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13일 월요일
타인의 얼굴: 레비나스의 철학 (강영안, 문학과 지성사, 2005) 중 5장 책임과 대속적 주체: [존재와 다르게 또는 존재 사건 저편에]를 통해 본 레비나스의 후기 철학
레비나스는 형이상학적 사유를 윤리학과 동일시하고 윤리학을 일컬어 ‘제일철학’이라고 부른다… 그의 말은… 존재 중심적 사고를 벗어나 존재 저편, 존재와 다른 차원에서 나 자신의 고유함과 타인의 의미를 이해해보자는 것이다.
1. 존재와 다르게 또는 존재 사건 저편에
니버의 윤리학과 마찬가지로 레비나스의 윤리학도 일종의 ‘책임윤리학’이다… 윤리적 의미는 책임이 ‘타인을 위한 책임’일 때 비로소 획득된다. 이렇게 획득된 책임은 다시 사회 정치적인 제도 속에 확인되는 정의의 기초가 된다.
2. 나의 책임과 존재 모험
나의 존재는… ‘자기중심주의’가 일차적 특징이다.
자기 존재를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은… 모든 존재자의 존재에 공통된 성향이다… 여기에는 윤리가 없다. 강자의 법이 적용될 뿐 타인에 대한 존경과 책임이 없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존재를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 가운데서 자신을 인식하고 파악하며 자신을 확인한다. 여기서 ‘자기성ipseitas’이 성립된다… 자기 자신 속에서 자기와 관계함으로써 인간은 타인과 바꿀 수 없는 자기 고유의 내면성을 얻게 된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자기성’과 ‘자기 동일성’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 과정이고 끊임없이 자신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에게 단순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제로 주어진다.
근원적인 자유의 긍정은 나의 행복뿐만 아니라 책임의 ‘과제’를 함축한다. 내가 이때 짊어지는 책임은 타인에 대한 책임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나 자신에 의한 책임이다. 나는 나의 존재를 나의 것으로 책임진다. 나는 이 존재의 책임, 존재의 무거움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한다. 이것은 결국 타자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만든다.
나는… 세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역설적이게도 세계에 대한 의존성을 통해 나는 비로소 나의 독립성, 나의 자유를 확보한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나는 오직 내 안에서 나를 실현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세계 안에서의 나의 존재 실현 노력은 한마디로 ‘자율성’이란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전통적인 자유 개념과 책임 개념은 지금까지 서술한 나의 자기 실현과 존재 유지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자유 개념과 나의 자유에서 출발한 책임 개념으로 타인과의 관계, 즉 레비나스가 말하는 윤리적 관계가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3. 존재 유지 노력과 타인과의 관계
1인칭적 관점에서 볼 때 타인과의 관계는 결국 나의 존재 유지의 연장으로밖에 볼 수 없다는 것이 레비나스의 논지이다… 히틀러와 독일 국가사회주의의 만행은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타인을 제거하고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자 노력하는 존재 경향의 확대에 지나지 않는다고 레비나스는 본다.
타인을 수단으로 삼고 나의 지배 아래 두고자 하는 욕망은 폭력과 갈등, 전면적인 전쟁의 근원이다.
전쟁은 세계 내에서 생존을 위한 노력의 일환인 노동과 유사성이 있다… 노동과 전쟁은 둘 다 상대방의 개체성과 인격성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전쟁은 이런 의미에서 세계 안에서의 인간의 노동의 연장이다.
어떻게 타인과의 평화로운 삶이 가능한가? 가능한 하나의 방법은 홉스의 제안과 비슷하게 나의 생존권, 나의 존재 유지 권리를 제한하는 길이다.
개인간의 평화든 정치적 질서에 의한 평화이든 평화를 이성적인 계산에 의해 가능한 것으로 보는 입장을 레비나스는 전형적인 서구의 평화 개념의 핵심으로 생각한다.
갈등 상황에 처한 개별적 주체는 이성적, 보편적 인식에 자신을 종속시킴으로써 개별성을 사상하고 평화로운 보편적인 질서에 참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개인의 의지는 개별성을 초월하는 보편적 법칙에 순종할 때 그때 비로소 자유롭게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타인의 타자성에 대한 진정한 존경이나 인정이 사실상 결여되어 있다. 그러므로 레비나스는 자기 중심적인 사회 모형에 근거한 정치는 ‘윤리가 결여된 정치’라고 단언한다… 정의가 없는 평화는 진정한 평화일 수 없다. 국제 관계에서도 이와 같은 상황은 비슷하다.
평화의 문제는 정치적인 문제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른바 ‘정치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레비나스는 본다… 그러므로 1인칭적 관점을 벗어나 2인칭적 관점에서 존재를 해석하고 나와 타인의 관계를 다시 근본적으로 검토해보아야 한다는 것이 레비나스 철학의 핵심이다.
4. 타인의 얼굴
레비나스가 말하는 윤리적 사건은 한마디로 타인의 얼굴의 출현이다… 타인은 그야말로 “벌거벗음 가운데 나타나는 얼굴”이며 “자기 자신에 의한 현현”이며 “맥락 없는 의미화요” “전체성의 깨뜨림”이다. 타인은 단적으로 나에게 “낯선 이”이다.
얼굴은 나의 표상과 인식, 나의 자유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그 자체 존재하고 그 자체 스스로 드러내 보여주는 타인의 존재 방식이다. 얼굴은 나의 표상과 나의 자유, 나의 주도권의 실패를 뜻한다. 얼굴로 나타나는 타인은 포착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나의 노력을 끊임없이 빠져나간다.
얼굴이 가진 이러한 모습을 레비나스는 ‘외재성’이란 말로 표현한다.
얼굴은 레비나스에 따르면 밖에 있다.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것으로 우리에게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존재, 우리의 세계 안에서는 어떠한 지시체도 찾을 수 없는 ‘외재적 존재의 현시’를 레비나스는 한마디로 ‘얼굴’이라 부른다.
얼굴의 “벌거벗음”은 ‘시선’과 ‘말’을 통해 구체화된다.
레비나스는 “동일자[나 중심의 존재 유지 노력]를 문제삼는 일, 동일자의 자기 중심적인 자발성 안에서는 가능하지 않는 이 일은 타인을 통해서 일어난다. 나의 자발성을 타인의 현존으로 문제삼는 일을 우리는 윤리라 부른다. 나에게로, 나의 생각과 소유로 환원할 수 없는 타자의 이방성은 나의 자발성을 문제삼는 일로서, 곧 윤리로서 완성된다”고 말한다. 또는 “윤리는 자유가 자기를 정당화하는 대신 스스로 자신이 자의적이며 폭력적임을 느낄 때 시작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윤리는 나의 자유가 문제시될 때 그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서 앞에서 본 1인칭적 의미의 책임, 곧 자신의 존재를 짊어져야 하는 ‘홀로 서기’의 책임과 달리 타인에 대한 책임 개념이 비로소 등장한다.
