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의 출발점은 음성중심주의를 근저에서 떠받치고 있는 ‘써져 있는 것 (글자)’을 둘러싼 문제.
후기의 윤리에 관한 고찰도’음성parole’과 ‘적기ecriture’의 대립을 둘러싸고 전개.
‘파롤’은 대상이 눈앞에 뚜렷하게 현실과 함께 나타나는 상태,
생생하게 현전하는 상태와 연결.
‘에크리튀르’는 로고스 및 체계화된 지식에 연결.
‘음성중심주의’란 그런 ‘에크리튀르’와 대비되는 ‘파롤’이 인간의 사고나 활동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는 견해.
데리다는 ‘에크리튀르’는 단순히 ‘파롤’로부터의 파생물이 아니라 사실 ‘파롤’을 근저에서 지배하는 것이라고 지적.
‘에크리튀르’와 ‘파롤’
요헨 회리슈 (Jochen Horisch): 소설은 생생한 현실을 그대로 재현한다기보다 일정한 약속에 기초하여 리얼리티를 만들어 냄.
우리의 지각도 사실 기호적으로 구성되어 있을 수 있음.
즉 ‘에크리튀르’로 ‘파롤’이 구성되어 있을 수 있음 (?). 소크라테스의 파롤과 달리 플라톤의 [대화편]은 에크리튀르.
예수의 파롤과 달리 [성경]은 에크리튀르.
‘생생한 파롤’을 중심으로 에크리튀르가 증식하고 ‘진정한 생생한 파롤’의 탐구에 동기가 부여됨.
생생한 경험을 중시하는 자세와 죽은 문자에 천착하는 자세는 사실상 표리일체.
‘음성중심주의’를 ‘에크리튀르’가 떠받치고 있는 구조.
파롤과 에크리튀르의 관계는 데리다의 초기 저작인 [목소리와 현상]이나 [그라마톨로지]에서 집중적으로 논의.
이 밖에도 [에크리튀르와 차이]에서도 논의.
‘그라마톨로지’란 ‘적혀 있는 것에 대한 학’.
[그라마톨로지]는 루소의 [언어기원론]과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를 비판적으로 검토.
둘 다를 묶는 ‘미개사회’에 대한 서구인의 시선을 문제 삼은 저작.
데리다의 루소에 대한 비판은 루소의 ‘자연언어’조차도 에크리튀르에 의해 포맷되었다는 점.
학자의 에크리튀르 속에 구축되어 온 ‘순수성’을 재현하고 있을 가능성.
데리다는 언어의 원본 형태인 음성을 문자로 보완된 형태로만 인식할 수 있을 뿐이라는 역설적인 현상을 ‘대체보충supplement’
개념으로 설명.
원초의 파롤이 서자적인 기호의 보완에 의해 재현된다고 할 경우 정작 ‘본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며,
원래 존재한 것인지조차도 알 수 없음.
오리혀 ‘본체’
대신 서자적인 기호가 현전하는 형태.
그런 단순한 보완을 넘어선 ‘대리(대체)’의 의미가 담겨져 있기에 데리다와 관련해서는 ‘대체보충’으로 번역.
현대사상과 데리다
데리다는 이 문제를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와 [야생의 사고]에서도 찾아냄.
구조주의의 선구자인 레비스트로스의 논의를 데리다가 [그라마톨로지]에서 ‘탈구축deconstruction’한 것이 포스트구조주의라고 불리는 새로운 트렌드의 계기.
‘탈구축’이란 어떤 개념의 윤곽을 그려 내고,
그것이 의존하여 서 있는 전제들을 밝혀냄으로써 이와 동시에 그 한계를 드러낸다는 것.
아직 문자가 없는 사회에 대한 레비스스토스의 시선 속에는 루소가 야생인에게 보낸 시선과 겹치는 것이 있다고 데리다는 지적.
‘에크리튀르 없는 사회’라는 관념 자체가 서구 사회에서 형성된 것.
원래 다른 ‘문화’를 관찰하여 기록하여 책으로 만든다는 행위 자체가 서구의 에크리튀르에서 생겨난 것.
데리다는 문화인류학에 내재하는 자기모순을 지적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안에서 형성된 에크리튀르를 통해서만 ‘생생한 파롤’에 접근할 수 있을 뿐이라는 서구적 주체가 품고 있던 문제 일반을 부각.
사르트르를 서구중심주의라고 비판한 레비스트로스는 당시 탈서구화의 관점을 가장 첨예하게 추구한 사상가.
그런 그의 에크리튀르가 자신의 에크리튀르를 통해 서구적 에크리튀르의 외부를 탐구하려고 한 루소의 자기모순을 더 구체적인 형태로 반복하고 있는 것.
