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성생활의 장치
말하는 성의 상징은 우리 사회를 나타내는 많은 상징 중에서도 주도적인 것.
성은 감추어진 것이 아니라 환한 불과 같은 것.
성이 엄청난 ‘지식의 요청’에서 중심을 차지한 지 벌써 수백 년.
우리의 현재 모습에 관한 물음을 성,
그것도 성-자연보다 오히려 성-역사 또는 성-의미나 성-담론과 관련하여 제기하도록 유도하는 어떤 경향이 수세기에 걸쳐 지속됨.
오랫동안 성을 침묵으로 내몰았고,
늘 성의 억압이라는 견지에서 성의 억압을 통해 성을 검토하도록 한 그 힘은 무엇일까?
사실 이 물음은 되풀이되는 것으로서,
그 곳에 진실이 있으니 가서 진실을 발견하라는 명제의 최신 형태일 뿐.
그러므로 이제 무엇 때문에 성의 진실,
성 안에서의 진실에 대한 이 끊임없는 추구가 계속되어 왔는지 묻는 것이 중요.
진실을 지향하는 이 의지,
이 지식의 요청에 관한 역사를 기술할 필요가 있음.
1 쟁점
서양사회에서 지난 수세기의 역사는 본질적으로 억압적 권력의 작용을 거의 보여주지 않음.
성이 “억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실제로 새로운 주장이 아니며,
정신분석가들이 그렇게 말한 것은 제법 오래 전의 일.
이 연구는 권력의 “이론”보다는 권력의 “분석론”으로 권력관계가 형성하는 특수한 영역과 그 영역을 분석하게 해주는 도구 쪽으로 나아감.
그러나 이러한 권력의 분석론은 “법-담론”적이라고 부르는 표상에서 벗어나는 조건에서만 성립.
그 이유는 본능의 억압이라는 견지에서 이루어지는 분석과 욕망의 법칙이라는 견지에서 행해지는 분석 모두 공통된 권력의 표상을 내세우는데,
이 표상은 결국 권력이 억압적이라면 “해방”,
권력이 구성적이라면 “덫”이라는 대립적인 결론으로 이어지기 때문.
이 표상의 주요한 특징 가운데 몇 가지는 다음과 같은데
‘부정적 관계 (권력과 성 사이의 관계는 부정적 방식으로만 확립될 뿐이다)’,
‘규범의 심급 (권력은 본질적으로 성에 법을 강요하는 것이다)’,
‘금기의 순환 (성에 대해 권력은 다만 금지의 법만을 작용하게 한다)’,
‘검열의 논리 (검열의 논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
비합법적인 것,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서로 연결시켜,
어느 하나가 다른 것의 원인과 결과이게 만든다)’,
‘장치의 단일성 (성에 대해서는 권력이 모든 층위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행사된다’
등이 그것.
왜 권력에 대한 이와 같은 법적 이해방식이 그토록 쉽게 받아들여질까?
권력은 바로 권력 자체의 중요한 부분을 감추는 조건 아래에서 용인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
권력의 성공은 권력 매커니즘 중에서 은폐되기에 이르는 것과 비례.
특히 서양사회에서 권력의 행사는 중세부터 언제나 법으로 표현됨.
그러나 새로운 권력과정은 법이 아니라 기술에 따라,
법률이 아니라 규범화에 따라,
징벌이 아니라 통제에 따라 작동하며,
국가 및 국가기관의 한계를 벗어나는 차원과 형태에 작용.
이제 우리는 수세기 전부터 법적인 것이 갈수록 권력을 코드화하거나 권력에 대해 표상체계의 구실을 할 수 없게 되는 유형의 사회로 진입.
그러나 성과 권력의 관계에 관한 현 시대의 분석에서 아직도 작용하는 것은 이러한 법의 표상.
권력과정의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작용에 주안점을 두고 권력의 분석을 행하고자 할 때 이러한 법과 주권의 이론적 특권으로부터 벗어나야 함.
더 이상 법을 모델과 코드로 간주하지 않을 권력의 분석론을 구축할 필요가 있음.
근대 사회에서는 권력이 실제로 성생활을 법과 주권에 입각하여 규제하지는 않았으며,
“금지”의 효과 하나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실증적인 진정한 성의 “기술”이 엄존.
2 방법
억압이나 법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권력의 관점에서 성에 관한 어떤 유형의 지식이 형성된 과정을 분석해야 함.
푸코는 어느 특정한 국가에서 시민의 복종을 보증하는 제도와 기구 전체로서의 “권력”을 이야기하지 않음.