타인을 위해, 타인에 의해 내가 책임적 존재가 된다는 것은 곧 내가 응답적 존재가 된다는 뜻이다… “여기 내가 있습니다”는 레비나스에 따르면 모든 객관적인 서술에 앞서, 내용과 정보를 지닌 어떤 소통이라도 그 이전에 전제하는 ‘첫 언어’이다…레비나스는 이것이 자신의 철학 전체를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5. ‘타인에 의한, 타인에 대한 책임’과 대속의 의미
윤리의 근거로서의 레비나스의 책임 개념은 ‘타율성’에서 출발한다… 타인에 대한 나의 책임은 나의 자유에 선행한다.
타인의 일깨움은 나를 높이 세워주고 나를 고귀한 존재로 만든다… ‘타인에 의한’이 지닌 이런 차원을 레비나스는 ‘내 안에 있는 타자’ ‘동일자 안의 타자,’ 또는 ‘내재 속의 초월’이라 부른다… 내 안에 들어온 타자는 내 안에서 타자를 위해 짐을 짊어질 수 있도록 나를 키워낸다. 이것을 레비나스는 ‘모성성’이라 부른다.
대속은 타자에 의해 책임적 존재로 지정받은 내가 타자를 ‘위한’ 책임적 존재로 세워지는 모습이다.
레비나스는 그러나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내가 타인의 책임을 대신하는 것은 심지어 그의 잘못에 이르기까지 범위가 확대된다… 주체의 이러한 대리 책임에 대해서,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서 레비나스는 ‘속죄expiation’란 말을 붙인다… 타인에 대한 나의 책임은 그러므로 ‘대속적 책임’이다.
메시아는 타인을 위해서 대신 죄짐을 짊어지고 고난을 당하는 자이다. 레비나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타인의 고난을 대신 짊어진 주체의 이념으로 파악한다.
6. 대속적 책임의 실현과 비움의 주체
대속적 책임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가능한가?... 그것은 자신의 책임을 ‘타인을 위한’ 책임으로 구체화시킴으로써 실현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타인에 의해 창조된 이 책임을 타인을 위한 책임으로 스스로 수용하는 일이다. 타인이 나를 부를 때 나는 그 부름에 대답해야 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가능성밖에 없다. 부름을 수용하든지 아니면 거부하면서 타인을 나의 자기 중심으로 환원하는 길밖에 없다. 부름을 거부하는 일은… 책임으로부터의 도피이며 이 도피를 레비나스는 윤리적 의미의 ‘악’이라 부른다… 칸트가 윤리적 악의 근거를 인간의 자유에서 찾았다면 레비나스는 타인에 대한 나의 책임 유기에서 찾는다.
그렇다면 악과 반대되는 차원은 무엇인가? 그것은 선을 행하는 일이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타인의 호소를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타인의 수용은 자신의 문을 열고 타인을 영접하는 ‘환대’로 나타난다.
줌의 핵심에는 신학적 용어로 말하자면 케노시스kenosis가 있다. 자신을 완전히 비워 자기 자신을 타인의 고통을 위해 내어놓는 차원이다… 외상 없이, 내 살갗 속에 고통 없이 줌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참된 줌, 참된 선물, 참된 사랑은 레비나스가 자주 쓰는 표현을 따르자면 ‘존재 사건으로부터 벗어남,’ 곧 ‘이익 추구를 벗어남’이다. 이때 비로소 반대 급부를 기대하지 않는 사랑, 순수한 줌이 가능하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책임은 “자기에도 불구하고, 자기에서 출발해, 타인을 위해” 대속의 자리에 서는 것이고 책임적 주체는… 자신이 경제적 추구와 존재 유지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포기하면서 자기 자신을 이미 먼저 선택받은 자로, 타인의 고통을 위해 자신의 입에 있는 빵조차 타인을 위해 내어놓는 존재이다.
7. 제삼자와 책임: 정의와 국가 제도
삼자의 등장은… 평등가 공의에 따라 관계들이 조정되는 정의로운 공존 체제 구축을 요청한다. 이런 의미에서 삼자는 분배적, 사회적 정의의 시작이다. 책임은 여기서 법으로 전환된다. 내가 책임져야 할 원거리의 삼자, 미래의 삼자는 체제와 구조, 그리고 이들의 총체인 국가의 매개를 통해 효율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국가는, 전체주의 국가와 달리 타자에 의한, 타자를 위한 책임의 정신 아래 운영되는 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등장한다. 정의로운 국가의 구축 없이는 타인에 대한 우리의 무한 책임은 그 효력을 잃고 만다.
(그러나) 국가는 익명적이고 보편적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타자의 고유성에 무관심하고 이로 인해 의도와 상관없이 개인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 이것을 일컬어 레비나스는 ‘정치의 드라마’라 부른다…. 따라서 사회 정치적 체제와 구조는… 늘 비판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지속적 혁명’ ‘틀의 파괴’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논의를 통해서 책임의 윤리학은 자기 실현의 1인칭적 주체의 성립을 기초로 2인칭적 타인에 대한, 타인에 의한 책임, 그리고 나아가 ‘만인의 만인에 대한 책임’ 개념으로서의 3인칭적인 책임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나타났다.
8. 응답으로서의 윤리학
윤리학에 대한 철학적 반성은 통상 “윤리적이란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왜 윤리적이어야 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윤리적일 수 있는가,” 이 세 가지 물음으로 집약된다. 이 세 가지 물음은 윤리는 언제나 행위와 관련되어 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런데 행위는 언제나 행위를 실행하는 행위자의 행위이다. 서양 윤리학 전통에는 행위자를 이해하는 두 가지의 상반된 이미지가 있다. 널리 퍼져 있는 이미지는 인간을 일정한 목적을 위해 어떤 이념, 어떤 생각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제작자’로 보는 것이다… 두 번째 상징은 인간을 일정한 법 아래 살고 있는 ‘시민’으로 보는 것이다.
이 두 이미지에 반해 레비나스와 앞에서언급한 리처드 니버는 (그리고… 한스 요나스는) ‘응답자로서의 인간man-the-answerer’을 대안으로 제안한다. 인간을 ‘책임적 존재’로, 윤리를 ‘책임적 행위’로 보자는 것이다… 인간을 응답자로 보는 관점에서 책임은 함께 공동체를 형성하는 사람들과 사회적 연대를 구축한다는 것이다.
레비나스의 윤리학은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보았듯이 ‘책임의 윤리학’이다…. 레비나스도 행위보다는 존재, 아니, 행위 이전의 나의 존재,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행위와 존재 이분법 이전의 나의 존재를 그려냄으로써 윤리의 본질을 드러내고자 한다.
