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글
데리다의 타자론은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에 대한 철학적 기반을 전복적으로 사유할 새로운 지평을 제시한다.
특히 근대국민국가가 갖는 주권성의 이념이 여러 문제를 드러내는 시점에 주권성의 한계너머에서 타자와 소수자 그리고 이방인등과 같은 존재를 그의 사유의 중심주제로 삼는다는 점에서 현실 문제에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데리다는 기존의 철학적 입장을 염두에 두면서 좀 더 급진적으로 이방인 혹은 타자성에 대한 사유를 극한에까지 밀고 나아간다.
이런 극단성의 형태가 바로 절대적 타자 개념이다…
그의 타자는 절대적으로 다른 자를 의미하며,
이점에서 타자의 환대도 이런 절대적으로 다른 자,
주체로 환원불가능한 이질적인 것의 환대를 의미한다.
그래서 데리다는 환대를 단지 제도적인 차원이 아니라 이질성의 출현의 가능성에 대한 초월론적인 차원에서 검토한다.
2. 데리다의 환대 개념
데리다는 환대라는 주제를 통해서 타자에게 열림의 양상을 제시한다…
초기 데리다는 주로 전통철학의 위계질서를 해체하고 전복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반면 후기에 와서는 환대,
책임성, 그리고 도래하는 민주주의와 정의와 같이 내부의 해체라기보다 오히려 외부의 침입 혹은 내부가 외부에 열릴 가능성에 대해서 천착한다.
일차적으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외부는 그 자체로서 설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절대적 타자로서 외부는 먼저 내부와 구별된다는 점에서 차이로서 사유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차이 자체가 현전화된다면,
이미 내부화된 외부이기에 차이를 가능하게 하는 절대적 타자는 그 자체로 현전되지 않는다.
대신에 현전되지 않기에,
차이는 동일자의 담론 내에서 포착되지 않지만,
담론이나 주체와 관련은 맺고 있다.
데리다는 이런 관련을 흔적(trace)이라고 부른다…
나아가 이런 흔적조차도 그 자체로서 현전하지 않으며 일종의 차연 (difference)과 같이 흔적의 흔적 (las trace de la trace)이 되어,
그 자신의 지워짐 속에서 흔적 (la trace de l’effacement de la trace)을 남기게 된다.
그래서 흔적은 고착화된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지속적으로 덧입혀져서 흔적을 남기는 과정으로서 사유된다…
한편 현전화될 수 없는 절대적 외부가 이런 내부 혹은 동일자에 의해서 현상화되고 주제화되는 순간,
그것의 외재성은 동일자의 표상체계에 포섭되거나 동일자의 질서에 편입될 것이다.
그러기에 이런 동일성의 표상에 포섭되지 않는 절대적 외부와의 접면을 사유한다는 것이 데리다의 기본적인 사유의 모티브이다.
그리고 이런 사유의 방식은 그의 환대라는 주제에서도 읽을 수 있다.
[환대에 대하여]에서 데리다는 자신의 환대이론이 단지 조건부 환대와 명확히 다르다는 것을 강조한다.
데리다는 환대를 절대적 타자의 수용의 입장에서 접근한다…
여기서 그가 주장하는 환대는 차이의 해체론이라고 할 만하다…
데리다는 이 차이의 지속적인 운동을 초기에는 차연으로 설명했다면,
환대의 주제와 관련해서 좀 더 사회-정치적 입장에서 무조건적인 환대로서 설명한다.
그러기에 법과 제도가 제시하는 환대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 때문에 환대는 정치적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를 넘어서는 윤리적 개념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무조건적인 환대에서 타자가 논의되기 위해서는 주체의 주권성을 훼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참된 환대는 손님과 주인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피환대자에게 요구하는 최소한의 상호성의 조건을 포기할 때에만 가능하다…
그래서 결국에는 환대의 주도권은 주인이 아니라 이방인이 갖고 있으며,
주인은 타자에 대해서 어떤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
타자는 절대적으로 타자이며,
나에게 매번 낯선 자이다…
즉 타자성은 한편에서 동일자의 통제권,
주권에 포섭되지 않으면서 동시에 동일자의 내부에 들어와야 한다.
