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도처에서 기능한다. (그런데) 이드라고 부르는 것은 얼마나 큰 오류인가? 도처에서 그것은 기계들인데, 이 말은 결코 은유가 아니다. 기계들의 연결에서 뭔가 생산된다. 은유들 말고, 기계의 결과들이. 모든 것은 기계를 이룬다. 더 이상 인간도 자연도 없다. 도처에 생산적 즉 욕망적 기계들, 분열증적 기계들, 유적 삶 전체다. 자아와 비-자아, 외부와 내부의 구별은 이제 아무 의미가 없다.
오이디푸스는 욕망 기계들의 환상적 탄압을 전제로 한다.
분열자가 특유하게 그리고 유적으로 체험하는 것은 결코 자연이라는 특유한 극이 아니라 생산과정으로서의 자연이다.
‘인간과 자연’,
‘산업과 자연’,
‘사회와 자연’이라는 구별관계는 자본과 분업을 전체할 뿐 아니라 자본주의적 존재가 자신에 대해 그리고 응고된 요소들에 대해 필연적으로 갖는 허위의식을 전제한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독립된 영역들 내지 회로들이란 없다.
생산은 즉각 소비이며 등록이고,
등록과 소비는 직접 생산을 규정하며,
그것도 생산 자체의 한가운데서 생산을 규정한다.
그리하여 모든 것은 생산이다.
생산의 생산,
즉 능동들과 수동들의 생산들.
등록의 생산,
즉 분배들과 좌표들의 생산들,
소비의 생산,
즉 쾌감들,
불안들, 고통들의 생산들,
모든 것은 생산이기에 등록들은 즉각 완수되고 소비되며,
소비들은 직접 재생산된다.
과정의 첫째 의미는 등록과 소비를 생산 자체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등록과 소비를 단 하나의 동일한 경과의 생산들로 만드는 것,
둘째, ‘인간’과 ‘자연’의 구별은 없다.
인간과 자연은 서로 마주보고 있는 두 항과 같은 것이 아니며,
오히려 생산자 및 생산물의 하나의 동일한 본질적 현실이다.
유물론적 정신의학은 분열자를 호모 나투라 (Homo natura)로 설정하며 다룬다.
과정의 셋째 의미는 과정이 목표나 끝으로 파악되면 안 되며,
과정 자체의 무한한 계속과 혼동되어서도 안 된다.
모든 과정의 목적은 그 과정의 영속화가 아니라 그 과정의 완성이다.
욕망 기계들은 이항규칙 또는 연합체제에 따르는 이항기계이다.
하나의 기계는 언제나 다른 기계와 짝지어 있다.
욕망은 흐르게 하고 흐르고 절단한다.
이 흐름들은 부분대상들에 의해 생산되며,
다른 흐름들을 생산하는 또 다른 부분대상들에 의해 부단히 절단되고,
또 다른 부분대상들에 의해 재절단된다.
모든 <대상>은 흐름의 연속성을 전제하며,
모든 흐름은 대상의 파편화를 전제한다.
연결 종합의 짝짓기,
즉 ‘부분대상-흐름’은 ‘생산물-생산하기’라는 또 다른 형식도 갖고 있다.
생산물에는 언제나 생산하기가 접붙으며,
바로 이런 까닭에 모든 기계가 기계의 기계이듯,
욕망적 생산은 생산의 생산이다.
생산하기를 항상 생산하기,
생산물에 생산하기를 접붙이기라는 규칙은,
욕망 기계들의,
또는 생산의 생산이라는 1차적 생산의 특성이다.
기관 없는 몸은 비생산적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연결 종합 내에서 자기 장소와 자기 시간에 생산하기와 생산물의 동일성으로서 생산된다 (분열증적 탁자는 하나의 기관 없는 몸이다).
그것은 비생산적이어서,
그것이 생산되는 그곳에,
이항-선형 계열의 제3의 시간에 실존한다.
그것은 생산 속에 끝없이 재주입된다.
기관 없는 충만한 몸은 반(anti)
생산에 속한다.
하지만 생산을 반생산과,
반생산의 요소와 짝짓는 것은 여전히 연결 종합 내지 생산적 종합의 한 특성이다.
욕망 기계들과 기관 없는 몸 사이에는 명백한 충돌이 일어난다.