타인의 얼굴: 레비나스의 철학 (강영안, 문학과 지성사, 2005) 중 4장 향유, 거주, 얼굴: [전체성과 무한]을 통해 본 레비나스의 중기 철학
1961년 출판한 그의 대표작 [전체성과 무한]에서… ‘분리’를 중요한 개념으로 설정한다. 자기 스스로 섬, 곧 자기 정립은 자신을 타인과 사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고 자신이 설 수 있는 자리를 ‘세계 속에서’ 점유하는 것을 뜻한다. “인간 자신이 곧 존재론”이란 말은 이 점을 드러낸다… 존재자를 인식하고, 파학하며, 소유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가 레비나스가 말하는 ‘존재론’이다.
거주와 노동에는 사물을 전체화하고 소유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나(동일자)의 범주와 도식으로 환원하는 이론과 활동(과학, 과학기술, 노동, 문화)을 레비나스는 ‘존재론’이라 부르고 있다. 존재론은 전체성의 이념과 자기 실현의 이념, 이 두 축 위에 서 있다.
존재론은 그러므로 단순히 거부 대상이 될 수 없다. “인간 자신이 곧 존재론”이라면 존재론을 단순히 거부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뿐더러 의미도 없다… [전체성과 무한]이 무한자의 이념을 바탕으로 한 ‘주체성의 변호’라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레비나스가 변호하는 주체의 주체성은 앞에서도 강조했듯이 ‘타인을 영접하고 손님으로 받아들이는 행위’에서 성립한다. 타인을 영접하고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레비나스가 말하는 ‘초월’이다. 사물을 인식하고, 노동하고, 미래에 대해 불안을 갖는 것은 부차적이고, 타인을 영접하고 손님으로 대접하는 것이 주체의 주체성을 성립하는 일차적 조건이다.
타인과의 거리는 타자가 타자로서 나에게 환원될 수 없는 ‘외재성’을 갖듯이 바깥과 구별되는 ‘내면성’이 나에게 있을 때 성립한다. ‘내면성’과 ‘외재성,’ 나와 타인, ‘동일자’와 ‘타자’ 사이에 거리가 형성되는 것을 레비나스는 ‘분리’라고 부른다. 내가 나로서 독립성을 가짐은 다른 것과 분리된 고유의 내면성을 가짐을 뜻한다. 세계 안에서의 인간의 존재 방식은 하이데거가 그리는 것처럼 ‘이미 자기 밖에 나와 있는 존재’가 아니다.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안이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 내면성이 없는 곳에는 밖으로 향한 초월이 없다. 초월은 언제나 ‘동일자와 타자의 분리’를 전제한다. 분리가 없이는 초월이 없다. 그러므로 초월 운동은 ‘자기 복귀’를 전제한다. 자기 복귀, 내면성의 형성, 또는 자아의 자기성의 확립을 레비나스는 ‘향유’와 ‘거주’의 행위로 본다. 향유와 거주는 ‘인간이 곧 존재론’이란 사실을 해명할 뿐 아니라 동일자와 타자, 내면성과 외재성의 분리에 구체적인 내용을 채워준다.
1. 삶에 대한 사랑과 향유
음식, 공기, 햇볕, 빛, 잠, 심지어는 생각, 이와 같은 것은 ‘표상의 대상’(후설)이나 삶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 또는 ‘도구’(하이데거)가 아니라는 사실을 레비나스는 강조한다. 음식을 먹고, 맑은 공기를 마시고, 좋은 음악을 듣고, 대화를 나누고, 일을 즐기는 것은 삶의 과정이고 삶의 내용이다.
삶을 채워주는 내용과의 관계를 즐김과 누림, 곧 향유jouisance로 보는 데는 하이데거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삶에 대한 염려와 불안은 하이데거에 따르면 세계 안에서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이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염려와 불안보다 즐김과 누림, 곧 향유가 세계와의 일차적인 관계라고 본다.
‘~으로 삶을 산다’는 것은 표상과 반성, 이론과 지식이 있기에 앞서 즐김이요 누림이다. 삶은 결코 벌거숭이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내용이 있는 삶이고 내용을 즐기는 삶이다. 이것을 레비나스는 ‘삶에 대한 사랑’또는 ‘자기애’라 표현한다. 삶은 본질적으로 삶에 대한 사랑이며 자기애이다.
2. 요소 세계
레비나스에 따르면 우리는 사물을 그 자체 고립된 것으로 체험하기보다는 무엇이라 분명히 규정할 수 없이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계로 체험한다. 세계는 원래 사물들의 총체이기보다는 삶의 ‘요소element’이다… 요소로서의 세계는 무규정성을 특징으로 한다. 세계는 쉽게 대상화할 수 없을뿐더러 손쉽게 다룰 수 있는 도구로도 환원할 수 없다.
요소에는 내용은 있지만 그것을 담을 형식이 없다. 이것을 일컬어 레비나스는 ‘형식없는 내용’이라 부른다. 요소는 얼굴도 없고 이름도 없다. 그러므로 요소에 대해서는 주체와 대상 관계를 형성할 수 없다. 요소에 에워싸임으로써만 우리는 요소와 관계할 수 있다…. 따라서 요소는 이름을 가진 하나의 특정한 실체로 접근할 수 없다. 이런 뜻에서 레비나스는 요소를 ‘실체 없는 성질’이요 ‘떠받침 없는 성질’이라고 규정한다.
요소 세계는 사람이 사는 삶의 환경milieu이다. 세계, 요소, 환경은 여기서 동의어로 쓰인다… 물, 공기, 따뜻함, 이와 같은 것들은 사물로 환원할 수 없다.
삶의 세계가 우리에게 ‘요소’라면 향유의 차원에서 만나는 사물들의 존재를 질서 정연한 목적성의 체계에 따라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요소로서의 세계는 소유로서의 세계에 선행한다.
3. 향유와 주체의 주체성
향유를 사람이 세계와 가지는 일차적 관계로 보고 세계를 사물의 체계가 되기 이전의 ‘요소적’ 세계로 보는 것은 주체의 주체성을 새롭게 규정하기 위한 것이다. 요소적 세계와의 향유적 관계를 통해 레비나스는 주체의 근원적 존재 방식을 드러내보고자 한 것이다.
1. 주체의 주체성은 향유에 기원을 둔다… 주체성의 기원인 이 향유는 순수 의존성도 순수 독립성도 아니다. 향유는 ‘의존성을 통한 독립성’이다… 주체는 의존성을 독립성으로 바꾸고 세계를 자신의 세계로 만들어간다… 향유의 주체는 의존성 가운데서 독립해 있다. 주체는 다른 것과 분리돼 있다. 분리는 주체를 다른 주체와 구별하는 근거이다. 그런데 분리는 자동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향유를 통해 발생한다… 이것이 좀더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사건은 자아를 통한 ‘전체화’이다. 향유 가운데 자아는 자신을 에워싼 세계를 자신의 세계로 변형시키기 시작한다… 향유는 나 자신이 나 자신으로 실현하는 과정이고 이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하나의 개별적 인격으로 등장한다.