국가의 주권이나 법의 형태 또는 지배의 전반적 단일성은 오히려 권력의 말단 형태일 뿐.
오히려 권력은 작용영역에 내재하고 조직을 구성하는 다수의 세력관계,
끊임없는 투쟁과 대결을 통해 다수의 세력관계를 변화시키고 강화하고 뒤집는 게임,
이 다수의 세력관계가 연쇄나 체계를 형성하게끔 서로에게서 찾아내는 거점,
이와는 반대로 세력관계들을 서로 분리하는 괴리나 모순,
끝으로 세력관계들이 효력을 발생하고 국가 기구,
법의 표명,
사회의 주도권에서 일반적 구상이나 제도적 결정화가 구체화되는 전략.
권력은 매 순간 모든 상황에서,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느 한 지점에 대한 다른 한 지점의 모든 관계에서 생산되기 때문.
권력은 도처에 있는데,
이는 권력이 모든 것을 포괄하기 때문이 아니라 권력이 도처에서 발생하기 때문.
권력은 제도도 아니고,
구조도 아니며,
몇몇 사람이 부여받았다고 하는 어떤 역량이 아님.
권력은 어느 주어진 사회의 복잡한 전략적 상황에 부여되는 이름.
1 권력은 손에 넣거나 빼앗거나 공유하는 것도 아니고,
간직하거나 멀어지게끔 내버려두는 것도 아님.
권력은 무수한 지점으로부터,
불평등하고 유동적인 관계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행사됨.
2 권력관계는 다른 유형의 관계에 대해 외재성의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유형의 관계에 내재하고…
상부구조의 위치를 점하는 것이 아니라 작용하는 거기에서 직접적으로 생산적 역할을 맡음.
3권력은 아래로부터 나옴…
강력한 지배는 모든 대결 상황의 강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주도권의 효과.
4권력관계는 의도적이면서 동시에 주관적이지 않음…
일련의 목표와 목적 없이 행사되는 권력은 없음.
그러나 이것은 권력이 개별 주체의 선택 또는 결정에서 유래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음.
권력의 합리성을 주재하는 참모본부를 찾으면 안 됨.
5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저항은 권력에 대해 결코 외부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님…
권력관계는 다수의 저항지점에 따라서만 존재할 수 있을 뿐…
이러한 저항지점은 권력망의 도처에 있고,
따라서 권력에 대한 커다란 거부의 ‘한’
장소, 가령 반항의 정신,
모든 반란의 중심,
순수한 혁명가의 권위는 없음…
어느 정도 국가가 권력관계들의 제도적 통합에 기반을 두듯이,
혁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마 이러한 저항지점들의 전략적 코드화.
바로 이 세력관계의 영역에서 권력의 메커니즘을 분석하려고 시도해야 함.
그러면 우리는 그토록 오랫동안 정치적 사유를 현혹시킨 군주-법 체제에서 벗어나게 됨.
성에 관한 담론의 풍부한 생산을 다양하고 유동적인 권력관계의 장 속에 담기 위한 네 가지 규칙:
1 내재성의 규칙 (지식의 기술과 권력의 전략 사이에는 아무런 외재성이 없음)
2 끊임없는 변이의 규칙 (권력-지식 관계는 어느 일정한 배치의 형태가 아니라 “변화의 모태”)
3 이중 조정의 규칙 (가능한 전술의 특수성에 의한 전략의 조정과 가능한 전술을 작동하게 하는 전략적 포위에 의한 전술의 조정이라는 이중의 조정을 생각할 필요가 있음)
4 담론의 전술적 다가성의 규칙 (권력과 지식이 서로 맞물리게 되는 것은 바로 담론.
그러므로 성에 관한 담론의 전술적 생산성과 성에 관한 담론의 전략적 통합성이라는 두 가지 층위에서 성에 관한 담론을 검토해야 함)
3 영역
권력관계에서 성생활은 가장 은밀한 요소가 아니라 가장 많은 활동에 이용될 수 있고 가장 다양한 전략에 대해 거점 또는 연결 지점의 구실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가장 큰 도구성을 갖추고 있는 요소의 하나.
그러나 모든 사회에 대해 유효하고 한결같이 성의 모든 구체적 발현을 대상으로 하는 유일하고 전반적인 전략은 존재하지 않음.
