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존재자가 자신의 고독을 완전히 실현하는 그러한 사건이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어느 정도 강한지,
자신이 누구임을 결정해 주는 요소가 무엇인지 하는 것을 존재자는 고통을 통해 체험한다. 그러나 자신이 수용할 수 없는 사건, 그겟에 대해서 단지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전적으로 다른,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러한 사건과 관계하고 있다는 사실을 존재자는 또한 고통을 통해서 인식한다. 죽음의 미래는 우리에게 미래를 규정해 준다.
미래는 그것이 현재가 아닌 한에서 미래이다.
미래는 절대적으로 다르고,
절대적으로 새로운 것이다. 바로 이렇게 볼 때 참된 시간의 현실을 우리는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현재 안에서는 미래의 등가물을 절대 발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미래를 거머쥘 수 있는 가능성이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주체의 자기 동일성으로는 이 개방성을 제공할 수 없다. 이 논제를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로서 우리는 말하자면 온 우주를 구성하는 익명적 존재, 떨쳐낼 수 없는 존재와, 존재에 대한 존재자의 지배를 가능하게 하되 그러면서도 바로 그 때문에 공간적 초월을 통해서도 폐기할 수 없는 동일성의 결정적 요소에 밀폐되어 버리는 홀로서기를 주목하였다.
할 수 있음과 타인과의 관계
죽음의 미래, 그것의 낯설음은 주체에게 어떠한 주도권도 허용하지 않는다. 현재와 죽음,
자아와 신비의 타자성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심연이 가로 놓여 있다…
죽음을 극복한다는 것은 영생의 문제가 아니다. 죽음을 극복한다는 것은 죽음이란 사건의 타자성과 더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격적이어야 할 관계를 유지한다는 말이다.
나는 타자를 미래를 통해 정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래를 타자를 통해 정의한다.
왜냐하면 죽음의 미래 자체가 그것의 전적 타자성에 있기 때문이다.
타자는 공감에 의해,
또 다른 내 자신으로, 다른 자아로서 인식된다…
존재물은 서로 바꿀 수 없는 데도 상호적이다. 아니, 상호적이기 때문에 서로 바꿀 수 있게 된다 할 만하다. 그렇기 때문에 타자와의 관계는 전혀 불가능하다.
하지만 타자성은, 우리의 사회적 관계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타자와의 관계 한 복판에서 이미 비상호적 관계로, 즉 동시성과 정반대의 관계로 모습을 드러낸다.
타인으로서의 타인은 단지 나와 다른 자아가 아니다. 그는 내가 아닌 사람이다. 그가 그인 것은 성격이나, 외모나 그의 심리 상태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의 다름 때문이다. 그는 예컨대 약한 사람, 가난한 사람, <과부와 고아>이다. 하지만 나는 부자이고 강자이다. 우리는 상호주관적 공간은 대칭적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에로스
상반된 것에 대해 완벽하게 상반된 것,
그 상반성이 그 자신과 상관자의 관계를 통해서도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는,
전적으로 다른 것으로 남아 있도록 허용하는 상반성, 그것은 여성적인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성의 차이는 하나의 형식적 구조이다. 하지만 이 형식적 구조는… 존재 통일성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재단하고 다원성으로서의 현실이 가능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해 준다… 성의 차이는 또한 모순 관계가 아니다.
존재와 무의 모순은 하나를 다른 것으로 환원하므로 거리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성의 차이는 상보적인 두 개념의 이원성도 아니다. 왜냐하면 두 개의 상보적 개념은 그것에 앞서 존재하는 전체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이 감동스러운 것은 넘어설 수 없는 이원성이 존재자들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는 그 사실 자체로 타자성을 마비시키기는커녕 오히려 타자성을 보존한다.
‘여성적인 것’이란 개념에서 나에게 특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인식 불가능하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빛을 벗어난 존재 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적이 것이 존재하는 방식은 스스로 자신을 감추는 것이고,
이렇게 스스로 자신을 감춘다는 것이 바로 수줍음이다. 그러므로 여성적인 것의 타자성은 단순히 대상의 외재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또한 의지의 대립을 통해 형성되지 않는다. 타자는 우리와 맞서 있는, 그래서 우리를 위협하거나 또는 우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의 힘에 대해 저항적이라는 사실은,
우리보다 더 큰 힘을 가졌다는 뜻이 아니다. 그의 힘이 되는 것은 오직 타자성뿐이다.