2. 주체의 내면성과 유일성은 향유를 통해 구성된다. 나와 타인, 동일자와 타자는 향유를 통해 주체의 내면성이 형성될 때 그 때 비로소 실제로 분리된다… 향유를 통해 내면성이 형성되고 내면성을 통해 ‘자신’과 ‘자신 아닌 것’ 사이의 분리가 출현한다. 따라서 향유를 통해 자아가 비로소 출현한다고 레비나스는 보고 있다… 향유는 ‘자신 안으로 물러남’이고 자신으로의 귀환이다. 향유는 자아의 자기성을 형성한다… 향유를 통한 자아의 자기성을 바탕으로 해서 이제 누구와도 맞바꿀 수 없는 자아의 유일성이 성립된다. 에펠탑이나 모나리자처럼 이와 비슷한 유의 견본이 오직 하나 있다는 데 자아의 유일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자아의 유일성은 어떤 유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 어떤 개념으로도 담을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고 레비나스는 생각한다. 보편과 개별의 구별을 뛰어넘어 향유하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에 자아의 유일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개체와 개체를 구별해주는 개별성의 원리는 질료가 다르거나(아리스토텔레스) 다른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라이프니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누리는 향유와 행복에 있다. 레비나스는 향유야말로 진정한 ‘개별화의 원리’라고 주장한다.
3. 향유와 행복이 ‘개별화의 원리’이며 향유를 통해 각 주체의 주체성이 성립된다는 사실은 각 인격에는 어떤 무엇으로도 환원할 수 없고 소외시킬 수 없는 고유성과 존엄성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내가 존재의 주체가 되는 것은 단지 내가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있는 것도 아니고 존재의 짐을 스스로 짊어진다는 사실에 있는 것도 아니라 내면성의 확보를 통해, 즉 향유를 통해 단순한 존재를 초월한다는 사실에 있다. 이와 같은 존재 초월이 가능한 존재가 ‘인간’이다… 개인은 저마다 향유의 주체로서 신비를 지니고 있다. 개인은 종족으로, 혈통으로, 또는 사회 집단으로 또는 누구와의 관계로 환원될 수 없다. 이것은, 나의 나됨(자기성)과 타인의 타자성은 결코 상대화할 수 없는 절대적 성격을 띠고 있음을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인격은 철저하게 다원적이다. 인격은 어떤 명목으로도 전체화할 수 없다는 것이 레비나스 철학의 기본 신조이다.
4. 요소 세계의 무규정성과 내일에 대한 불안
요소 세계에서 맛보는 즐거움은 그러나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만족감을 맛보는 순간, 내일에 대한 불안이 고개를 내민다. 요소 세계 속에 사는 동안 세계는 나에게 무규정성으로, 아무것도 아닌 그 무엇으로, 내가 어쩔 수 없는 대상으로 체험된다.
요소는 현재, 지금 이 순간 나의 향유 속에 현존할 뿐이다. 요소는 나를 떠받치는 기반이고 그것의 익명성, 무규정성으로 인해 나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힘으로 남아 있다. 그것은 마치 얼굴 없는 신처럼 말을 건넬 수도 없고 호소할 수도 없다. 요소의 이와 같은 부정적인 측면을 레비나스는 ‘있음il y a,’ 즉 ‘존재자 없는 존재’라고 부른다.
향유 안에서의 주체의 취약성은 요소로부터 오는 위협 때문만은 아니다. 향유 자체에 주체의 존재를 위협하는 요소가 들어 있다… 향유의 주체는 무엇을 누릴 때 자시이 아닌 다른 것, 즉 타자에 늘 의존해 있다. 주체는 향유의 내용에 대해 절대적 주권을 행사하지 못한다.
향유 속에 자아가 누리는 자유는 그러므로 절대 자유가 아니라 한계 있는 자유라고 레비나스는 보고 있다. 자유의 한계성은 스스로 자신의 출생을 선택할 수 없었다거나 이미 어떤 상황에 처해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한계성이 아니라, 현재 순간의 향유가 향유의 내용이 되어주는 요소 세계의 익명성을 통제할 수 있는 어떠한 수단도 보장해 줄 수 없다는 데서 오는 한계이다.
요소의 위협은 인간에게 두 가지 반응을 일으킨다… 첫번째 반응은 신화적 반응이다. 요소의 무규정적인 불확실성은 신화적 신앙이 뿌리내릴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한다… 거주와 노동은 요소의 위협에 대해서 인간이 보이는 두번째 반응이다. 집을 짓고 거주하며, 노동하는 것은 인간의 자기 긍정, 자기 자신의 독립성을 실현하는 일이다.
5. ‘여성적인 것’과 집과 거주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것, 자기를 환경과 분리하여 자기성을 확립하는 일은 집을 짓는 일 가운데 구체화된다. 레비나스는 [존재에서 존재자로]에서 잠과 휴식을 자기에게로 되돌아오는 과정으로 묘사하지만, [전체성과 무한]에서는 집을 짓고 그 안에서 거주하는 것을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레비나스는 순수의식의 관념론적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주체는 언제나 육화된 주체이다. 주체는 신체로서 거주할 때 비로소 주체로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주체의 내면성은 하나의 신체로서 주체가 언제나 또다시 자신에게 복귀한다는 사실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주체는 집을 통해 거주 주체로서 자신을 세울 때 세계를 관찰하고 세계를 자신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이와 같은 관점은, 사유를 통해 주체의 존재를 근거짓고자 한 관념론과 대립된다… 거주 공간으로서의 집으로의 복귀는 ‘친밀성’으로 묘사된다.
친밀성은 어떠게 가능한가? 그것은 타인의 등장으로 가능하다. 하지만 이 때 타인은 벌거벗은 얼굴로 나를 질책하고 불의를 고발하는 타인의 모습보다는 ‘다소곳이’ 나를 수용하는 타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다소곳이 나를 수용하는 타인을 일컬어 레비나스는 ‘여자’라고 부른다. “여자는 내면으로의 전향, 집과 거주의 내면성의 조건”이다. 레비나스는 부버의 ‘너와 나’의 관계에서 ‘너’는 거주 공간 안에서 관계하는 타인, 곧 여성적 타자임을 강조한다… 여성적 타자의 존재는 거친 현실 속에 말할 수 없는 ‘연약성’과 ‘부드러움’을 심어놓는다.
여성적 타자는 누구인가? 레비나스가 말하는 여자는 현실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여자’일 필요가 없다. 대부분의 경우, 레비나스는 조금 중립적인 뜨스로 ‘여성적인 것’이란 말을 더 많이 사용한다. ‘다소곳한 타자’는 ‘향유’ ‘거주’ ‘신체성’ 등과 같이 하나의 철학적 표현법일 뿐이다. ‘다소곳한 타자’는, 만일 여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남자일 수 있다. 이것은 내면으로의 전향과 거주를 가능케 하는 타자의 친밀성, 나를 그의 손님으로 수용하는 타자의 너그러운 환대를 표현하는 것일 뿐이다.