네 가지 커다란 전략의 집합이 18세기부터 구별:
‘여성 육체의 히스테리화’
(여성의 육체는 완전히 성생활로 포화된 육체로서 분석되고,
의료 실천의 영역에 통합되며,
사회체, 가족 공간,
어린이의 삶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삼중의 관계),
‘어린이의 성의 교육학화’
(어린이의 성적 활동이 부당하고 “자연적인”
동시에 “자연을 거스르기”
때문에 위험을 내포한다는 이중적 단언),
‘출산의 사회화’
(경제적 사회화,
정치적 사회화,
의학적 사회화),
‘도착적 쾌락의 정신의학화’
(임상 분석,
행동에 대한 규범화와 병리학화,
비정상에 대한 교정 기술 모색)
-> 히스테리증의 여자,
수음에 빠져든 어린이,
산아제한을 하는 부부,
성도착적 성인이라는 네 인물이 지식의 특권적 대상으로,
지식의 기획을 위한 표적과 정착 지점화됨
근대의 서양사회는 혼인관계의 장치와 겹치고 혼인관계의 장치와 단절하지 않으면서 이 장치의 중요성을 축소한 새로운 장치를 특히 18세기부터 고안해 배치,
그것이 바로 ‘성생활의 정치’.
혼인관계의 장치는 관계들의 상호작용을 재현하고 관계들을 규제하는 법을 유지하는 것이 주요한 목적에 포함되는 반면,
성생활의 장치는 통제의 영역과 형태를 끊임없이 확대하고 늘림.
또한 혼인관계의 장치에서는 “생식”이 가장 중요하지만 성생활 장치의 존재이유는 급증하는데,
그리고 점점 더 전반적으로 인구를 통제하는 데 있음.
18세기에 사회의 기본 단위로서 가치를 부여받은 가족은 성생활의 장치를 구성하는 주요한 요소들이 가족의 두 가지 주된 차원,
즉 남편-아내의 축과 부모-자식의 축 위에서 전개되는 것을 가능하게 함.
가족의 역할은 성생활을 정착시키고 성생활의 영속적 매체를 구성하는 것.
가족은 성생활과 혼인관계의 입체교차로.
다시 말해서 가족은 법과 법적인 것의 차원이 성생활의 장치로,
쾌락의 경제와 감각의 강도가 혼인관계의 체제로 퍼져 나가는 공간.
또한 성생활의 장치에서 가족은 수정.
가속은 성생활을 확산시키는 듯 하나 사실은 성생활이 가족에 의해 반영되고 회절.
가족은 자체의 투과성과 외부 쪽으로의 이 회부 작용 때문에 이 장치에 대해 가장 귀중한 전술적 요소들 중의 하나.
4 시대 구분
억압의 메커니즘을 성생활의 중심에 놓고자 한다면 성의 역사는 두 가지 단절을 전제로 하는데 하나는 17세에 일어났고,
다른 하나는 20세기에 일어났음.
그러나 이 사건들은 17-19세기 사이로 설정되는 긴 억압의 주기와 일치하지 않음.
기술적 측면에서 볼 때,
모든 기술의 계보학은 억압 가설과 일치하지 않음.
오히려 이 확산의 역사에서 두 계기에 의해,
즉 16세기 중엽에 자기 성찰 및 영성 지도 절차가 발전하고 19세기 초에 의학 기술이 출현하면서 창의력이 끊임없이 발휘되었고 방법과 수단이 줄곧 급증.
또한 억압 가설은 성생활의 통제가 가난한 계층을 겨냥했기 때문에 그만큼 더 격심하고 더 면밀했어야 하고,
가장 강력한 지배와 가장 체계적인 착취의 노선을 따라 이 통제가 실행되었다고 주장하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고 무엇보다 먼저 경제적 특권층이자 정치적 지도층인 부르주아 또는 귀족 계급을 대상으로 가장 엄밀한 기술이 고안되어 가장 강도 높게 적용됨.
이와 대조적으로 서민층은 오랫동안 “성생활”의 장치와 무관.
성생활의 정치가 처음으로 쾌락,
담론, 진실, 권력의 새로운 배치로서 확립된 것은 바로 지배 계급.
성은 부르주아지가 피지배계급에게 노동을 강요하기 위해 낮게 평가하거나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어야 했을 육체의 그 부위가 아니었음.
부르주아지의 지배는 부분적으로 육체의 도야에 달려 있었고,
그런만큼 경제 또는 이데올로기의 문제였을 뿐만 아니라 “인체”의 문제.
부르주아지는 육체의 폄하와 성생활의 억압을 의미하고 계급투쟁은 이 억압을 없애기 위한 투쟁을 함축한다는 생각은 잘못.
