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후기 후설: 시간, 신체, 상호주관성 그리고 생활세계
제1부와 제2부: 후설의 지향성 이론의 여러 중심적 견해들과 초월론적 현상학의 일반적 성격들에 대한 설명
제 3부:
시간, 신체, 상호주관성, 생활세계에 대한 논의,
그 각각은 구성적 과정에 대한 후설의 계속적 연구의 서로 다른 모습들을 설명
A. 시간
시간의식 분석은 현상학에서 가장 어렵고도 중요한 분야 중 하나
왜 시간성 연구가 중요한가?
첫째, 지향성에 대한 연구는 시간적 차원 고려 없다면 미완성,
시간성은 모든 대상 구성의 형식적 가능 조건,
둘째, 시간의식에 대한 분석은 의식 자체의 시간적 자기소여에 대한 설명
근원인상-파지-예지
시간적 대상의 예 -> 멜로디
어떻게 우리는 아직 혹은 더는 현재가 아닌 것을 의식할 수 있는가?
브렌타노의 대답은 상상력,
그러나 후설은 이러한 생각을 반직관적이라며 거부하고 대안으로 현재의 폭을 주장
근원인상primal
impression: 대상의 지금-국면을 좁게 향하는 구체적 작용의 요소,
그러나 근원인상은 시간지평 속에 놓여 있음.
그리고 이것은 파지retention와 예지protention를 수반
파지:
우리에게 방금 지나간 대상 국면에 대한 의식을 제공하는 지향
예지:
곧 일어나려고 하는 대상 국면에 대한 다소 불명확한 지향
파지와 예지는 회상recollection이나 예상expectation과 구별,
파지와 예지는 체험에 의존,
파지는 하나의 직관이지만 회상은 완결된 과거의 사건으로 향하는 현전화하는 지향적 작용,
파지적 변양은 수동적 과정인 반면 회상은 우리 자신이 시작할 수 있는 작용
파지와 예지는 근원인상과 비교하여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님,
그것들은 근원인상과 ‘동시에’
일어남 (p. 150 그림 1과 p. 151 그림 2 참조)
근원인상은 파지들의 연쇄 전체와 ‘동시에’
발생, 그러나 근원인상에 주어진 것은 파지에서 의식된 것과 동시에 발생한 것이 아님,
음들의 시간 순서는 보존됨,
그것들은 동시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잇따라 주어짐,
특정한 음은 현전하기를 그치고 과거가 됨,
그러나 그것은 시간적 순서에서 자신의 위치를 유지함
이러한 대상들에 대한 우리의 지각 자체도 시간적으로 구성됨,
우리의 작용과 경험들은 그 자체가,
생겨나고, 지속되고, 사라지는 시간적 통일체들,
즉 초월적 대상만이 아니라 주관적 작용들 또한 구성되고 현출됨
절대의식
그러나 구성된 시간 속에서 주어지는 것에 대한 우리의 의식 자체는 동일한 종류의 시간 속에서 주어지지 않음,
왜냐하면 이는 무한 소급으로 이끌 것이기 때문,
내적 시간의식은 단순히 시간에 대한 의식이 아니라 그 자체가 매우 특수한 성질을 지닌 시간적 과정
후설은 세 가지 다른 유형의 시간성을 다룸:
현출하는 대상의 객관적 시간,
작용이나 체험의 주관적 시간 혹은 선경험적 시간,
내적 시간의식의 선형상적인 절대적 흐름
결정적 난점은 주관적 시간과 절대적 흐름 간의 관계에 대한 설명,
자하비는 후설의 설명이 어렵고 다소 불가해하며 반성적 자기의식과 선반성적 자기의식과 연계되어야만 이해가능하다고 주장
내적 시간의식을 통해 우리는 의식의 흐름을 의식할 뿐 아니라 (선반성적 자기의식),
주관적 시간 속에서 경계지워진 시간적 대상으로서의 작용들을 의식하고 (반성적 자기의식)
객관적 시간 속에서의 초월적 대상들을 의식한다 (지향적 의식),
내적 시간의식은 그저 우리의 체험의 선반성적 자기의식의 또 다른 이름일 뿐
작용의 선현상적 존재,
즉 작용의 반성적 주제화 이전의 존재와 현상으로서의 작용의 존재를 구별하는 것이 필수적
시간에 대한 후설의 연구는 후설의 가장 어렵고도 근본적인 분석
시간의식의 절대적 흐름은 도대체 어떻게 현상학적 기술로 접근될 수 있는가?