6. 노동과 소유
레비나스의 서술에 따르면 주체의 성립과 자기 주장은 거주로 끝나지 않는다. 노동과 소유가 거주에 뒤따른다… 노동과 소유는 거주와 반대로 세계를 정복하고 지배하는 방식이다. 레비나스는 노동을 향유와 대비시킨다. 향유의 경우 주체는 대상을 소유하지 않는다. 향유의 대상은 언제나 무규정적인 요소로 남아 있고 요소 세계는 여전히 주체를 위협한다. 하지만 집을 짓고 그 안에 거주하고 노동함으로써 주체는 요소 세계를 마치 하나의 ‘사물’처럼 소유한다.
노동을 통한 소유를 레비나스는 ‘손’에 대한 분석을 통해 보여준다… 요소 세계의 익명성과 무규정성은 노동을 통해 해체되고 요소 세계는 하나의 사물로서 분명한 의미와 기능을 갖게 된다. 손은 이렇게 노동을 통해 요소 세계의 위협을 차단하고 미래를 예측, 통제한다. 주체가 노동의 결과로서 사물을 소유할 때 요소 세계는 지속성을 가진 사물, 곧 ‘실체’의 세계로 전환한다.
노동과 소유,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거주는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 이것은 해방을 뜻한다… 노동과 소유를 통해 주체는 ‘참여’로 특징지어지는 신화적 세계를 벗어나 자신을 타자로부터 ‘분리’하고 이를 통해 고유한 주체로서 자유를 획득한다. 이러한 자유는 언제나 자기 중심적이다. 노동과 소유는 그 자체로 자기 중심적이다. 타자로 향한 초월이나 타자에 대한 환대가 이 자체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노동과 소유,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해주는 거주가 지닌 두번째 측면이다. 노동과 소유는 모든 것을 자아 속에서 전체화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곧 존재론’이라고 할 때 레비나스가 강조하고자 한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노동과 소유뿐만 아니라 인간의 지식(과학, 기술)도 전체화의 수단이다… 자아는 세계를 대상화하고 세계를 이론적으로 파악하고자 시도한다.
이러한 일련의 행위가 겨냥하는 것은 세계를 파악하고 이해하고 결국 자신의 소유로 지배하기 위한 것이다. 개념화는 손에 거머쥠을 뜻한다. 세계를 거머쥠으로써 자아는 세계를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개념화의 결과인 과학과 그것의 실제적인 적용인 과학 기술은 세계 안에서 자아의 존재 실현을 위한 수단으로 등장한다. 과학과 기술은 자아에게 새로운 힘과 능력을 부여한다. “동일자를 통한 타자의 규정”인 과학과 기술은 중립적이 아니라 하나의 권력 행사라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모든 종류의 권력 행사를 부인하지 않는다. “인간 자체가 존재론”이란 말에는 권력에 대한 인정이 담겨 있다. 지식을 통한 권력 행사는 요소 세계 안에서 인간의 존재 유지 노력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불가피한 것이다.
[전체성과 무한] 제2부에서 레비나스가 펼치고 있는 존재경제론은 후설과 하이데거 철학에 대한 반성을 담고 있다. 레비나스는 후설의 지향성 개념을 수용하면서도 표상하는 행위를 출발점으로 삼지 않고 표상적 지향성에 선행하는 향유와 거주를 더욱더 근원적인지향성으로 이해한다. 표상적 지향성은 레비나스에 따르면 향유와 거주의 지향성을 통해 근거지어진다… 인간 주체성은 의식에 선행하는 신체성을 통해 성립한다는 사실을 레비나스는 강조한다.
향유와 거주에 대한 레비나스의 묘사는 하이데거에 대한 반론도 담고 있다. 삶이란 일차적으로 염려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삶은 레비나스에 따르면 근심과 걱정, ‘존재해야 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즐김과 누림, 곧 향유하는 데 있다. 삶의 내용은 그 자체가 목적일 뿐 도구 전체성 속의 한 부분으로 자리하지 않는다… 삶은 곧 향유라는 것은 또한 초월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내면성의 성립이 선행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것은 하이데거가 인간을 세계 안에 이미 던져진 존재로 볼 때 뜻했던 것과 다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 존재 자체가 이미 초월이다. 인간은 이미 자기 밖에 있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초월이 가능한 근거로서 내면으로의 복귀를 논의한다. 내면성의 성립, 곧 요소 세계와의 ‘분리’와 타자와의 ‘분리’가 없이 어떻게 초월이 가능하겠느냐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동일성의 영역 안에, 동일성을 가능하게 해주는 근거로서 언제나 ‘타자’의 존재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했다. 노동의 가능 조건으로 본 거주의 경우 ‘여성적 타자’의 존재가 고려되었다… 노동의 가능 조건으로서 ‘타자의 현존’을 레비나스는 ‘대화’와 관련시켜 보고 있다… 동일자의 영역, 또는 전체성의 영역으로 환원할 수 없는 ‘무한(무한자, 무한성)’의 차원을 보여주자는 것이 레비나스 철학이 겨냥한 목적이다.
7. 얼굴의 현현
타인의 존재는 나에게 무엇인가? 레비나스는 타자를 나의 동료 이상으로 본다. 타자는 무한자의 계시이고 전혀 새로운 형이상학적 차원을 열어준다… 타자의 얼굴은 우리 ‘밖에서’ 우리의 유한성의 테두리를 깨뜨리고 우리의 삶에 개입한다.
얼굴의 현상은 레비나스에게서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얼굴의 만남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사물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을 열어준다.
얼굴이 자기 스스로 내보이는 방식을 레비나스는 ‘계시’라 부른다. 계시라는 종교적 용어를 쓴 까닭은 얼굴의 현현은 내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타나는 절대적 경험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사태를 일컬어 ‘맥락없는 의미화의 가능성’이라 부른다. 얼굴의 현현은 역사적, 사회학적, 문화적 또는 심리학적 지시 체계로 환원될 수 없는 고유한 의미를 지닌다. 얼굴의 자기 표현으로부터 “의미화는 의미 부여에 선행한다”는 레비나스의 중요한 논제가 나온다.
타자의 얼굴에서 오는 힘은 상처바을 가능성, 무저항성에 근거해 있다. 얼굴이 상처받을 수 있고 외부적인 힘에 대해 저항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바로 이 때문에 얼굴로부터 도덕적 호소력이 나온다… 타자의 곤궁과 궁핑은 하나의 명령으로 나에게 다가온다. 나는 얼굴의 호소를 거절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곧 불의를 자행하는 일이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우리의 행위가 갖는 의미는 타자의 윤리적 호소를 통해 규정된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무저항은 나의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연약성과는 다른 개념이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얼굴은 동정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정의로워야 한다는 요구를 하는 것이다.
타자의 얼굴의 현현은 하나의 모순에 직면하게 만든다. 얼굴은 타자의 무력함과 주인됨을 동시에 계시하기 때문이다. 가장 낮은 것은 가장 높은 것과 결합한다.
