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양 철학 비판과 비판철학의 가능성
“서양 철학은 대체로 존재론이었다.” [전체성과 무한]
초두에 나오는 이 표현은 서양 철학에 대한 레비나스의 비판적 입장을 한 문장으로 대변해준다. 존재론은 레비나스에 따르면 타자를 동일자의 영역으로 환원하는 이론이다.
그럼에도 레비나스의 눈에는 후설의 초월론적 현상학도 본질적으로는 존재론으로 보였다.
후설의 존재론은 관념론적 성격을 띤다. 사물은 의식에 의해 구성되는 한, 의미를 갖는다. 의식 활동의 표상적 측면이 여기서 강조된다….
의식의 ‘객관화하는 작용’ 또는 이론적 측면을 후설은 끝까지 놓지 않는다. 레비나스가 후설 철학을 존재론이라 부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의식과 세계의 관계를 ‘표상’ 또는 의식의 ‘객관화하는 작용’을 통해서 기술하지 않는다는 점이 하이데거의 독창성이었다고 레비나스는 생각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은 이미 세계 안에 던져져 있다.
인간은 이미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다… 자기를 발견하고 자기를 말하기 전에 이미 세계 안에 살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 존재는 ‘초월’로 규정된다…
의식과 세계의 관계는 무엇보다 실천적 관계이며 세계에 대한 표상적, 이론적 관계는 실천적 관계로부터 파생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생각이다.
레비나스가 보기에는 하이데거 철학도 존재론의 한계를 역시 벗어나지 못했다…
레비나스는 하이데거의 존재론도 다른 존재론과 마찬가지로 역시 ‘소유와 지배의 철학’이고 심지어는 인격적 자아와 타자, 타자와의 인격적 관계와 책임을 거론하지 않는 ‘불의한 철학’이며 ‘중립성의 철학’이라 평가한다.
존재의 무게는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비로소 가벼워질 수 있고,
내재성의 세계에서 외재성의 세계로 초월의 길이 열릴 수 있다. 이러한 초월의 과정을 그리는 것이 레비나스에게는 형이상학의 과제였다.
레비나스가 생각한 형이상학은 무한자와 관련이 있다.
‘무한자’는 나와 절대적으로 다른, 나에게로 도무지 환원할 수 없는 타자를 말한다. 타자를 ‘무한자’라고 일컫는 것은 타자의 수가 한없이 많다거나 타자는 도무지 접근할 수 없다거나 하기 때문이 아니다.
타자는 나의 인식과 능력의 테두리 안에 가둘 수 없기 때문에, 바로 그 때문에 무한하다.
형이상학은 레비나스에게는 ‘윤리학’과 동의어로 쓰인다…
레비나스가 서양 철학을 존재론이라 보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첫째는 인격성의 상대화이고, 둘째는 권력의 찬양이고, 셋째는 비판적 이성의 약화이다.
첫째, “서양 철학은 존재론”이라고 할 때 레비나스는 서양 철학은 대체로 인간의 인격을 상대화하는 경향을 본질적으로 지닌 철학이라 규정하고자 한다.
서양 철학은 레비나스가 보기에는 극단적 인간주의와 반인간주의 또는 관념론과 유물론의 일종의 진자 운동의 순환을 벗어나지 못한다.
서양 철학을 존재론이란 이름으로 레비나스가 문제삼는 두번째 이유는 서양 철학이 권력 의지를 미화시켰다는 데 있다.
서양 전통은 개인들의 자유에서 오는 충돌을 공동의 질서, 곧 다양성과 무질서에 확고한 질서를 수립할 수 있는 전체성 곧 국가를 세워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그 결과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는 자유주의와 집단적 권력 집행을 선호하는 집단주의 두 극단 사이에 서양의 정치철학이 헤맬 수밖에 없게 된다…
레비나스는 둘 다 문제삼는다. 타자를 제어하면서 무한히 자유를 확장하고자 애쓰는 의지와 전체성 속에 개체를 흡수, 환원하려는 의지, 둘 다 문제가 된다. 자유주의와 집단주의는 둘 다 권력 의지로 귀결된다. 권력 의지는 결국 두 경우 모두 구조화된 폭력으로 나타난다…
정치적 전체주의에는 개체를 전체의 부분으로 보는 존재론적 전체주의가 깔려 있다.