기계들의 연결,
기계의 생산,
기계의 소음은 그 각각이 기관 없는 몸에게 견딜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기관-기계들에 맞서,
기관 없는 몸은 미끄럽고 불투명하고 팽팽한 자신의 표면을 대립시킨다.
편집증 기계의 발생은 욕망 기계들의 생산의 경과와 기관 없는 몸의 비생산적 멈춤의 대립 속에서 그 즉시 생겨난다.
편집증 기계는 욕망 기계들의 아바타이다.
즉 그것은 기관 없는 몸이 욕망 기계들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한에서 이 둘의 관계에서 귀결한다.
욕망적 생산과 사회적 생산의 병렬은 현상학적일 뿐이다.
사회적 생산의 형식들 역시 출산되지 않은 비생산적 멈춤,
경과와 짝지어진 반생산의 요소,
사회체라고 규정된 충만한 몸을 포함하고 있다.
자본은 자본가의,
아니 차라리 자본주의적 존재의 기관 없는 몸이다.
기관 없는 몸이 자신을 재생산하듯,
자본은 잉여가치를 생산하고,
싹이 터서,
우주 끝까지 뻗어 나간다.
둘째 종합—분리 종합 또는 등록의 생산 ……이건 ……이건
다만 생산은 자신이 생산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등록되지는 않는다.
등록의 생산의 법칙은 생산의 생산의 법칙과 같지 않다.
생산의 생산의 법칙은 연결 종합 또는 짝짓기였다.
하지만 생산적 연결들이 기계들에서 기관 없는 몸으로 이행할 때 (노동에서 자본으로 이행하듯),
그것들은 <자연적인 또는 성스러 전제>로서의 비생산적 요소와 관련해 하나의 분배를 표현하는 다른 법칙 아래 들어간다고 할 수 있다.
리비도를 욕망적 생산의 연결적 <노동>이라고 부른다면,
이 에너지의 일부는 분리적 기입의 에너지(누멘)로 변형된다고 말해야만 한다.
욕망의 등록은 오이디푸스 항들을 경유할까?
(No!) 기관 없는 충만한 몸은 반생산으로서 생산된다.
말하자면, 그것은 부모가 있는 생산을 함축하는 모든 삼각형화의 시도를 거부하기 위해서만 반생산으로서 개입한다.
셋째 종합—결합 종합 또는 소비의 생산 따라서 그것은 ……이다
등록은 생산으로 복귀하지만,
등록의 생산 자체는 생산의 생산에 의해 생산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소비는 등록을 뒤따르지만,
소비의 생산은 등록의 생산에 의해 등록의 생산 안에서 생산된다.
기입 표면에 주체의 차원에 속하는 어떤 것이 눈에 띄게 되니 말이다.
그것은 이상한 주체이다.
고정된 정체성이 없고,
기관 없는 몸 위를 방황하며,
늘 욕망 기계들 곁에 있고…
<따라서 그것은 나다,
따라서 그것은 내 것이다…….>
생산 에너지로서의 리비도의 일부가 등록 에너지(누멘)로 변형된 것과 마찬가지로,
등록 에너지의 일부는 소비 에너지(볼룹타스)로 변형된다.
바로 이 잔여 에너지가 무의식의 셋째 종합을,
<따라서 그것은 ……이다>라는 결합 종합 또는 소비의 생산을 추동한다.
어떻게 주체가 형성되는가?
<독신 기계>라는 이름을 빌려오자.
주체는 욕망 기계들 곁에서 여분으로서 생산된다는 말과 주체 자신은 이 제3의 생산 기계 및 이 기계가 행하는 잔여적 화해,
즉 <따라서 이것은 그것이었다>라는 놀라운 형식을 띤 소비의 결합 종합과 다르지 않다.
독신 기계는 무엇을 생산할까?
독신 기계를 통해 무엇이 생산될까?
내공량들이 답일 듯 싶다.
이 순수 내공들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기관 없는 몸은 알이다.
주체는 그 계열의 각 상태마다 태어나고,
한순간 그것을 규정하는 그 다음 상태에서 항상 다시 태어나며,
자신을 태어나게 하고 다시 태어나게 하는 이 모든 상태를 소비한다 (체험된 상태가 이 상태를 사는 주체에 비해 일차적이다).