성생활은 원래 역사적으로 부르주아지의 것이고,
연속적 이동과 전환을 통해 특수한 계급 효과를 유발.
억압의 이론은 역사적으로 성생활의 장치가 확산되는 과정 (보편화와 차별화)과 깊은 관계가 있음.
사회 계급에 따른 금기의 차별적 작용의 사회적 차별화는 육체의 “성적”
특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육체에 대한 억압의 강도에 의해 명백히 드러나는데 이 지점에서 정신분석이 개입.
정신분석은 법과 욕망이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이론이면서 동시에 가혹한 금기로 인해 병이 생기게 되는 곳에서 금기의 효력을 없애려는 기술.
근친상간의 경우 한편으로는 응징해야 할 행위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불가피한 욕망으로,
정신분석은 근친상간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근친상간의 가혹한 억압을 없애는 데 몰두.
고전주의 시대부터 전개된 것과 같은 성생활 장치의 역사는 정신분석의 고고학으로 유효.
제5장 죽음의 권리와 생명에 대한 권력
오랫동안 군주의 권력을 특징짓는 특권의 하나는 생살여탈권.
“생살여탈권”은 죽게 ‘하거나’
살게 ‘내버려둘’
권리. 그것은 칼로 상징됨.
그러나 이러한 권력의 메커니즘이 고전주의 시대부터 크게 변화.
그 때부터 죽음의 권리는 생명을 관리하는 권력의 요구 쪽으로 옮겨가거나 적어도 이 요구에 기대고 이 요구가 필요로 하는 것을 따르는 경향.
전쟁은 보호해야 할 군주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모든 이의 생명이라는 명목으로 행해지고,
국민 전체는 생존의 필요라는 명목으로 서로 죽이도록 훈련받음.
또한 권력이 생명의 관리를 기능으로 갖추었을 때부터,
사형의 실행이 점점 더 어렵게 되는 것은 인도주의적 감정의 출현 때문이 아니라 권력의 존재이유와 권력행사의 논리 때문.
즉, 죽게 ‘하든가’
살게 ‘내버려두는’
오래된 권리가 살게 ‘하거나’
죽음 속으로 ‘몰아가는’
권력으로 대체됨.
구체적으로 생명에 대한 권력은 17세기부터 두 가지 주요한 형태로 전개.
이들은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전개의 극.
먼저 형성된 극의 중심은 기계로서의 육체.
이는 ‘규율’을 특징짓는 권력절차,
즉 ‘인체의 해부-정치’에 의해 보장됨.
다소 늦게 18세기 중엽에 형성된 두 번째 극의 중심은 종으로서의 육체,
생명체의 기계론에 의해 검토되고 생물학적 과정에 대해 매체의 구실을 하는 육체,
즉 ‘인구의 생체-정치’. 생명에 대한 권력의 조직화는 육체의 규율과 인구의 조절이라는 두 가지 극을 중심으로 전개.
양면을 지닌 이 광범위한 기술이 고전주의 시대에 정립되었다는 점에서 이제부터 권력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아마 죽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온통 에워싸는 데 있을 것.
이러한 현상을 통해 ‘생체-권력’의 시대가 열림.
이 생체-권력은 자본주의의 발전에 불가결한 요소.
그러나 자본주의의 발전은 더 많은 것을 요구했고,
육체와 인구의 활용 가능성 및 순응성과 동시에 육체와 인구의 성장,
또한 체력과 적성과 생명 일반을 최대한 이용할 수 있으면서도 이것들의 예속화를 더 어렵게 만들지 않을 권력의 방법을 필요로 함.
자본의 축적에 의거한 인력 축적의 조절,
생산력의 확대와 이윤의 차등적 배분에 대한 인간 집단의 긴밀한 관련은 다양한 형태와 방식으로 행사되는 생체-권력에 의해 일정 부분 가능해짐.
이 현상은 인간이라는 종의 생명에 고유한 현상이 지식과 권력의 영역으로 들어갔다는 것.
아마 역사상 처음으로 생체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에 반영됨.
이제 권력은 법적 주체,
즉 권력의 최종적 권한이 죽음인 법적 주체뿐 아니라 생명체를 다루고,
권력이 생명체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지배력은 생명 자체의 차원에 놓임.
수천 년 동안 인간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이해한 존재,
즉 살아 있고 게다가 정치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동물이었으나,
근대인은 이제 생명체로서 정치에 자신의 생명을 거는 동물.
이 생체-권력의 확대로 인한 또 다른 결과는 사법제도에 손실을 초래할지 모르지만 어쨌든 규범의 작용이 점점 더 큰 중요성을 띠게 됨.