얼굴의 현현을 통해 나의 자발성에 제동이 가해진다. 타자의 곤궁과 무력함에 부딪힐 때 나는 내 자신이 죄인임을, 부당하게 나의 소유와 부와 권리를 향유한 사람임을 인식한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죄책의 경험은 나의 자유가 자의적이고 내 자신의 욕구에 기인한다는 의식에서 유래한다. 진정한 죄책 경험은 타자에 대한 ‘욕망desir’에서 비롯된다.
레비나스는 죄책과 실패를 구별하듯이 욕망과 욕구besoin를 구별한다. 욕구는 나에게 결핍된 것을 채우려는 동기에서 우러나오지만 욕망은 “우리가 태어나지 않은 땅에 대한 동경” “눈에 보이지 않는 자”에 대한 그리움에서 생겨난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는 부버가 말하는 ‘너’와 구별된다. 타자는 나와 너의 친밀한 관계 속에 용해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는 나에게 거리를 두고 있고 나에게 낯선 이로, 나의 삶에 완전히 포섭될 수 없는 자로 남아 있다. 각자는 타자에게 ‘낯선 이’다… 타자는 나에 대해서 완전한 초월과 외재성이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는 내가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무한성이다. 이 무한성은 그러나 익명성은 아니다… 타자의 얼굴을 받아들임으로써 나는 인간의 보편적 결속과 평등의 차원에 들어간다.
타자를 처음부터 나와 동등한 자로 생각할 때 타자는 나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뿐더러 나와 마찬가지로 자기 실현을 추구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레바나스는 타자와의 비대칭성, 불균등성이 인간들 사이의 진정한 평등을 이룰 수 있는 기초이고 이런 의미의 평등만이 약자를 착취하는 강자의 법을 폐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타자를 내 집으로 받아들이는 것, 즉 그를 내 손님으로 환대하는 가운데 구체적인 윤리성이 시작되며 내 자신은 내면성, 내재성의 세계를 벗어나 진정한 초월의 주체, 도덕적 주체가 될 수 있다.
8. 인간 존재와 죽음
죽음은 인간 존재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레비나스는 죽음을 무엇보다도 밖으로부터 오는 폭력과의 만남으로 이해한다. 죽음은 우리의 자유를 제거한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으로 향한 존재’로 본다. 하지만 죽음 자체를 인간은 사실로서 경험할 수 없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다만 그 가능성 뿐이다. 이 가능성은 불가능성의 가능성이요, 무의 가능성이다… 존재는 더 이상 확실성이 아니라 내가 내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개척하고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일 뿐이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하이데거와 달리 죽음을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로 보지 않을뿐더러 무의 가능성으로도 보지 않는다… 고통 속에서 느끼는 죽음은 불가능성의 가능성이 아니라 모든 가능성의 불가능성이다.
죽음은 자유의 기초가 아니라 인간의 무력, 그의 부자유의 경험이다. 죽음에 대항해서 인간은 그가 가진 주도권을 모두 상실한다. 따라서 죽음은 본질적으로 알 수 없는 신비요, 절대적 타자성으로부터 나를 지배하는 미래이다. 만일 죽음이 나의 존재에, 나의 자기 실현에 종언을 고한다고 할 때 나의 존재는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가? 레비나스의 대답은 타자를 위한 나의 존재 가운데서 죽음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그로 인해 나의 존재가 무의미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타자는 그의 초월성(외재성) 때문에 마치 죽음처럼 나의 자유를 위협하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그의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과 무력성 때문에 나에게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존재이다.
내가 타자를 선대하고 보살필 때 힘없는 타자를 내가 죽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타자에 대한 사랑이 생기고 죽음에 대한 불안이 사라진다… 나의 유한한 존재, 죽음으로 향한 나의 존재는 ‘타자를 위한 존재’로 바뀌고 이것을 통해 죽음의 무의미성과 비극성은 상실된다… 자기 중심적 존재 의미 부여에서 필연적으로 야기되는 죽음에 대한 불안은 타자를 위한 선행을 통하여 사라지고 만다.
9. 죽음 저편: 에로스와 출산성
출산성은 남자와 여자의 성관계를 통한 수태 가능성을 말한다. 출산성을 통해 시간은 무한성의 차원, 절대적 미래, 폭력과 죽음에 맞서는 무한한 잉여의 차원을 얻을 수 있다. 레비나스에게서 사랑은 언어와 더불어 타자와 관계할 수 있는 방식이다.
사랑, 곧 에로스는 여성적인 것의 출현과 더불어 시작한다… 이론적인 인식을 통해 접근할 수 없는 타자성의 특성을 여성적인 것은 지닌다. 레비나스는 이 타자성을 여성적인 것의 본질로 본다.
레비나스는 성애를 남성적인 체험과 관점에서 서술한다.
감추어진 것, 타자적인 것을 찾는 여행은 아이의 출산으로 실현된다… 아이는 ‘타자가 된 나’이다. 나는 아버지가 됨을 통해 나의 이기주의, 나에게로의 영원한 회귀에서 해방된다. 아이와의 관계를 일컬어 레비나스는 ‘출산성’이라 부른다. 출산성 안에서 이제 인간은 자신의 한계에서 해방된다… 에로스는 나에게 그리고 동일자의 영역 바깥에 감추어진 미래를 찾는다. 내가 거머잡을 수 없는 이 미래는 아이와의 관계를 통해 구체적으로 체험한다. 아이를 통해 과거는 그 결정적인 성격을 상실한다… 아이를 통해 열리는 미래의 시간은 과거의 짐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이 가능할 수 있도록 나에게 일종의 용서를 베푼다. 따라서 과거에 가능하도록 주어진 것을 새롭게 시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다시 얻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이렇게 말한다. “아이와의 관계, 다시 말해, 힘으로서가 아니라 출산성으로서의 타자와의 관계로 인해 우리는 절대적 미래 또는 무한한 시간과 관계를 맺게 된다.”
2017년 11월 12일 일요일
북핵문제 해결과 한반도 평화의 길: 트럼프 행정부의 대한반도 정책
미주 민주참여포럼 제5차 월례포럼 발표문
2017년 11월 11일 토요일, Oxford Hotel in Los Angeles, CA
서론
2017년 1월 20일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의 제 4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지 약 10개월이 지났다. 트럼프는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나섰을 때부터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있는 지금까지 그의 독특한 정치행위와 대내외 정책이 여전히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중요한 정치적 분석대상이 되고 있다.
특히, 미국우선주의와 보호무역주의 등 그가 대통령 후보시절 내걸었던 공약은 그의 전임자였던 오바마 대통령과 민주당의 정책에 대한 단순한 반대나 전통적인 공화당 외교정책으로의 회귀차원을 넘어서 보다 많은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예측되었는데 대통령 당선 이후에는 국내외 정치적 상황 변화로 인해 처음의 주장과는 달리 변화하는 모습도 보이면서 앞으로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방향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여전히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오늘 이 강연에서는 트럼프의 외교정책,
특히 트럼프 행정부의 동북아와 한반도 정책에 집중해서 이야기를 전개하고자 한다.