후설은 절대적으로 구성하는 주관성을 익명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 기술,
반성으로도 환원으로도 결코 제거될 수 없는 익명성,
절대적 흐름은 그 어떤 대상과도 근본적으로 달라서 그에 대한 기술은 언어를 한계까지 몰고 감
후설도 체험된 주관성에 대한 연구에는 여러 가지 난점들이 따라다닌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음,
우리는 대상을 탐구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주관적 차원을 분석하고 해명할 수는 없음,
그러나 현상학이 절대적 주관성을 설명해야 하는 순간에 그것의 통상적 원리와 결별해야 한다는 이유로 현상학이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
기능하는 주관성의 익명성과 이해하기 어려움은 현상학적 방법의 출발점의 불합리성이나 무용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저 탐구되고 있는 것의 성격을 드러낼 뿐
지평과 현전
후설은 직관주의자인가?
해석학적 관점과 해체론적 관점 양쪽 모두에서 제기,
후설의 무전제성의 철학의 가능성에 대한 비판
후설의 현상학은 현전의 형이상학인가?
후설이 주관성을 순수한 자기현전으로 정의하고,
의미, 진리, 실재를 주관에게 직관적 직접성 안에서 주어질 수 있는 것과 등치시켰는가?
다양한 비판들:
1 주관의 자기소여란 결코 직접적이지 않고 언제나 시간,
세계, 언어, 신체 그리고 상호주관성에 의해 매개됨,
2 언어나 전통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의미,
진리, 실재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음,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개인을 초월하는 전통 안에 놓여 있기 때문,
3 현전이라는 개념 자체가 단순하고 일차적인 것이 아니라 구조적 복합성을 전제,
차이와 부재가 현전을 구성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님 -> 후설은 결코 현전에 대한 순진하게 예찬하지 않았음,
그는 가장 직접적인 경험으로 나타나는 것조차 습득된 지식 뿐 아니라 이전의 경험이 침투해 있고,
그것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음
후설은 1917-1921년이 시기에 정적 현상학과 발생적 현상학을 구분,
정적 현상학은 작용과 대상 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반면에 발생적 현상학은 다양한 유형의 지향성들의 근원과 형성을 탐구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설의 주된 관심은 어떤 사실적 발생이 아니라 그러한 형성이 종속된 본질 구조였음)
비판 1과 비판 2에 대한 재비판:
먼저 그것들은 ‘어떻게 의식이 자신을 의식할 수 있는가’의 형식적 의미에서의 자기소여와 ‘내가 누구인가’라는 실질적 의미에서의 자기인식을 혼동,
둘째, 후설의 무전제성의 기술은 무개념적이거나 비이론적인 설명이 아니라 사태 자체에 의해 규정되는 기술
비판 3에 대한 재비판:
후설이 직관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한 것은 사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지각된 대상의 초월을 강조,
직관적으로 현전하는 것이 실제로 단지 단일한 음영 뿐인데도 우리가 어떤 대상 자체를 지각하는 이유는 ‘지평 지향성’horizonal
intentionality 때문,
대상의 현전하는 음영에 대한 우리의 직관적 의식은 언제나 부재하는 음영들인 대상의 지평에 대한 지향적 의식을 동반,
그러나 한편 후설은 부재에 우선권을 주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않음,
누군가에 대한 부재이면서 현전적인 것과 관계맺지 않는 부재가 있다는 주장은 현상학적으로 옹호될 수 없음
근원인상은 언제나 시간적 지평 속에 놓여 있음,
고립된 근원인상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순수한 자기현전은 존재하지 않음
B. 신체
지각에 대한 후설의 분석에 널리 스며들어 있는 특징은 지각적 (시공간적)
대상의 관점적 소여에 대한 그의 반성,
대상은 결코 전체로 주어지지 않고,
언제나 특정한 음영 속에서 주어짐,
여기서 후설이 신체에 돌린 중요성의 이해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몇 가지 함축이 드러남
신체와 관점
현출은 언제나 누군가에 대한 무언가의 현출,
모든 관점적 현출은 언제나 그것의 소유격과 여격을 가짐,
어떠한 순수한 관점도 존재하지 않고,
어떠한 전지적 관점도 존재하지 않음,
오직 신체화된 관점만이 존재,
모든 관점적 현출은 경험하는 주관이 그 자체 공간 속에 주어져 있음을 전제,
주관은 오직 그것이 형체를 가짐으로써 공간적 위치를 소유하기 때문에 후설은 공간적 대상들은 신체화된 주관들에게만 나타날 수 있고,
오직 그러한 주관에 의해서만 구성될 수 있다고 주장,
또한 후설은 신체는 공간적 대상에 대한 지각과 더불어 공간적 대상과의 상호작용의 가능 조건이며,
모든 세속적 경험은 우리가 신체를 가짐으로써 가능하고 이러한 신체를 통해 매개된다고 주장
더 나아가 후설은 시공간적 대상에 대한 우리의 경험에 있어서,
움직임이 수행하는 역할에 주의를 기울이고,
결국 지각은 특정한 유형의 신체적 자기감응을 전제한다고 주장,
우리의 운동감각적 경험은 지각적 대상 구성의 문제이며 절대적으로 필수불가결한 것,
연속체에 대한 우리의 의식은 운동감각의 기여를 전제함
모든 지각은 이중의 수행을 포함:
한편에서 우리는 일련의 운동감각적 경험들을 갖고,
다른 한편에서 우리는 이러한 경험들에 기능적으로 관련된,
일련의 동기 부여된 지각적 현출들을 가짐,
지각적 지향성은 움직이는 주관,
즉 육체를 갖는 주관을 전제.