그런데 이런 주권성의 상실은 주체와의 관계가 단지 호혜적인 상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적대적인 관계로 변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데리다는 환대와 적대적 관계의 가능성을 함께 말하기에,
법의 예외와 이런 예외가 초래할 위험의 가능성을 동시에 생각하는 것이고,
이 위험의 가능성에 대한 인지는 합리적 계산이나 법이 있기에 가능하다.
이 점에서 법과 법의 예외는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를 전제하면서 공속적으로 존재한다…
데리다는 무조건적 환대라는 불가능한 절대적 명령,
요구를 통해 우리의 일반적인 이성과 합리성과 같은 법의 경계를 보여주고자 했다.
데리다는 이런 무조건적인 환대를 말하면서 동시에 위험,
적대성을 전제하기에,
환대를 이상화하기보다 오히려 ‘불가능한 사건’이라고 말한다.
3. 제삼자의 해석-데리다와 레비나스
데리다는 자신의 환대론에서 타자의 이중적인 측면을 Adieu에서 언급하면서,
레비나스의 제삼자 개념과 환대의 위험성을 연결시켜 설명한다…
제삼자의 출현과 함께 타자에 대한 전적인 신뢰는 타자에 대한 회의와 의심으로 변하고,
이에 따라 타자는 의식의 빛에 의해서 가시화되어 여러 다른 이웃들 속에서 비교될 수 있는 자로 바뀌게 된다…
‘나’와 타자 그리고 제삼자 사이에는 대면적 관계가 아니라 판단과 회의를 위한 적절한 거리가 유지된다.
이를 통해 얼굴은 ‘나’의 판단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런데 데리다는 제삼자의 출현을 마치 대면의 직접성 속에 있던 자아가 갖던 타자에 대한 충실성을 배반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타자의 얼굴은 절대적 진실이 아니라 이미 위증의 가능성을 갖고 있으며,
얼굴의 표현에 대한 진실성 자체가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타자의 환대는 언제나 타락가능성 (perveribilite)을 내포하고 있다.
레비나스는 [존재와 다르게]에서 타자와 주체사이의 윤리적 관계인 가까이 있음을 설명한 뒤 제삼자의 출현의 가능성을 논하는데,
이런 전개는 단지 임의적인 기술이 아니라 자아와 타자가 맺는 책임의 관계가 모든 법이나 제도 등에 우선함을 전제한다…
이 때문인지 레비나스의 저서에서 제삼자가 논의되지만,
그의 출현이 타자를 객관화하고 대상화하는 정도에 머물지 직접적으로 타자가 거짓증언을 할 가능성으로까지는 나아가지 않는다…
레비나스는 타자를 주체의 반열에 오르지 못하며,
주체와 같은 권능을 갖지 못한 자로 규정하는 데 있다.
즉 레비나스의 타자는 이미 약자이다…
반면 데리다는 환대에서 타자의 미지성을 오히려 더 중시한다.
그러기에 타자에게 열린다는 것은 이미 최악의 상황을 전제해야 한다.
데리다와 같이 타자에 대한 회의와 판단이 지속적으로 작동한다면,
위증의 문제나 환대의 타락가능성의 문제는 출발점에서부터 문제가 될 것이다.
즉 제삼자는 대면 이후에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출현부터 개입하고 있다…
데리다의 무조건적 환대에도 제삼자는 언제나 현존하고 있고,
이로 인해 데리다는 법의 예외로서의 무조건적 환대와는 (?) 타락가능성과 같은 회의와 판단,
나아가 법과 규칙의 계기들과 구조적으로 결합되어 있고 결국 이 둘은 동일한 동전의 양면과 같이 존재한다.
요컨대 데리다는 레비나스 후기의 저작에서 자신의 논거를 빌려오지만 윤리적 관계의 타락가능성과 판단과 의식의 계기의 적극적인 개입을 주장하면서,
서로 모순되는 개념들 중에 어느 한쪽을 결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주체의 전권성을 해체한다.
또한 적극적인 의미에서 윤리적 관계는 언제나 그것을 배반하는 것과 결합될 때에만,
그리고 이런 미결정성에 노출될 때에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4. 타자의 환대와 사건의 환대
데리다는 타자의 환대에서 그의 타자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타자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 에포케를 친다.
이 때문에 타자는 미지의 존재로 남는다.