트럼프 행정부 외교정책의 특징
트럼프 대통령의 외교정책은 크게 다음과 같은 네 가지 특징을 보여준다. 먼저 그의 ‘미국 우선주의’다. 트럼프는 “미국의 이익과 국가안보에 초점을 맞춘 외교정책을 추진한다”며 ‘미국 우선주의’
외교지향을 명백히 했다. ‘미국우선주의’는 그의 정치적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만큼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두 번째는 ‘고립주의’ 내지는 ‘신고립주의’정책이다. 트럼프는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TPP)
탈퇴를 공식화하고 북미자유무역협정 (NAFTA) 재검토를 지시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의 외교정책을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와 자유무역주의 유지를 위한 미국의 적극적 개입을 기반으로 하는 ‘국제주의 (internationalism)’에서 ‘미국 우선주의 (America First)’와 ‘보호무역주의
(protectionism)’를 기반으로 하는 ‘고립주의 (isolationism)’로 변화시킬 가능성이 매우 높다.
세 번째로 많은 사람들이 트럼프 행정부의 ‘예측불가능성 (unpredictability)’에 주목하고 있다. 트럼프는 미국 역사상 최초로 선출직 또는 임명직 정치경력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또한 사업가로서의 개인적 경험으로 인해 그는 상황에 따라서는 어떠한 사안에 대해서도 타협하거나 예기치 못한 정책으로 입장을 선회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경제우위의 실용적 외교정책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국내문제와 경제문제 중심으로 외교나 안보 문제를 접근할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는 대통령 선거 유세 중 계속해서 지정학적 (geo-political
or geo-strategic) 사고에서 지경학적 (geo-economic) 사고로의 전환을 강조해 왔다. 그의 정치적 성공과 지지기반 유지가 전적으로 미국경제의 재건에 달려있기 때문에 그는 임기 동안 경제 우위의 지경학적 외교정책을 고수할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북대서양조약기구 (NATO)나 한미동맹을 미국무역적자나 방위비분담금 사안과 연계시켰듯이 안보이슈를 경제이슈와 연계시키는 정책을 실행할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 행정부의 한반도 문제 외교안보분야 라인업
트럼프의 외교안보분야를 책임지는 허버트 맥마스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 마이크 폼페오 CIA 국장 모두가 북한에 대해 매우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최근 트럼프가 북한과 전쟁 일보직전까지 갈 듯한 설전을 주고받았을 때 오히려 이들이 나서서 북한과의 대화나 협상을 강조하면서 국면전환을 위해 노력하는 등 정책적 판단에 있어서는 트럼프의 지나친 모험주의적 시도를 견제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가 기본적으로 외교적 해결보다 제재와 압박을 통한 북한핵문제 해결을 선호하고 있다.
한편, 주한 미국 대사에 빅터 차 (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아시아담당국장,
현 조지타운대 교수이자 전략국제문제연구소 (CSIS) 한국석좌)를 내정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아직도 공식적으로 임명되지 않아 그 이유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오고 있으나 아직 정확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트럼프 행정부의 동북아와 대중국 외교
트럼프는 대통령 선거당시 유세나 대통령 당선 직후 인사나 발언을 통해 중국과의 외교적 긴장과 대립을 의도적으로 고조시키는 듯한 정책을 폈으나 마라라고에서 시진핑 중국국가주석과의 1차 정상회담 이후 중국과의 협력을 추구하는 정책으로 많이 바뀌었다. 어쨌든 미국의 대아시아전략은 대중국정책이 핵심이며,
미국의 대한반도 전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중국정책의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또한 동북아의 안정과 한반도의 평화정착을 위해서는 미국과 중국 사이의 협력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트럼프 행정부의 대중국 정책은 북핵문제를 해결하고 한반도의 평화를 달성하기 위해 계속 주시하면서 미중간 협력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북핵 문제
트럼프는 대통령 당선 직후 트위터를 통해 북한의 ICBM개발은 일어나지 않을 것 (It won’t happen!)이라며 북핵과 미사일 개발에 대해 단호히 대처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그 후 채 1년도 안 되는 사이에 북한이 핵과 미사일 시험을 몇 차례나 계속하면서 체면이 완전히 구겨진 상태다. 그 후 트럼프 대통령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북한에 대해 매우 강력하고 호전적인 경고메시지를 보내 오고 있다.
트럼프가 손익계산과 협상에 능한 비즈니스맨 출신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북한과의 직접대화나 깜짝협상의 가능성도 없지는 않으나 당분간은 압박과 제재를 통한 강경한 대북정책을 유지할 가능성이 더 높아보인다. 또한 트럼프 행정부는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중국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중국에 대북압박을 계속해서 강하게 요구할 것이다.
베이징에서 이뤄진 며칠 전 미중 정상회담에서도 트럼프는 북핵해결을 위한 중국의 역할을 다시 한 번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당분간은 압박과 제재를 견뎌내면서 핵과 ICBM개발과 완성에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최근 트럼프의 한국방문을 포함한 아시아 순방에 대한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서 북한은 “핵무력건설대업완성”을 향해 더 빨리 질주하겠다고 주장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생각은 핵과 ICBM 완성 후 이를 기반으로 미국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최대한 많은 양보를 얻어내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북한의 핵전략으로 인해 남한은 코리아 패싱이나 통미봉남 등의 입장에 처할 가능성이 많은 상황이다.
한편, 트럼프 행정부도 북한의 계속되는 핵과 미사일 개발에 대한 마땅한 대응책이 없는 상황이다.
경제 제재는 수십년 째 계속되고 있지만 이를 통해 북한정부를 붕괴시키거나 북한으로 하여금 핵을 포기하게 할 가능성은 매우 낮으며, 그렇다고 북한핵시설이나 지도부에 대한 선제적 공격을 단행하기도 리스크가 지나치게 크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래서 지금은 세컨더리 보이콧 등을 통해 북한에 대한 더욱 강력한 제재를 실행하거나 중국의 협조를 이끌어내기 위해 중국을 더욱 더 강하게 압박하는 방법 외에는 새롭고 효율적인 대응방법을 찾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 동안 끊임 없이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 (Strategic Patience)’정책을 비판하면서 대북정책의 전환을 예고해 왔지만 현실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급진적인 대북정책 변화의 가능성은 매우 낮으며 결국 오바마 행정부의 전철을 밟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실적으로 볼 때, 트럼프 행정부가 북핵문제에 대해 실행할 수 있는 정책은 두 가지다. 첫째는 암묵적으로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고, 이렇게 변화된 상황에서 군사적 세력균형을 유지하면서 현상유지 정책을 취하는 것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대북 핵억지력을 강화하기 위한 미국,
남한, 일본 사이의 협력과 동맹강화 방안들이 제시되고 실행될 것이다. 두 번째는 북한과 대화하고 협상해서 북한의 비핵화를 이끌어 내는 것이다. 북한의 요구사항이 이전보다 많아지고 수준이 높아질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북한도 원하는 것을 다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미국과 북한이 어느 정도 선에서 타협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문재인 정부의 역할
이러한 상황에서 남한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전 이명박 정부나 박근혜 정부는 남북관계를 완전히 파탄냈다.