칸트 도덕철학의 핵심 명제는 “자유는 책임에 선행한다” 또는 “책임은 자유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레비나스의 핵심 명제는 “책임은 자유에 선행한다” 또는 “자유는 책임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서양 철학을 존재론이라고 부르면서 레비나스가 문제삼는 세번째 이유는 존재론으로서의 서양 철학은 진정한 비판적 이성을 가능하게 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론은 레비나스에 따르면 ‘힘의 철학’이다… “’나는 생각한다’는 ‘나는 할 수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존재하는 것의 소유요 현실의 정복이다.
철학의 기초로서의 존재론은 힘의 철학이다.”
존재론이 아닌 철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존재론으로서의 철학은 대상을 문제삼고 나의 의식의 이해와 파악과 인식을 문제삼을 뿐 나의 의식 자체를 문제삼을 수 없다. 철학은 외재성에 대해 차단한 채 자신의 자유, 자기성, 그리고 이를 중심으로 형성된 전체성의 테두리에 머문다. 자기 자신을,
의식을, 그리고 나의 자유를 문제삼는 일은 타자의 개입을 통해서 가능하다…
타자의 개입,
외재성에 대한 존경을 의도하는 ‘이론’은 존재자의 이해에 대해서 ‘비판’을 실행한다…
타자의 얼굴과의 만남은 나의 자유,
나의 이해,
나의 지식과 존재 기획, 나의 세계 지평 전체를 의심하고 문제시하고 비판할 수 있도록 해준다…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만남, 타자의 현존으로 인해 나의 존재가 문제시되는 것을 윤리라고 부른다. 따라서 윤리는 회의론과 비판의 조건이고 이런 의미에서 철학의 조건이다.
여기서 비판으로서의 철학의 가능성을 볼 수 있다.
외재성의 관점, 타인의 얼굴에 의해 내 존재 자체가 문제시된 상황에서 철학은 존재론 비판으로 가능하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타자의 사유, 곧 윤리학으로서의 철학이 가능함을 레비나스는 보여주고자 했다. 윤리는, 그리고 윤리학은 레비나스에게 존재론 비판으로서의 비판철학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2. 제일철학으로서의 윤리학
우리는 존재론을 피할 수 없다. 문제는 존재론과 형이상학의 역할을 바꾸는 것이다.
플라톤, 데카르트, 칸트 외에도 헤겔,
포이어바흐, 사르트르, 마르셀, 부버 등이 레비나스의 타자 철학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준 것도 간과할 수 없다.
레비나스의 타자 철학에 중요한 원천이 된 것은 역시 유대교이다.
하나는 메시아 사상에 대한 레비나스의 해석이다…
토라 또는 율법의 의미를 보편적으로 해석한 것도 또 한 예로 들 수 있다… 메시아 사상은 책임 이념으로 번역되고 토라 (가르침)의 권위는 내 바깥의 무한자,
초월자, 가르침의 이념으로 번역된다.
타자 철학에 이어 레비나스의 제일철학으로서의 윤리학에 중요한 것은 철학 전통에서 빌려온 무한자의 이념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은 일이다… 이 이념은 어떤 다른 이의 이념이나 개념보다 레비나스 철학을 칸트나 피히테 또는 후설의 의식 중심 철학이나 하이데거나 사르트르, 메를로-퐁티의 유한성 철학과 구별해주는 것이다.