이는 서구 철학,
사상에 있어서 근본적인 문제.
데리다는 양자의 텍스트를 세세하게 분석함으로써 이를 밝힘.
데리다와 포스트콜로니얼
데리다의 이런 문제 제기는 포스트콜로니얼리즘으로 계승.
그러나 스피박 (Gayatri Chakravorty Spivak)은 데리다도 어느 정도 자각적으로 서구중심주의에 머물러 있다고 주장.
현상학과 데리다
에크리튀르의 대체보충 작용 없이도 모든 사람이 기하학의 보편적 구조를 볼 수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은 없음.
우리는 기호를 통해서만 선험적 구조에 접근할 수 있을 뿐.
이것이 바로 ‘파롤/에크리튀르’를 둘러싼 문제.
초기 데리다는 기하학의 원창설Urstiftung의 생생한 경험을 재현하려고 끈질기게 시도한 후설의 에크리튀르를 탈구축적으로 독해하며,
선험의 기호적 성격을 밝히고,
그것을 돌파구로 삼고자 함.
데리다는 후설의 현상학적 환원을 기호론적 관점에서 의문.
하야시 요시오에 따르면,
데리다는 ‘현상학적 환원’이 서양철학사에서 갖고 있는 의의를 충분히 평가하며,
“그 환원이 [논리학 연구]에서의 기호의 ‘단순화’
혹은 ‘순수화’에 결정적으로,
근저에서 입각한 것임을 나타내고”
있음. ‘순수화’가 의미하는 네 가지 요점.
첫 번째,
‘기호’에서 ‘지표작용’을 구별(환원). 두 번째,
‘표현’의 순화.
세 번째,
‘표현’으로부터 ‘전달작용’과 ‘표명=고지작용’을 ‘환원’.
네 번째,
실재적 세계와 타자에의 관계를 사상한 ‘고독한 심적 생활’에서 순수한 ‘표현’의 층 출현.
기호를 둘러싸고
후설은 ‘현상’이라는 양파의 껍질을 까 보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가장 핵심에 있는 순수한 의미가 발견된다고 상정하고 논의 진행.
그러나 우리의 사고는 언어를 중심으로 하는 ‘기호’에 의해 구성되며 기호의 작동 없이 완전한 표상을 할 수 없는 게 아닌가,
의미작용을 결여한 동물과 같은 수준의 막연한 지각 표상만 갖고 있을 뿐인 게 아닌가라는 의문.
데리다는 이를 철저히 파고듦 (기호는 근원적으로 허구에 의해 작동되는 것이다).
후설은 안/밖, 실제/허구의 구별을 전제로,
전pre표현적으로 선험적으로 실재하는 의미의 층을 찾아내려고 함.
데리다는 그런 구별에는 명확한 근거도 없고,
후설이 기호론적인 ‘환원’에 의해 찾아내려고 하는 ‘순수한 의미의 층’도 결국 기호의 조작으로 만들어진 허구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
현상학적 환원을 하려고 하는 주체는 기호의 반복적 구조 속에 사로잡혀 있음.
데리다는 이것을 후설의 논의에 입각해서 밝히고자 함.
존재와 목소리
하이데거의 경우 ‘존재’는 주체의 의미 부여 작용을 넘어선 더 근원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데,
후설의 경우 주체 앞에 ‘대상’으로서의 ‘현전화’한다는 것.
데리다에 의하면 현전화는 ‘목소리’라는 형태로 수행됨.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관계가 없으면 어떤 사물도 내게 의미 있는 대상=존재자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음.
‘말하는 주체’가 ‘자신이 얘기하는 것을 듣는다’는 것이,
자기 자신과 대상의 존재를 확립하고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현전화시키는 기점이 되고 있다고 간주.
달리 말하면,
자아의 자기 자신의 순수한 내면에서의 대화,
자아의 자기 탐구가 모든 것의 근원.
데리다는 이것을 ‘음성로고스주의’라고 부름.
‘근원의 대체보충’
데리다:
“형이상학의 역사는 절대적인 ‘자신이 말하는 것을-듣고-싶다’는 것이다.
이 무한한 절대가 그 자신의 죽음으로서 등장할 때,
이 역사는 닫힌다.
차연 없는 목소리, 에크리튀르 없는 목소리는 절대적으로 살아 있는 동시에 절대적으로 죽어 있다.”
‘신의 목소리’와 함께 ‘생생한 현전’을 체험하려면,
주체는 그때까지의 자기를 희생하고 죽음을 경험해야만 함.
‘목소리’가 서구 형이상학의 역사와 정신=영혼의 운동을 산출하는 것.
그런 데리다의 관심의 토대가 [목소리와 현상]과 [그라마톨로지]에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