특히 박근혜 정부는 개성공단을 폐쇄하면서 남북경제교류를 단절시켰을 뿐 아니라 남북화해의 상징적 의미와 신뢰를 허물어뜨리고 북한에 대한 중요한 카드를 헛되이 써버린 결과를 가져 왔다.
그렇지만 현 문재인 정부는 남북관계를 복원하고 개선시켜야 할 역사적 책임과 의무를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있는 의지와 역량이 충분하며, 민주와 평화, 통일에 대한 국민의 지지와 성원으로 출범한 정부이기 때문에 정당성도 지니고 있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 자신이 한반도는 “안전하고 평화로워야 한다. 이는 헌법이 대통령에게 부여한 책무이기도 하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또한 문재인 대통령은 국회 시정연설에서 한반도 문제 5대 원칙을 제시했다. 5대 원칙은 한반도 평화정착, 한반도 비핵화,
남북문제의 주도적 해결,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 북의 도발에 대한 단호한 대응 등이다. 문 대통령이 제시한 한반도 문제 5대 원칙의 방향은 바람직해 보인다. 다만 이를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구체적 방법론에 대한 모색이 필요하다.
북핵문제를 둘러싸고 보이는 북한과 미국의 완강하고 배타적인 태도나 한반도 사드배치를 둘러싸고 보이는 미국과 중국 사이의 갈등과 긴장에서도 볼 수 있듯이 지금 문재인 정부는 외교적으로 매우 어려운 입장에 처해 있다.
그렇지만 북핵문제 해결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어렵지만 미국과 북한,
중국 사이의 가교나 중재자 역할을 하면서 한반도에 민주와 평화, 통일을 이룰 수 있는 기초를 쌓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을 수도 있고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이룰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벽돌 한 장을 쌓는 심정으로 작은 일 하나라도 이루기 위한 노력을 해주기를 바란다.
한미동맹과 사드
(THAAD) 문제
트럼프는 대통령 선거유세 당시 한미동맹이나 한국의 핵무장에 대해서도 근본적으로 재검토할 것이라고 공언했었다. 한국이 동맹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있다면서 방위비분담금 문제를 제기하며 한미동맹의 폐지까지 시사하기도 했고 한국과 일본의 핵무장을 용인하는 듯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통령 당선 직후에는 기존의 핵무장 용인발언을 취소하고 한미동맹에 대한 언급도 자제하고 있다.
또한 트럼프는 대통령 선거유세 당시 한반도 주변에 배치된 MD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보이면서 MD 무용론을 제기하기도 했으나 최근에는 MD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MD 재건을 언급하기도 했다. 이러한 측면을 고려해 볼 때,
트럼프 행정부 하에서 한미동맹이나 사드배치 문제의 근본적인 변화는 진행되지 않고 적어도 당분간은 기존 정책이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주한미군 관련 분담금 문제나 사드배치와 유지비용을 둘러싸고 한미간에 새로운 갈등이 형성될 가능성도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위한 제언
트럼프 행정부의 외교정책이나 대한반도 정책을 예측하기는 쉽지 않다.
어떤 행정부나 그 정책을 예측하기는 쉽지 않지만 특히 트럼프의 경우 그가 워싱턴 정가의 아웃사이더로 외교안보에 대한 경험이나 지식이 거의 없고,
그의 새로운 외교정책 구상이 공화당의 전통적 외교노선과도 많이 다르며, 미국을 둘러싼 정치적 상황이 급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점 때문에, 몇 가지 예측이 가능하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트럼프가 외교안보 분야에 대한 전문성이나 경험이 없기 때문에 워싱턴의 관료나 외교관, 군이나 정보기관의 의견이나 주장에 많이 의존할 수 밖에 없으며,
더 나아가 그의 새로운 외교정책 구상이 공화당의 전통적 외교정책 노선에서의 이탈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의 구상을 현실화시키기 위해서는 공화당 주류를 설득시켜서 지지를 이끌어내야만 한다.
이로 인해 단기적으로는 정책의 근본적인 변화보다도 전통적인 외교정책을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한반도 정책과 관련해서는 더욱 그러한데, 벌써부터 이러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대통령 당선 이후, 한미동맹, 사드 문제, 김정은과의 대화 가능성 등 그가 선거유세 당시 했었던 많은 발언들을 취소하거나 부정하고 있다.
또한 트럼프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에 대해서 매우 강경한 입장을 보이고 있지만 그가 사용할 수 있는 카드는 사실상 많이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이다.
북한에 대한 군사력 사용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 행사도 한계가 있는 상황에서 그가 진정으로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을 막고 한반도의 평화와 동북아의 안정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북한과의 대화를 재개해야만 할 것이다.
더 나아가 북한을 실제적으로 변화시키고 국제사회의 책임있는 일원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전의 행정부들이 가졌던 ‘북한붕괴론’의 환상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그가 진정으로 북한의 비핵화를 원한다면 북한의 핵개발 중단 및 폐기와 평화협정을 맞바꾸는 논의를 진지하게 고려하면서 북한과의 직접대화와 협상에 나서야 한다.
그를 위한 출발점은 북한의 핵개발과 미사일 시험의 잠정중단과 한미군사훈련의 잠정 중단을 맞교환하는 형식의 “쌍잠정중단”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내년 2월 평창에서 열리는 동계올림픽에 북한이 적극적으로 참가한다면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남한 정부는 북한의 적극적 참가를 이끌기 위한 구체적 노력을 진행해야만 한다.
북한도 트럼프 행정부를 자극할 수 있는 행동은 최대한 자제해서 대화분위기를 만드는 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지금 북한의 고집에 중국마저도 매우 불편해 하는 상황이다.
북한이 이렇게 국제정세를 무시한다면, 핵은 가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외의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다. 최근 2개월 간 북한이 핵과 미사일 시험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이런 측면에서 보면 긍정적으로 보이지만, 북한의 핵개발 전략이나 대미정책 기조 등을 생각해 볼 때,
다시 핵개발과 미사일 개발을 재개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 이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북한은 문재인 정부의 대화제의에도 응답해야 한다. 남북대화나 남북관계 개선을 북미문제 해결 이후로 미루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한은 어렵더라도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를 위해 미국과 북한을 동시에 설득하는 노력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과 중국사이에서 균형외교 능력을 강화해야 한다. 최근 문재인 정부가 사드 문제 합의와 관련해서 천명한 ‘3불 원칙’과 이를 바탕으로 중국과의 관계회복에 합의한 것은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문재인 정부가 민주주의를 회복시키고 민주정부를 일구어냈던 국민들의 지지와 성원을 바탕으로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담대하고도 현명한 외교정책을 계속 펴나가기를 기대한다.
피드 구독하기:
글 (At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