후설이 강조하는 논점은 우리가 움직임을 지각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바로 그러한 지각이 움직임을 전제한다는 것
주관으로서의 신체와 대상으로서의 신체
신체가 그 자체로 공간적 대상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신체가 공간적 대상들의 구성적 가능 조건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후설은 비주제적이고 선반성적으로 겪어진 신체의식과 대상으로서의 신체에 대한 차후의 주제적 경험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
기능하는 신체와 주제화된 신체를 구별하고 이것들 간의 정초 관계를 해명할 필요가 있음
신체는 관점적으로 주어지지 않고,
나는 나 자신에게 공간적 대상에 속한 것으로서 주어지지 않음,
원래 나는 대상으로서의 나의 신체에 대한 어떠한 의식도 갖고 있지 않음,
나는 그것을 지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것임.
신체가 움직이고 행동할 때,
나는 움직이고 행동하고 있음,
대상으로서의 신체의 구성은 육체를 벗은 주관에 의해 수행되는 것이 아님,
반대로 이는 기능하는 신체의 자기객관화임,
그것은 이미 신체적으로 존재하는 주관에 의해 수행됨
공간적 대상으로서의 이러한 신체적 구성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객관적 즉 상호주관적 공동 공간의 구성과 신체의 자기객관화 사이에는 밀접한 연관이 있음,
균질적 좌표 체계로서의 객관적 공간의 구성은,
기능하는 신체의 객관화를,
즉 다시 말해 나의 절대적 ‘여기’에 대한 맥락 의존적인 지시적 관계가 중단되는 기능하는 신체의 객관화를 전제
이러한 객관화는 어떻게 일어나는가?
하나의 동일한 감각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두 가지 방식으로,
즉 체험된 대상의 현출로서 그리고 체험하고 있는 연관된 신체적 부분에 위치지워진 감각함으로써 해석될 수 있음 (이러한 이중성을 가리키기 위해 후설은 감각과 정위감각이라는 용어를 사용)
정위감각은 신체화된 주관성 그 자체임.
즉 우리는 감각하는 것과 감각되는 것을 구별해야 함
신체의 독특한 두 측면:
나의 신체는 시각적으로 그리고 촉각적으로 나타나는 외면성으로서 뿐만 아니라 내면성으로서,
즉 의지적 구조와 감각함의 차원으로서 주어짐.
후설이 ‘내적 신체성’이라고 부르는 것과 ‘외적 신체성’이라고 부르는 것들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자기 자신의 신체를 만지는 것과 생명이 없는 사물이든 타인의 신체이든 자기 신체 이외의 것을 만지는 것 사이의 결정적 차이는 그것이 이중감각을 포함하는가에 있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만지고 있는 것과 만져지고 있는 것의 관계가 역전될 수 있다는 것,
왜냐하면 만지고 있는 것은 만져지고 있으며,
만져지는 것도 만지고 있기 때문,
이러한 가역성이 내면성과 외면성이 동일한 것의 상이한 나타남임을 입증해 주고 이중감각의 현상은 우리에게 신체의 이중적 본성에 대한 경험을 제공,
판단 작용과 같은 자기현현과는 대조적으로 나의 신체적 자기소여는 나의 외면성과의 맞닥뜨림을 허용,
이러한 경험은 타인경험에 있어 결정적,
나로 하여금 타자의 신체화된 주관을 인식하고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주체이면서 동시에 객체일 수 있는 신체의 바로 이러한 독특한 지위,
그리고 이중감각의 특징인 자아성과 타자성의 놀라운 상호작용
나의 왼손이 오른손을 만질 때,
나는 타자가 나를 경험하는 방식과 내가 타자를 경험하는 방식 둘 모두를 기대하는 방식으로 나 자신을 경험함
신체에 대한 우리의 탐구가 신체의 대상화를 수반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신체가 주관성이기를 완전히 멈춘다는 것을 함축하지 않음,
왜냐하면 만져진 손이 만짐을 느낀다는 이유때문
후설은 공간적 대상 구성과 신체 구성이 상호의존한다고 주장,
대상에 대한 탐구와 구성은 바로 그것 자체가 동시에 자기탐구와 자기구성을 함축,
신체는 우리에게 우선 주어지고 난 다음 차후에 세계를 살피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세계가 신체를 통해 살펴지는 것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지고,
신체는 세계에 대한 이러한 탐구 속에서 우리에게 드러남,
우리는 주제적이든,