잔여로서 생산된 주체는 기계에 의해 점유된 중심이 아닌 가장자리에,
고정된 정체성 없이 있으며,
중심에서 늘 벗어나고,
자신이 경유하는 상태들로부터 귀결된다.
정체성이란 본질적으로 우연한 것이다.
자신을 인물들과 동일시하지 말고,
역사의 이름들을 기관 없는 몸 위의 내공 지대들과 동일시하라.
(그리하여) 그는 단번에 세계사를 소비한다.
우리는 분열자를 호모 나투라로 규정하면서 시작했는데,
결국 분열자는 호모 히스토리아다.
유물론적 정신의학은 기계론에 욕망을 도입하기,
욕망에 생산을 도입하기라는 이중 작업으로 정의된다.
분열증 이론의 특징은 삼위일체의 정식을 구성하는 다음 세 개념이다.
해리 (크레펠린),
자폐증 (블로일러),
시-공간 또는 세계-내-존재 (빈스방어).
(그러나) 프로이트는 자아라는 좁은 관점에서 떠나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자아에 대한 그의 삼위일체 공식,
오이디푸스, 신경증, 즉 아빠-엄마-나라는 공식 때문이다.
정신분석의 위대한 발견은 욕망적 생산,
무의식의 생산들의 발견이었다.
하지만 오이디푸스와 더불어 이 발견은 하나의 새로운 관념론에 의해 금새 은폐되었다.
욕망의 논리는 첫걸음부터 그 대상을 놓치고 있다.
우리에게 생산과 획득 중에서 선택하라는 플라톤의 나눔이 그것이다.
우리가 욕망을 획득 쪽에 두자마자 욕망에 대해 하나의 관념론적 착상을 갖게 된다.
이 착상은 욕망을 무엇보다도 결핍,
대상의 결핍,
현실적 대상의 결핍이라고 규정한다.
실제로 욕망이 현실적 대상의 결핍이라면,
욕망의 현실 자체는 환상된 대상을 생산하는 <결핍의 본질>
속에 있다.
이렇게 되면 욕망은 생산으로 파악되고 있으면서도 환상의 생산으로 파악되는 것이며,
정신분석에 의해 완전히 설명한 것이 된다.
요컨대 욕망적 생산을 환상의 생산으로 환원하고 나면,
욕망을 생산으로,
<산업적 생산>으로 정의하지 않고 결핍으로 정의하는 관념론적 원리의 모든 귀결을 끌어내는 데 그치고 만다.
욕망이 생산한다면 그것은 현실계를 생산한다.
욕망은 수동적 종합들의 집합이다.
현실계는 수동적 종합들에서 생겨난다.
현실계는 무의식의 자기-생산으로서의 욕망의 수동적 종합들의 결과물이다.
욕망은 아무것도 결핍하고 있지 않다.
욕망은 자신의 대상을 결핍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욕망에 결핍되어 있는 것은 바로 주체이다.
또는 고정된 주체를 결핍하고 있는 것이 욕망이다.
욕망과 그 대상은 일체이며,
즉 기계의 기계로서의 기계이다.
욕망은 기계이며,
욕망의 대상 역시 연결된 기계이다.
욕망의 대상적 존재란 현실계 그 자체이다.
욕망은 필요들에 기대고 있지 않으며,
역으로 필요들이 욕망에서 파생된다.
욕망은 아주 적은 것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안다.
이 적은 것은 이들에게 남겨진 것이 아니라 이들이 끊임없이 빼앗긴 것이며,
주체의 심장부에서 결핍을 구성해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대상성,
인간의 대상적 존재—그에게 욕망하기란 생산하기,
현실에서 생산하기이다—를 구성해 온 것이다.
현실계는 불가능하지 않다.
반대로 현실계 속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고,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된다.
결핍은 사회적 생산 속에서 설비되고 조직된다.
결핍은 결코 일차적이지 않다.
생산은 결코 그에 앞선 결핍에 따라 조직되지 않는다.
한편에 현실의 사회적 생산이 있고 다른 한편에 환상의 욕망적 생산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두 생산 사이에 설립될 수 있는 법한 것은 내입(introjection)과 투사라는 이차적 연줄들뿐이다.
맑스-프로이트의 병렬은 어디까지나 불모이고 무의미하다.
사회적 생산은 특정 조건들에서 단지 욕망적 생산 자체이다.