타자의 얼굴을 통해 구체화되는 무한성의 이념은 얼굴의 현현이 역사적이고 구체적 사건이란 점에서 역사적이지만, 동시에 전체화하는 역사의 경향에 도전하는 점에서 반역사적 또는 초역사적이다. 얼굴의 현현은 역사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역사는 결코 최종 단어일 수 없다. 역사 앞에서, 역사를 우상시하지 않고 그것에 대항하여 책임을 호소할 수 있는 가능성을 레비나스는 무한성의 이념에서 찾는다.
‘전체성’과 ‘자기실현’이란 이념은 존재론적 사유의 초석이다.
반면 철학의 기초를 윤리학으로 볼 때 가장 중요한 이념은 ‘무한성’과 ‘책임’이란 이념이다… [책임은] 타인의 부름에 응답하고 짐을 짊어지며 자기를 비워 희생을 감수한다는 뜻이다.
첫째, 책임은 내가 먼저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작업의 결과라는 점이다. 책임은 나의 자유,
나의 주도권에 항상 앞선다… 둘때, 책임으로 주어진 나의 수동성은 나에게 동시에 선택과 과제로 주어졌다는 면이 있다.
타인을 위한 대속이야말로 나를 한 인격으로,
책임을 갖는 존재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로 만들어준다.
3. 신과 종교의 문제
레비나스는 종교적 담론과 철학적 방식을 의도적으로 분리한다. 철학은 철저히 그리스적이라는 것이 그의 일관된 신념이었다.
레비나스는 전통 철학과 두 가지 점에서 확연히 구별된다. 첫째, 참된 신앙을 위해서는 반드시 ‘무신론’을 거쳐야 한다는 점에서 유신론을 단순히 승인하고 받아들이는 태도와 구별된다… 둘째,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타자와의 윤리적 관계를 통해 구체화될 수 있을 뿐 어떤 직접적인 관계도 맺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기독교나 유대교의 주류와도 구별된다.
신화와 열광주의 앞에서 신을 거부할 수 있는 존재만이, 다시 말해 무신론자가 될 수 있는 자만이 참된 하나님을 환영할 수 있다.
종교의 핵심은 타자와의 관계에 있다… 하나님은 볼 수 없는 분이요, 표상할 수 없는 분이다. 그러나 정의를 행할 때, 다시 말해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와 나그네를 돌아볼 때,
그들의 생존과 권리를 옹호할 때 그때 나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윤리란 바로 이렇게 정의를 행하는 일이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윤리가 ‘하나님을 봄’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을 보는 일 자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곧 “그분처럼 너도 자비로워라!”는 명령을 듣고 그렇게 행하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정의로운 선행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가까움을 누리는 일이라는 의미에서 레비나스는 윤리를 “영적인 봄l’optique spirituelle”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타자의 타자성은 하나님과의 연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낯선 이로서의 타자가 나에게 환대를 호소해올 때 그를 영접하고 받아들임은 곧 하나님을 영접하고 받아들이는 일이라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얼굴이 오는 저편은 흔적으로 기표한다”고 말한다…
그의 흔적은 부재의 표시이다. 타자의 얼굴은 이런 의미에서 하나의 흔적이다.
나는 나로부터 유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했다는 점에서 하나님에 대해 의존적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가 되도록 만들었다. 나는 의존적이면서 독립적인 존재라는 역설에 하나님의 창조의 독특성이 있다.
각자 하나님의 흔적이며,
하나님께 의존해 있으며, 그로 인해 나의 존재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은 나와 마주한 타자를, 그리고 그 너머 제삼자로서의 타자를 하나님에게 뿌리를 둔 하나님의 흔적으로 다시 인식할 때 가능하다.
나와 타인과 인류 전체가 이렇게 절대적 기원을 가진 존재임을 인식할 때 비로소 누구나 하나님의 흔적임을 인식한다. 그러나 흔적을 만든 그 분은 여기에 부재한 자로, 나와 너 사이에 존재하지 않는 ‘제3의 격’이다.
레비나스는 우리가 표상할 수 없고 우리의 권한 안으로 포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이러한 성격을 3인칭 ‘그Il’를 써서 ‘그임illeite’이라 부른다.
