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13일 월요일
타인의 얼굴: 레비나스의 철학 (강영안, 문학과 지성사, 2005) 중 5장 책임과 대속적 주체: [존재와 다르게 또는 존재 사건 저편에]를 통해 본 레비나스의 후기 철학
레비나스는 형이상학적 사유를 윤리학과 동일시하고 윤리학을 일컬어 ‘제일철학’이라고 부른다… 그의 말은… 존재 중심적 사고를 벗어나 존재 저편, 존재와 다른 차원에서 나 자신의 고유함과 타인의 의미를 이해해보자는 것이다.
1. 존재와 다르게 또는 존재 사건 저편에
니버의 윤리학과 마찬가지로 레비나스의 윤리학도 일종의 ‘책임윤리학’이다… 윤리적 의미는 책임이 ‘타인을 위한 책임’일 때 비로소 획득된다. 이렇게 획득된 책임은 다시 사회 정치적인 제도 속에 확인되는 정의의 기초가 된다.
2. 나의 책임과 존재 모험
나의 존재는… ‘자기중심주의’가 일차적 특징이다.
자기 존재를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은… 모든 존재자의 존재에 공통된 성향이다… 여기에는 윤리가 없다. 강자의 법이 적용될 뿐 타인에 대한 존경과 책임이 없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존재를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 가운데서 자신을 인식하고 파악하며 자신을 확인한다. 여기서 ‘자기성ipseitas’이 성립된다… 자기 자신 속에서 자기와 관계함으로써 인간은 타인과 바꿀 수 없는 자기 고유의 내면성을 얻게 된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자기성’과 ‘자기 동일성’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 과정이고 끊임없이 자신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에게 단순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제로 주어진다.
근원적인 자유의 긍정은 나의 행복뿐만 아니라 책임의 ‘과제’를 함축한다. 내가 이때 짊어지는 책임은 타인에 대한 책임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나 자신에 의한 책임이다. 나는 나의 존재를 나의 것으로 책임진다. 나는 이 존재의 책임, 존재의 무거움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한다. 이것은 결국 타자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만든다.
나는… 세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역설적이게도 세계에 대한 의존성을 통해 나는 비로소 나의 독립성, 나의 자유를 확보한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나는 오직 내 안에서 나를 실현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세계 안에서의 나의 존재 실현 노력은 한마디로 ‘자율성’이란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전통적인 자유 개념과 책임 개념은 지금까지 서술한 나의 자기 실현과 존재 유지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자유 개념과 나의 자유에서 출발한 책임 개념으로 타인과의 관계, 즉 레비나스가 말하는 윤리적 관계가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3. 존재 유지 노력과 타인과의 관계
1인칭적 관점에서 볼 때 타인과의 관계는 결국 나의 존재 유지의 연장으로밖에 볼 수 없다는 것이 레비나스의 논지이다… 히틀러와 독일 국가사회주의의 만행은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타인을 제거하고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자 노력하는 존재 경향의 확대에 지나지 않는다고 레비나스는 본다.
타인을 수단으로 삼고 나의 지배 아래 두고자 하는 욕망은 폭력과 갈등, 전면적인 전쟁의 근원이다.
전쟁은 세계 내에서 생존을 위한 노력의 일환인 노동과 유사성이 있다… 노동과 전쟁은 둘 다 상대방의 개체성과 인격성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전쟁은 이런 의미에서 세계 안에서의 인간의 노동의 연장이다.
어떻게 타인과의 평화로운 삶이 가능한가? 가능한 하나의 방법은 홉스의 제안과 비슷하게 나의 생존권, 나의 존재 유지 권리를 제한하는 길이다.
개인간의 평화든 정치적 질서에 의한 평화이든 평화를 이성적인 계산에 의해 가능한 것으로 보는 입장을 레비나스는 전형적인 서구의 평화 개념의 핵심으로 생각한다.
갈등 상황에 처한 개별적 주체는 이성적, 보편적 인식에 자신을 종속시킴으로써 개별성을 사상하고 평화로운 보편적인 질서에 참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개인의 의지는 개별성을 초월하는 보편적 법칙에 순종할 때 그때 비로소 자유롭게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타인의 타자성에 대한 진정한 존경이나 인정이 사실상 결여되어 있다. 그러므로 레비나스는 자기 중심적인 사회 모형에 근거한 정치는 ‘윤리가 결여된 정치’라고 단언한다… 정의가 없는 평화는 진정한 평화일 수 없다. 국제 관계에서도 이와 같은 상황은 비슷하다.