욕망 기계들과 사회/기술 기계들 사이에는 결코 본성의 차이가 없다.
구별이 있긴 하지만,
그건 단지 크기의 비율에 따른 체제의 구별이다.
그것들은 체제의 차이를 제외하면 같은 기계들이다.
기술 기계들의 고유한 극한은 마모이지 고장이 아니다.
(그러나) 욕망 기계들은 작동하면서 끊임없이 고장나며,
고장 난 채로만 작동한다.
욕망 기계들이 반생산을 생산하는 것은 자신들 자체를 통해서인 데 반해,
기술 기계들에게 고유한 반생산은 경과의 재생사의 외래적 조건들 속에서 생산될 뿐이다.
욕망적 생산은 본원적 억압의 장소인 반면 사회적 생산은 탄압의 장소이며,
또한 후자로부터 전자로 <고유한 의미의>이차적 억압과 유사한 뭔가가 실행된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상이한 두 체제에 속해 있긴 해도 같은 기계들이다.
모든 사회적 생산은 특정 조건들에서 욕망적 생산에서 유래한다.
사회 기계 또는 사회체는 토지의 몸,
전제군주의 몸,
돈의 몸일 수 있다.
그것은 결코 기관 없는 몸의 투사가 아니다.
기관 없는 몸은 오히려 탈영토화된 사회체의 궁극적 잔여물이다.
실상 자본주의는 두 종류의 흐름,
즉 돈-자본이라는 형식을 지닌 생산의 탈코드화된 흐름과 <자유노동자>라는 형식을 지닌 노동의 탈코드화된 흐름이 만나서 탄생한다.
자본주의는 탈코드화의 문턱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
이 문턱은 사회체를 해체하여 기관 없는 몸을 출현시키고,
또 이 몸 위에서 탈영토화된 장 속에 있는 욕망의 흐름을 해방시킨다.
이런 의미에서 분열증은 자본주의 기계의 생산물이다.
흐름들의 탈코드화,
사회체의 탈영토화는 자본주의의 가장 본질적인 경향성을 형성한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자신의 극한에 접근하는데,
이 극한은 참된 분열증적 극한이다.
자본주의는 기관 없는 몸 위에서 탈코드화된 흐름들의 주체인 분열자를 온 힘을 다해 생산하는 경향성이 있다.
자본주의는 자신의 극한으로 향하는 동시에 끊임없이 이 극한을 억지한다.
맑스는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와 잉여가치의 절대적 증대라는 이중 운동을 상반된 경향의 법칙이라 불렀다.
이 법칙의 따름정리로서,
흐름들의 탈코드화 내지 탈영토화와 이 흐름들이 격렬하고 인조적인 재영토화라는 이중 운동이 있다.
분열자는 자본주의의 극한에 매달려 있다.
그는 자본주의의 발전된 경향성이요 잉여 생산물이요 프롤레타리아요 또 죽음의 천사이다.
기계는 절단들의 체계라고 정의된다.
절단들은 고려되는 성격에 따라 다양한 차원에서 작동한다.
첫째로 모든 기계는 이 기계가 자르는 연속된 물질적 흐름 (휠레)과 관련을 맺고 있다.
휠레는 관념 안에 있는 물질의 순수한 연속성을 가리킨다.
절단은 연속성에 대립하기는커녕 연속성의 조건을 이루며,
그것이 절단하는 것을 관념적 연속성으로서 내포하거나 정의한다.
기계는 흐름을 생산한다고 상정된 다른 기계에 연결되는 한에서 흐름의 절단을 생산한다.
요컨대 모든 기계는 자신이 연결되는 기계와 관련해서는 흐름의 절단이지만,
자신에 연결되는 기계와 관련해서는 흐름 자체 또는 흐름의 생산이다.
이런 것이 생산의 생산의 법칙이다.
둘째로 모든 기계는 자기 안에 가설하고 비축해 놓은 일종의 코드를 지니고 있다.
하나 또는 여러 기표 사슬을 감고 있는 무의식의 코드라는 저 풍요로운 영역을 발견했고,
그리하여 정신분석을 변모케 한 것은 라캉의 공적이다.
하지만 이 영역은 그 다양체 때문에 너무도 이상해서,
하나의 사슬 또는 심지어 하나의 욕망적 코드에 대해 말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할 정도다.