라틴어 표현을 따르면 ‘저기 있는 저분’ 그리고 ‘저분임’이라 번역해도 무방하다. 하나님을 3인칭을 써 이렇게 ‘그’라고 부르고 ‘그임’ 또는 ‘그분임’이라 부르는 까닭은 하나님은 결코 우리가 볼 수 없고 표상할 수 없고 따라서 우리가 지배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얼굴을 떠나 어떠한 형상이나 모습으로도 하나님을 표상할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통상의 “잣대를 벗어나신 분” “무엇으로도 잴 수 없는 분”이라고 부를 수 있을 뿐이다.
신학이 흔히 범하는 죄는 불가해한 수수께끼인 하나님의 창조를 마치 현상인 것처럼 원인과 결과의 도식을 적용해 말하는 데 있다.
이 점에서 레비나스는 전통 서양 형이상학은 존재자들을 결과로,
하나님을 원인으로 설명하는 방식에 갇힌 ‘존재신학’이었다는 하이데거의 비판에 사실상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나님은 원인과 결과 도식에 사용될 수 없는 분이다.
그분은 불가해하고 헤아릴 수 없는 분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주제Thema로 등장할 수 없다.
레비나스는 그러나 “계시”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의 전 저작에 걸쳐 “계시”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계시는 눈앞의 사물을 그려내는 언어와 혼동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생각이다. 계시는 그것을 통해 우리가 무한자와 관계하지만 그 자체로는 언제나 불가해한 수수께끼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해 말하기”로서의 ‘신학’은 오직 ‘부정 신학’으로서만 가능하다고 보아야 하는가? 이 물음에 대해 레비나스는 긍정한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부정신학에 머물지는 않는다…
여전히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방식은 존재한다.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타자와의 만남을 그리는 것으로 우리는 신학적 논의를 할 수 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곧장 이렇게 물을 것이다.
예수를 통해서 우리 가운데 하나님께서 거주하심을 보았지 않은가?
지금도 성령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주함을 경험하지 않는가?...
레비나스는 이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부정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이 철학에 가져온 새로운 관점, 즉 신의 초월을 다시 새롭게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자기를 비우고 낮아진 신-인간 Dieu-Homme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죽기까지 수난을 받으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대속적 주체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고 본다.
레비나스에게는 자기 자신의 존재에 확실성의 근거를 두면서 결국 무신론에 귀결되는 철학과 제3인칭 존재의 ‘흔적’과 ‘수수께끼’를 바라보고 윤리와 종교에 관심을 가진 철학 사이에는 커다란 간격이 있다.
그러므로 전체성의 철학 곧 모든 것을 포섭하는 유한한 존재 지평 안에서 움직이는 철학과 타자의 절대적 기원 (초월)을 인정하는 철학을 레비나스는 구별한다.
레비나스의 철학은 탈레스에서 헤겔까지의 그리스 철학 전통과는 근본 정신에서 확연히 구별되는 철학의 가능성을 무한자와 책임의 이념으로 시도한 철학이다…
어떤 철학보다 철저히 비판적인 ‘비판철학’이요 무한자의 이념, 타인의 얼굴과의 만남을 통해 나의 삶의 의미를 얻게 해주는 ‘의미의 철학’이며 지극히 일상적이고 물질적인 삶의 차원의 의미를 회복시킨 일상적 ‘삶의 철학’이다.
철학은 레비나스에 따르면 아테네가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였다. ‘지혜 사랑’은 ‘사랑의 지혜’가 될 때 비로소 철학으로서의 온전한 기능을 수행한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말한다. “철학은 사랑에 봉사하는 사랑의 지혜”이다. 지혜 사랑의 존립을 가능하게 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사랑의 지혜, 곧 존재 사건 저편의 차원, 단순한 대차대조표 작성 이상을 넘어 그저 줌의 차원, 은혜의 차원, 사랑의 차원을 보일 수 있을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