평화의 문제는 정치적인 문제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른바 ‘정치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레비나스는 본다… 그러므로 1인칭적 관점을 벗어나 2인칭적 관점에서 존재를 해석하고 나와 타인의 관계를 다시 근본적으로 검토해보아야 한다는 것이 레비나스 철학의 핵심이다.
4. 타인의 얼굴
레비나스가 말하는 윤리적 사건은 한마디로 타인의 얼굴의 출현이다… 타인은 그야말로 “벌거벗음 가운데 나타나는 얼굴”이며 “자기 자신에 의한 현현”이며 “맥락 없는 의미화요” “전체성의 깨뜨림”이다. 타인은 단적으로 나에게 “낯선 이”이다.
얼굴은 나의 표상과 인식, 나의 자유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그 자체 존재하고 그 자체 스스로 드러내 보여주는 타인의 존재 방식이다. 얼굴은 나의 표상과 나의 자유, 나의 주도권의 실패를 뜻한다. 얼굴로 나타나는 타인은 포착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나의 노력을 끊임없이 빠져나간다.
얼굴이 가진 이러한 모습을 레비나스는 ‘외재성’이란 말로 표현한다.
얼굴은 레비나스에 따르면 밖에 있다.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것으로 우리에게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존재, 우리의 세계 안에서는 어떠한 지시체도 찾을 수 없는 ‘외재적 존재의 현시’를 레비나스는 한마디로 ‘얼굴’이라 부른다.
얼굴의 “벌거벗음”은 ‘시선’과 ‘말’을 통해 구체화된다.
레비나스는 “동일자[나 중심의 존재 유지 노력]를 문제삼는 일, 동일자의 자기 중심적인 자발성 안에서는 가능하지 않는 이 일은 타인을 통해서 일어난다. 나의 자발성을 타인의 현존으로 문제삼는 일을 우리는 윤리라 부른다. 나에게로, 나의 생각과 소유로 환원할 수 없는 타자의 이방성은 나의 자발성을 문제삼는 일로서, 곧 윤리로서 완성된다”고 말한다. 또는 “윤리는 자유가 자기를 정당화하는 대신 스스로 자신이 자의적이며 폭력적임을 느낄 때 시작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윤리는 나의 자유가 문제시될 때 그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서 앞에서 본 1인칭적 의미의 책임, 곧 자신의 존재를 짊어져야 하는 ‘홀로 서기’의 책임과 달리 타인에 대한 책임 개념이 비로소 등장한다.
타인을 위해, 타인에 의해 내가 책임적 존재가 된다는 것은 곧 내가 응답적 존재가 된다는 뜻이다… “여기 내가 있습니다”는 레비나스에 따르면 모든 객관적인 서술에 앞서, 내용과 정보를 지닌 어떤 소통이라도 그 이전에 전제하는 ‘첫 언어’이다…레비나스는 이것이 자신의 철학 전체를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5. ‘타인에 의한, 타인에 대한 책임’과 대속의 의미
윤리의 근거로서의 레비나스의 책임 개념은 ‘타율성’에서 출발한다… 타인에 대한 나의 책임은 나의 자유에 선행한다.
타인의 일깨움은 나를 높이 세워주고 나를 고귀한 존재로 만든다… ‘타인에 의한’이 지닌 이런 차원을 레비나스는 ‘내 안에 있는 타자’ ‘동일자 안의 타자,’ 또는 ‘내재 속의 초월’이라 부른다… 내 안에 들어온 타자는 내 안에서 타자를 위해 짐을 짊어질 수 있도록 나를 키워낸다. 이것을 레비나스는 ‘모성성’이라 부른다.
대속은 타자에 의해 책임적 존재로 지정받은 내가 타자를 ‘위한’ 책임적 존재로 세워지는 모습이다.
레비나스는 그러나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내가 타인의 책임을 대신하는 것은 심지어 그의 잘못에 이르기까지 범위가 확대된다… 주체의 이러한 대리 책임에 대해서,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서 레비나스는 ‘속죄expiation’란 말을 붙인다… 타인에 대한 나의 책임은 그러므로 ‘대속적 책임’이다.
메시아는 타인을 위해서 대신 죄짐을 짊어지고 고난을 당하는 자이다. 레비나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타인의 고난을 대신 짊어진 주체의 이념으로 파악한다.