비주제적이든, 신체적 자기인지를 수반하지 않고서는 물리적 사물들을 지각할 수 없음,
하지만 그 역도 타당함,
신체는 그것이 그 무언가와,
혹은 타자로서의 그것과 관계맺을 때에만 오직 그 자신에게 나타남
주관성은 그것이 세속적 실체들이건 타자들이건 본질적으로 그것 자신이 아닌 것을 향해 열려 있음,
주관성이 자신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열려 있음 속에서임,
우리가 우리에게 현재 존재하는 것은 세계에 현재 존재함 때문이고,
우리가 세계를 의식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주어져 있음 때문
후설은 상호주관성을 이해하는 문제에서도 우리의 신체가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다고 주장,
이것은 신체에 의한 구성적 수행에 상호주관성이 중요한 영향을 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 (이 문제는 다음 절에서 다룸)
후설은 자기중심적 공간의 구성은 기능하는 신체를 전제한다고 주장하고,
객관적 공간의 구성은 신체적 자기대상화를 전제한다고 주장,
구성하는 주관은 신체화되어 있고,
이러한 신체적 주관은 이미 언제나 자신을 세계에 속한 것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세계 없는 주관에 대한 논제들은 매우 문제적임,
후설은 신체에 대한 분석에서 [이념들 I]에서 그의 데카르트적 입장에 반대하는 논거들을 제공해 주고 있음,
그러나 후설이 모든 종류의 경험이 신체적 경험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님,
나는 단지 후설이 몸을 감각 경험에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그래서 모든 종류의 경험에 중대한 (정초해주는)
의미를 갖는 것으로 취하고 있다는 것만을 주장함
후설의 신체 분석이 주관성과 세계의 관계를 더욱 근본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폭넓은 함축을 지니는 초월론적 철학적 연구해 직면해 있다는 해석을 지지하는 두 개의 다른 논거들
1 후설에 의하면 감각은 비지향적,
후대 현상학자들은 이 지점을 비판,
형식도 내용도 없는 감각이란 올바른 현상학적 분석의 결과가 아니라 후설이 영국 경험론에서 물려받은 이론적 선입견을 반영할 뿐이라는 것,
일상생활에서 의미를 결여한 감각을 찾아내기란 매우 어려움,
만약 감각이 의미를 결여하고 있다면,
감각적 경험과 개념적 사유 사이의 매개는 자의적인 것이 되어버림,
이러한 비판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정당화됨,
그러나 후설의 감각 개념은 애매하기로 악명 높고 계속 변화함,
두 가지 다른 종류의 감각을 구별할 필요가 있음,
한편에서, 우리는 운동감각들을 가지는데 이들은 노에시스적으로 해석되어야 함,
이들은 신체적 자기인지를 구성하지만 대상을 지향하지는 않음,
다른 한편,
우리는 질료적 감각들을 가지는데 후설은 이를 특징감각들 혹은 관점자료들이라고 부름,
이러한 감각은 형식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의미를 결여하는 것도 아님,
이것들은 언제나 의미에 물들어 있고 운동감각과의 상호관계 속에서 형성되어 있음,
그럼에도 질료적 감각과 대상을 구별짓는 문제는 여전히 남음
2 초월론적 주관이 신체화되어 있다고 후설이 이야기할 때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것은 본래 칸트가 도입했던 초월론적 주관성 개념으로부터의 의미심장한 일탈임,
칸트에 따르면 초월론적 주관성은 초개인적인,
추상적으로 연역된 정당화의 원리인 반면에,
후설에서 그것은 구체적이고 유한한 주관을 의미,
이러한 배경에서 후설의 신체 분석이 후설을 초월론적 주관성의 탄생과 죽음에 대한 문제로 이끌었음,
후설이 주관성의 탄생과 죽음이라는 매우 어려운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했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과장일 것,
그러나 이러한 주제들에 대한 후설의 성찰은 그의 사유의 부단한 발전의 예,
이러한 문제가 현상학이 다룰 수 있는 주제인지 아니면 오직 사변적 형이상학으로만 언급될 수 있는 어떤 것인지는 열린 물음으로 남겨져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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