이 사슬들은 기호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기표 사슬이라고들 하지만,
이 기호들 자체는 의미화를 행하지 않는다.
코드는 하나의 언어활동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전문어,
열린 다의적 구성체와 유사하다.
기호들은 코드 안에서 아무 본성이건 가질 수 있으며,
기호들의 받침대와는 무관하다.
기호들은 아무 계획도 없으며,
모든 단계에서 또 모든 연결에서 작업한다.
욕망을 생산하는 것이 기호의 유일한 사명이며,
이 점은 그것이 작동하는 모든 방향에서 그렇다.
욕망 기계의 셋째 절단은 여분-절단 또는 잔여-절단으로, 이것은 기계 곁에 하나의 주체를,
기계의 인접 부품을 생산한다.
다른 두 절단과 마찬가지로,
주체 절단은 결핍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주체에게 몫으로 돌아오는 부분,
주체에 여분으로 돌아오는 수입을 가리킨다.
절단들은 분석의 사실이 아니다,
절단들 자체가 종합들이다.
나눔들을 생산하는 것은 종합들이다.
욕망 기계는 은유가 아니다.
그것은 이 세 양태에 따라 절단하고 절단되는 자이다.
첫째 양태는 연결 종합에 관련되며,
리비도를 채취 에너지로 동원한다.
둘째 양태는 분리 종합에 관련되며,
누멘을 이탈 에너지로 동원한다.
셋째 양태는 결합 종합에 관련되며,
볼룹타스를 잔여 에너지로 동원한다.
바로 이 세 양상 아래에서 욕망적 생산의 경과는 생산의 생산인 동시에 등록의 생산이고 소비의 생산이다.
채취하기, 이탈하기,
<여분 남기기>--이것이 생산하기이며,
욕망의 현실적 작업들을 수행한다.
실사로서 사용되며,
하나는 물론 여럿도 넘어서고,
하나와 여럿의 술어 관계를 넘어서는 다양체라는 범주만이 욕망적 생산을 설명할 수 있다.
욕망적 생산은 순수 다양체,
말하자면 통일체로 환원될 수 없는 긍정이다.
더 이상 우리는 기원의 총체성도 목적지의 총체성도 믿지 않는다.
우리는 총체성들을 곁으로 밀려났을 때에만 믿는다.
기관 없는 몸은 하나의 전체로서 생산되지만,
다만 자기 장소에서,
생산과정 속에서,
그것이 통일하지도 총체화하지도 않는 부분들 곁에서 생산된다.
전체는 부분들과 공존할 뿐 아니라,
부분들에 인접해 있고,
그 자체로 따로 생산되지 않으며,
부분들에 적용된다.
부분대상들이 그 자체로 오이디푸스를 날려 보낼 힘을 갖고 있고,
오이디푸스에서 무의식을 재현하고 무의식을 삼각형화하고 모든 욕망적 생산을 포획하려는 어리석은 야망을 빼앗기에 충분한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여기서 제기되는 물음은 전-오이디푸스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오이디푸스와의 관계에서 얼마만한 상대적 중요성을 지지고 있는가 하는 점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욕망적 생산의 절대적으로 무오이디푸스적 성격이다.
부분대상들은 비-인물적인 하나의 흐름 내지 휠레에서 채취를 통해 현실적으로 생산되며,
다른 부분대상들에 자신을 연결함으로써 이 흐름 내지 휠레와 소통한다.
무의식은 인물들을 모른다.
부분대상들은 부모라는 인물의 대표가 아니며,
가족 관계들의 받침대도 아니다.
부분대상은 욕망 기계들 속 부품들이고,
오이디푸스의 형상 속에 자신을 등록하는 것에 비해 환원 불가능하며 일차적인 생산의 경과 및 생산관계들에 관련된다.
욕망 기계,
부분대상은 아무 것도 재현하지 않는다.
그것은 재현적이지 않다.
중요한 건 욕망 기계들의 모든 작동을 오이디푸스의 제한된 코드로 복귀시키지 않는 것이다.
아이가 자기 삶을 체험하고 또한 산다는 게 뭔지 자문하는 것은 부분대상들 한가운데서요 욕망적 생산의 비가족적 관계들 안에서이다.
아이는 형이상학적 존재다.
데카르트의 코기토에서처럼 부모는 이 물음 속에 없다.
무의식은 고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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