6. 대속적 책임의 실현과 비움의 주체
대속적 책임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가능한가?... 그것은 자신의 책임을 ‘타인을 위한’ 책임으로 구체화시킴으로써 실현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타인에 의해 창조된 이 책임을 타인을 위한 책임으로 스스로 수용하는 일이다. 타인이 나를 부를 때 나는 그 부름에 대답해야 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가능성밖에 없다. 부름을 수용하든지 아니면 거부하면서 타인을 나의 자기 중심으로 환원하는 길밖에 없다. 부름을 거부하는 일은… 책임으로부터의 도피이며 이 도피를 레비나스는 윤리적 의미의 ‘악’이라 부른다… 칸트가 윤리적 악의 근거를 인간의 자유에서 찾았다면 레비나스는 타인에 대한 나의 책임 유기에서 찾는다.
그렇다면 악과 반대되는 차원은 무엇인가? 그것은 선을 행하는 일이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타인의 호소를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타인의 수용은 자신의 문을 열고 타인을 영접하는 ‘환대’로 나타난다.
줌의 핵심에는 신학적 용어로 말하자면 케노시스kenosis가 있다. 자신을 완전히 비워 자기 자신을 타인의 고통을 위해 내어놓는 차원이다… 외상 없이, 내 살갗 속에 고통 없이 줌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참된 줌, 참된 선물, 참된 사랑은 레비나스가 자주 쓰는 표현을 따르자면 ‘존재 사건으로부터 벗어남,’ 곧 ‘이익 추구를 벗어남’이다. 이때 비로소 반대 급부를 기대하지 않는 사랑, 순수한 줌이 가능하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책임은 “자기에도 불구하고, 자기에서 출발해, 타인을 위해” 대속의 자리에 서는 것이고 책임적 주체는… 자신이 경제적 추구와 존재 유지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포기하면서 자기 자신을 이미 먼저 선택받은 자로, 타인의 고통을 위해 자신의 입에 있는 빵조차 타인을 위해 내어놓는 존재이다.
7. 제삼자와 책임: 정의와 국가 제도
삼자의 등장은… 평등가 공의에 따라 관계들이 조정되는 정의로운 공존 체제 구축을 요청한다. 이런 의미에서 삼자는 분배적, 사회적 정의의 시작이다. 책임은 여기서 법으로 전환된다. 내가 책임져야 할 원거리의 삼자, 미래의 삼자는 체제와 구조, 그리고 이들의 총체인 국가의 매개를 통해 효율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국가는, 전체주의 국가와 달리 타자에 의한, 타자를 위한 책임의 정신 아래 운영되는 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등장한다. 정의로운 국가의 구축 없이는 타인에 대한 우리의 무한 책임은 그 효력을 잃고 만다.
(그러나) 국가는 익명적이고 보편적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타자의 고유성에 무관심하고 이로 인해 의도와 상관없이 개인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 이것을 일컬어 레비나스는 ‘정치의 드라마’라 부른다…. 따라서 사회 정치적 체제와 구조는… 늘 비판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지속적 혁명’ ‘틀의 파괴’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논의를 통해서 책임의 윤리학은 자기 실현의 1인칭적 주체의 성립을 기초로 2인칭적 타인에 대한, 타인에 의한 책임, 그리고 나아가 ‘만인의 만인에 대한 책임’ 개념으로서의 3인칭적인 책임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나타났다.
8. 응답으로서의 윤리학
윤리학에 대한 철학적 반성은 통상 “윤리적이란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왜 윤리적이어야 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윤리적일 수 있는가,” 이 세 가지 물음으로 집약된다. 이 세 가지 물음은 윤리는 언제나 행위와 관련되어 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런데 행위는 언제나 행위를 실행하는 행위자의 행위이다. 서양 윤리학 전통에는 행위자를 이해하는 두 가지의 상반된 이미지가 있다. 널리 퍼져 있는 이미지는 인간을 일정한 목적을 위해 어떤 이념, 어떤 생각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제작자’로 보는 것이다… 두 번째 상징은 인간을 일정한 법 아래 살고 있는 ‘시민’으로 보는 것이다.
이 두 이미지에 반해 레비나스와 앞에서언급한 리처드 니버는 (그리고… 한스 요나스는) ‘응답자로서의 인간man-the-answerer’을 대안으로 제안한다. 인간을 ‘책임적 존재’로, 윤리를 ‘책임적 행위’로 보자는 것이다… 인간을 응답자로 보는 관점에서 책임은 함께 공동체를 형성하는 사람들과 사회적 연대를 구축한다는 것이다.
레비나스의 윤리학은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보았듯이 ‘책임의 윤리학’이다…. 레비나스도 행위보다는 존재, 아니, 행위 이전의 나의 존재,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행위와 존재 이분법 이전의 나의 존재를 그려냄으로써 윤리의 본질을 드러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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