법은 언제나 검에 의거.
그러나 생명을 떠맡는 것이 임무인 권력은 지속적으로 조절하고 교정하는 메커니즘을 필요로 함.
이 권력은 주권의 영역에서 죽음의 효력을 나타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을 가치와 유용성의 영역에 배치하는 것.
이제 규범을 중심으로 배치를 실행.
규범화하는 사회는 생명에 중심을 둔 권력 기술의 역사적 결과.
그리고 19세기에 새롭게 등장한 이 권력에 저항하는 세력도 권력이 에워싸는 것 자체,
다시 말해서 생명과 살아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발판으로 삼음.
즉, 정치투쟁이 권리의 주장을 통해 표명된다 할지라도,
정치투쟁의 쟁점이 된 것은 권리이기 이전에 생명.
성이 정치적 쟁점으로서 띠게 된 중요성은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음.
성은 생명의 정치 기술이 전개된 두 가지 축의 연결점.
한편으로 성은 육체의 규율,
즉 훈련,
체력의 강화와 배분,
에너지의 조절 및 경제적 사용과 관계가 있음.
다른 한편으로 성은 인구조절의 영역과 관련하여 모든 총괄적 결과를 유도.
이러한 성의 기술에 따라 이것의 한 극에서 다른 극까지에는 육체의 규율이라는 목적과 인구의 조절이라는 목적을 여러 가지 비율에 따라 조합하는 일련의 다양한 전술 전체가 일정한 간격으로 배열됨.
우리는 “성”의 사회,
더 정확히는 “성생활 위주의”
사회에 살고 있음.
권력은 성생활을 디자인하고 선동하고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언제나 통제하에 붙들어두어야 할 증식하는 의미로 이용.
성생활은 ‘의미의 가치를 갖는 효과’.
우리는 성생활의 장치와 동시대적인 권력의 기술로부터 성생활의 장치를 사유해야 함.
푸코는 이러한 논의로 인해 자신이 마치 성이 존재하지 않는 듯이 성생활에 관해 말하고 있다는,
즉 성을 배제한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음.
그는 자신의 연구가 육체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생체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의 연결을 통해 육체를 나타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
이 연구는 육체가 인식되고 의미와 가치를 부여받는 방식에 의해서만 육체를 고려할 “심성의 역사”가 아니라 육체에 있는 가장 물질적이고 활기찬 것이 에워싸인 방식과 “육체에 관한 역사”.
또한 현실 속에서 “성”은 “성생활”의 발현을 떠받치는 정착 지점?
우리는 성이 실재한다는 관념의 역사적 형성을 목격했음.
갖가지 전략을 통해 “성”의 관념을 확립하는 것이 바로 성생활의 장치.
“성”의 관념은 사람들로 하여금 권력을 “권력”으로 만드는 것으로부터 눈을 돌려 권력을 단지 법과 금기로서만 사유할 수 있게 함.
성은 아마 성생활의 장치와 이 장치의 작동에 필요하게 된 관념적인 지점에 지나지 않을 것.
우리는 자율적 성의 심급을 상상해서는 안 됨.
성은 성생활의 장치에서 가장 사변적이고 가장 관념적이며 가장 내면적인 요소.
성생활의 장치는 “성”이라는 이 상상적 요소를 새로 만들어냄으로써,
가장 중요한 내적 작동 원리들 가운데 하나,
즉 성에 대한 욕망,
성을 소유하려는 욕망,
성에 이르고 성을 발견하고 해방하고 담론으로 조목조목 진술하고 진실로서 확립하려는 욕망을 불러일으킴.
우리는 성의 역사를 성의 심급에 관련짓지 말고,
어떻게 “성”이 역사적으로 성생활에 종속되어 있는가를 보여줄 필요가 있음.
성을 현실 쪽에,
성생활을 관념과 환상 쪽에 놓아서는 안 되는데,
후자는 역사적으로 실재하는 매우 구체적인 형상이고,
자체의 작동에 필요한 사변적 요소로 전자의 관념을 불러들임.
성을 긍정하는 것이 권력에 대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됨.
왜냐하면 누구나 이와는 반대로 실제로는 일반적인 성생활의 장치를 따라 살기 때문.
저항하고자 한다면 바로 이 성의 심급으로부터 벗어나야 함.
성생활의 장치에 대한 반격의 거점은 성-욕망이 아니라 육체와 쾌락.
성생활의 장치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해방”이 문제라고 믿게 하는데,
바로 이 것이 이 장치의 아이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