상대와 전이를 일으키기 위한 하나의 전략거점에 지나지 않고, 때문에 자신은 아무 것도 vouloir하지 않는다’. 이상이 하이데거와 데리다, 존재론적 탈구축과 우편적 탈구축 사이의 이론적 차이이자 스타일적 차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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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행위론은 집합의 완전성을 전제하고 있다. 따라서 불완전한 것에 머문다. 그러나 데리다는 언어행위론의 그런 곤란에 불완전성이라는 명사로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그것을 동사적으로 완전성을 계속 일탈하는’, ‘끝이 없는과정으로 표현한다. 칸스터티브/퍼포머티브, 오브젝트/메타의 경계가 가진 결정불가능성은 interminable이라는 단어에 의해 전이의 문제로 반송된다.

형식적 문제와 전이적 문제의 이런 구별은 [유한책임회사 abc]에서 설과의 대결을 받아들이기 위해 제출된 가지 가설’, ‘set’ ‘mis’ 구별로서 보다 일반적으로 도입되고 있다. Set 집합 의미한다. 가설에서는 언어행위론의 실효성은 분석대상이 되는 집합의 불완전성에 의해 비판된다. Mis mistake, misunderstanding, misinterpretation, misstatement 등의 현상을 규정하는 미스성 일반’, 커뮤니케이션에서의 일탈/실패가능성을 의미한다.

한편으로는 전이라고 불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편이라고 불리는 그런 현상, ca rappplique 생기는 것일까? 형식적 결정불가능성의 전이공간에 대한 의존은 이미 프로이트에 의해 시사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의식적인 ’, 자기의 고유성을 위협할 일이 없는 무매개인 wissen 영역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무의식적인 ’, 고유한 wissen 영역에서 일탈하는 다른 종류의 심적 존재가 있다. 전이에서 의식과 무의식, 시니피앙과 에크리튀르의 위상에서 동시에 커뮤니케이션이 행해진다. 예를 들어, 데리다의 고명의 전략은 탈구축하는 측과 탈구축되는 , 분석가와 피분석가가 같은 에크리튀르를 분유하고, 동시에 거기서 동일적이지 않은 시니피앙을 부어넣을 때의 어긋남=차연을 이용한다고 이야기된다. 그곳에서는 한편으로 개의 무의식이 같은 에크리튀르를, 다른 한편으로 개의 다른 시니피앙을 처리하는 위상의 어긋남이 이용되고 있다. 전이는 무의식을 연결시킨다. 전이는 무엇보다도 먼저 에크리튀르의 중계가능성이다.

우리는 이제 <그림 3-2>에서 가지를 수정해야 한다. 첫째로 Da 이중겹침이 되지 않으면 되고, 둘째로 무의식은 타자의 무의식과 연결되지 않으면 된다.

매직메모의 은유는 Da 이중겹침성을 모델화할 뿐만 아니라 그런 이중겹침성 자체의 산출, 시니피앙과 에크리튀르라는 층이 주기적으로접촉/떼어냄을 되풀이함으로써 Da 산출되는 형태도 보여준다. 데리다에 의하면 흔적은 자신의 주기적 말소를 행함으로써만 자신이 기재되는 공간을 산출한다. 기원에서부터, 최초의 각인인 <현전>에서부터 흔적은 반복과 말소, 독해가능성과 독해불가능성이라는 이중의 힘에 의해 구성되고 있다.”

[우편엽서] 2부는 전이를 주제로 삼는다. 데리다는 텍스트에서 프로이트가 1920년대에 발표한 [쾌락원칙을 넘어서] 주로 독해하고 있다. 데리다에 따르면 프로이트는 책에서 사변에 대해 사변하고 있다. 여기에서 사변은 칸스터티브와 퍼포머티브의 상호조응을 뒷받침하는 구조, 어떤 종류의 에크리튀르의 조작 의해 특징지워진다. 데리다의 프로이트 독해가 타당한지 아닌지는 차치하고, 데리다에 따르면 사변의 가능성 자체가 전이=우편에 의해 열린다. 전이에서의 mis 없다면 초월론성 또한 생기지 않는다.

사변에 대한 [우편엽서] 2부의 논의는 끝이 없는 분석이라는 문제계와 직결되고 있다. 끝이 없는 사변은 전이에 의해 열린다. 그러나 전이는 항상 이미 전이절단 수도 있다. 혹은 있어야 한다. 이런 전이/전이절단 운동 자체가 이미 [우편엽서] 기입되어 있다. 여기에는 매우 복잡한 중첩구조가 준비되어 있다.

생각에 데리다는 [우편엽서]에서 자신을 둘러싼 전이를 보다 중층화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집단을 확산시키는 , 데리다파의 전이를 점점 많이 전이절단으로 일탈시키려고 애썼다. ‘자크 데리다라고 서명된 텍스트는 점점 증식하여 이제는 어느 누구도 전모를 모른다. 데리다파의 재응용은 파산하고, 결과로서 전이집단 또한 산종되고 분할되고 전이되어간다.

고명은 인용부호의 욕망에 의해 끝없이 고유명화되고, 전이단절의 자유로움은 항상 전이집단의 고정화로 떨어지게 된다. 거기서 존재론적 탈구축과 우편적 탈구축, 장소Ort 장소 Khora 경계는 다시 애매해질 것이다. 그리고 1980년대 이후의 데리다가 그런 욕망을 얼마나 유효하게 탈구할 있었는지, 성패는 따로 문제시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본서는 이제 그와 같은 탐구로도 나아갈 없다. 본서는 예고된 물음의 답에 도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너무나도 데리다적인 배달미스는어쩌면 본서의 프로그램이 처음부터 품고 있었던 구조적 문제에서 기인하고 있다.

나는 그의 유령이든 우편이든 호출이든 언어의 구체적 지시대상을 기본적으로 인용부호에 넣고 기능문제에만 논의를 집중시켜왔다. 하지만 이런 독해법은 지금 확인한 대로 데리다의 고명을 전부 고명으로서가 아니라 일종의 고유명으로 간주할 것을 요청한다. 따라서 나는 데리다의 우편 대해서는 말할 있지만, 은유가 불러일으키는 연상네트워크에 대해서는 항상 부정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것은 데리다파의 욕망 자체이다.

데리다파의 문제를 다루기에는 나는 너무나 깊이 데리다에 전이되어 있다. 아니 정확히는 그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 ‘전이 대해 생각한다는 자체가 내가 얼마나 데리다파적인지를 웅변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아마 나는 이제 산종의, tranche-fert 금지를 해제해야 것이다. 그러므로 갑작스러울지 모르지만 작업은 이제 중단하지 않으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