그의 타자성에 바로 그의 신비가 있다. 우리는 타인을 자유로서, 즉 의사 소통의 실패를 안고 있는 특성인 자유로서 타인을 애시당초 자리매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특별히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유에는 복종과 예속의 관계 외에 또 다른 관계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는 어느 한 쪽의 자유는 반드시 없어진다.
타인의 타자성을 신비로서,
그리고 이 신비를 수줍음으로 정의할 때 나는 나의 자유와 동일한 자유로서,
그리고 나의 자유에 대항할 수 있는 자유로서 타인을 내세우지 않는다. 나는 타인을 나와 맞서 있는 존재로 내세우지 않는다. 나는 타자성을 내세운다.
죽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한 존재자와 상관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성의 사건, 낯설음의 사건에 관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타자성을 절대적으로 근원적인 관계인 에로스에서 찾았다. 에로스는 ‘할 수 있음’으로 번역할 수 없는 관계이며, 그 상황의 의미를 그르치고자 하지 않는다면 구태여 그렇게 번역할 필요도 전혀 없는 관계이다.
우리는 관계 가운데에서도 에로스적 관계의 예외적인 위치를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타자성과의 관계요, 신비와의 관계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미래와의 관계,
모든 것이 현존해 있는 세계 안에서는 결코 현존해 있지 않는 것과의 관계요, 모든 것이 현존해 있을 때는 그곳에 있을 수 없는 것과의 관계이다.
이 관계는 현존하지 않는 존재와의 관계가 아니라 타자성(즉 다름)의 차원 자체와의 관계이다.
애무는 주체의 존재 방식이다… 하지만 올바르게 말하자면 애무를 받는 대상은 손에 닿지 않는다… <모른다>는 것, 근본적으로 질서잡혀 있지 않음, 이것이 애무에서 본질적인 것이다… 애무는 아무 내용 없는, 순수한 미래를 기다리는 행위이다.
그런데 타자와의 관계는 대개 하나의 융합(하나됨)으로 추구된다. 타자와의 관계를 하나의 융합으로 보는 관점은 바로 내가 싸우고자 하는 것이다. 타인과의 관계, 그것은 타자의 부재이다.
이것은 단순한 부재, 순수 무의 부재가 아니라 미래 지평에서의 부재, 시간으로서의 부재이다. 이러한 지평은 우리가 앞에서 죽음에 대한 승리라고 부른, 그러한 초월적 사건 가운데서 인격적 삶을 형성하는 지평이다.
생산성
아버지의 존재는 전적으로 타인이면서 동시에 나인 ‘낯선 이’와 관계하는 것이다.
성, 아버지의 존재,
그리고 죽음은 각 주체의 존재 자체와 관계된 이원성을 존재 안에 도입한다.
존재 자체가 둘로 늘어난다… 시간은 존재가 타락한 형식이 아니라 존재 사건 자체이다. 엘레아적 존재 개념은 플라톤 철학을 지배하였다.
그리하여 다수는 하나에 종속되고 여성적인 것의 역할은 수동성과 능동성의 범주로 사유되었으며,
그 결과 물질로 환원되고 말았다…
플라톤 이후부터 사람들은 사회적인 것의 이상을 융합(하나됨)의 이상에서 찾았다… 하이데거에게서도 마찬가지로 사회성은 홀로 있는 주체에게서 발견되며 고독이란 개념을 통해서 그 본래적 존재에 있어서의 현존재 (Dasein) 분석이 수행된다.
어깨를 나란히 한 집단성과는 반대로 나는 <나-너>의 집단성을 제시하고자 노력하였다… 나는 미래의 신비로 향한 현재의 시간적 초월을 탐구해 보고자 하였다… 이것은 공통성이 전혀 없는 집단성이다. 이러한 집단성은 매개자가 없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 관계이며, 이러한 관계는 에로스를 통해 우리에게 제공된다.
여기서는 타자의 가까움 가운데서 전적으로 거리가 유지되며, 그러한 가까움과 이원성,
이 둘로부터 에로스의 감동적인 측면이 형성된다.
사랑 안에서의 의사 소통의 실패로 제안된 것이야말로 이 관계가 안고 있는 긍정적인 측면을 구성한다. 그러한 타자의 부재는 정확하게 말해서 타자로서의 그의 현존이다. 코스모스, 즉 플라톤의 세계와 맞서서 정신의 세계가 있다. 이 세계에서는 에로스가 함축하는 의미를 유의 논리로 환원하지 않을 뿐더러 자아는 동일자를, 타인은 타자를 대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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