그 결과 타자는 언제나 최악의 가능성에 열려 있다…
그리고 이런 경계의 불확정성이야말로 주체의 전권성을 약화시키고,
동시에 타자와의 조우가 언제나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낯선 자와 만나는 하나의 사건,
다시 말해서 하나의 시험이 되게끔 한다.
이 점에서 데리다는 타자성을 굳이 윤리적 의미에 한정하기보다 좀 더 폭넓은 관점에서 재정의한다.
즉 타자성의 방점을 타인보다 이방성,
미지성에 둔다.
그래서 타자의 성격에 대한 미결정성이 강조된다.
반면에 레비나스에게는 타자는 나에게 무차별적인 어떤 미지의 것이 아니라,
결코 누구도 나를 대신해서 응답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유일한 단독적인 존재가 바로 타자이다.
이점에서 레비나스의 차이는 비-무관심 (Non-indifference)을 의미한다…
데리다는 환대에서 타자를 단지 나그네와 이방인으로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규정할 수 없고 지배할 수 없는 존재들을 지시하며,
절대적 타자자체에 대한 규정을 언제나 유보한다.
이런 점에서 데리다의 환대는 사건의 환대로도 해석될 수 있다…
도래하는 존재가 ‘사건’으로 명명되는 한에서 반드시 인격적인 존재가 아닌,
중립적인 어떤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타자는 인격적 존재보다 오히려 나의 지배력의 외부에서 나에게 침입하는 낯선 것으로,
우리의 표상과 조망권 밖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로고진스키는 비록 데리다의 타자론과 환대,
책임개념이 레비나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음에도,
데리다의 타자론이 레비나스의 타자론과 동일한 선상에서 말해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레비나스는 환대의 개념이나 책임의 개념의 배후에 신의 관념이 항상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타자의 얼굴은 단지 윤리적 차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측면 특히 유대교적인 측면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레비나스의 사상은 윤리적 차원과 종교적 차원의 교차점 위에 있다.
반면 데리다는 메시아니즘과 같은 유대교적 전통을 참조하지만,
이와 함께 차이의 발생을 설명하기 위해서 차이의 원천으로서 코라
(Khora)를 제시한다.
플라톤에서 빌려온 이 개념은 어떤 내용도 없는 빈공간이고,
거기로부터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 마치 모태와 같은 공간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데리다의 차이는 레비나스가 자주 강조하는 비-무관심성 (Non-indifference)과 등치될 수 없다.
오히려 그의 차이는 레비나스가 자주 비판한 존재론적 성격을 상당부분 포함하고 있다.
동일한 맥락에서 로고진스키는 레비나스와 데리다를 대비시킨다.
레비나스는 칸트와 후설의 전통을 잇는 근대적 타자관을 갖고 있다고 비판한다.
즉 타자는 인격적 존재이어야 하고 그와의 관계는 윤리적 관계여야 한다.
이와 달리 데리다의 타자는 타인뿐 아니라 밝혀질 수 없는 것,
익명의 것도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로고진스키의 이런 해석은 해체론이 갖는 탈주체성의 의미에서 타자의 미결정성만을 강조하는 면이 있다…
우리는 메시아니즘에서 데리다의 사유가 갖는 어떤 역동성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데리다는 자신의 철학적 작업인 해체를 “단지 지체나 지연,
연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명백히 말한다.
오히려 환원될 수 없는 차이 안에서 ‘절대적 촉구’와 ‘긴급성’에 주목할 것을 요구한다.
5. 나오는 글
데리다의 환대론은 타자성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에서부터 출발한다.
절대적 타자에 대한 열림 없이는 환대는 불가능하기에 지속적으로 타자에 대한 환대에서 주권성의 해체와 통제 불가능한 것에 대한 열림이 강조된다.
환대를 근거지을 수 없다는 점에서 그리고 지속적으로 새로운 타자에게 열린다는 점에서 환대이론은 모든 규정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해체의 노력이 해체에 머물 수 없음은 데리다 자신이 말하는 해체 불가능한 것으로서의 정의의 이념을 말할 때 알 수 있다. 즉 해체는 단지 사변적인 것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정황에서 타자성의 가장 어려운 지점을 탐구하는 점에서 데리다의 해체에서 책임과 환대 그리고 증여와 같은 사회적-정치적 주제들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중요성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