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통과 철학
서양의 주류 철학은 고통의 문제에 크게 관심을 쏟지않았다… 고통은 언제나 악의 문제와 더불어 변신론 theodicy (신정론)의 테두리에서,
말하자면 하나의 논리적 문제로 취급되었다…
변신론의 맥락에서는 인간의 고통이 실제로 절실한 현실적 문제로 취급되기보다는 신적 섭리와 계획의 한 부분으로 ‘설명되어’버렸다. 고통에 대한 감수성보다는 합리적, 이성적 관심이 고통의 문제를 다루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근대 변신론을 대표하는 라이프니츠와 헤겔도 서양의 이러한 이성 중심적 전통에 서 있고 이 전통을 더욱더 강화하였다.
2. 레비나스 철학과 고통의 문제
고통의 문제는 레비나스의 철학적 논의에 가장 중요한 배경으로 깔려 있다… 고통의 문제와 관련해 레비나스 철학이 가질 수 있는 의미는 무엇보다도 변신론의 종말 이후에도 신과 도덕성의 이념을 여전히 유지하면서 인간의 고통을 생각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레비나스는 이렇게 못 박는다. 고통은 그 자체로는 어떠한 의미도 없고, 쓸모도 없는 경험이다. 고통 속에는 어떠한 내재적 합목적성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이성을 통해서 고통을 해명하거나 정당화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사람이 고통 없이 진정한 사람이 될 수 없음을 다른 맥락에서는 또다시 강하게 역설한다.
고통은 주체의 주체성에 핵심적인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고 그는 생각한다… 진정한 의미의 주체는 타인에 대해 열려 있고 타인을 위해 고통받을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고통은 말하자면 주체성의 핵심이다.
3. 고통은 쓸모 없는 것인가?
고통에는 ‘생물학적 합목적성’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레비나스는 완전히 부인하지는 않는다.
고통에는 생물학적 합목적성 외에도 문화적 기능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레비나스는 지적한다…
“고통은 또한 개인의 성품을 단련시킨다”고 그는 말한다.
고통이 지닌 합목적성,
합리적 기능 가운데 가장 널리 인정받는 것은,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고통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레비나스는 한편으로는 이 유용성을 통째로 거부하지 않는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이러한 유용성을 통해서 고통을 합리적으로 정당화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유용성 또는 목적성에 대한 논의는 근본적으로 기술적 합리성의 이념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기술적, 도구적, 목적론적 관점에서 볼 때 고통이란 이 세계 안에 주어져 있는 것, 따라서 존재 질서 안에서 파악하고 이해해야 할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고통도 이와 같은 관점에서 정당화되지 않을 것이 없다. 레비나스가 볼 때 이것은 고통의 현상을 근본적으로 오해한 것이다. 레비나스는 존재 질서 안에서의 질서 유지를 위해 고통을 정당화하는 것을 뛰어넘어 고통의 현상 자체를 그려냄으로써 고통이 지닌 애매한 얼굴과 맞닥뜨리고자 시도한다.
4. 고통의 현상학
고통은 레비나스에 따르면 종합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고통은 ‘너무 많음’ ‘너무 지나침’
또는 ‘벗어남,’
따라서 외재적인 것, 내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것, 낯선 것으로서 ‘수용 불가능성’을 의미한다.
한편으로 고통은 ‘성질’이다… 고통은 다른 한편으로는 ‘양태,’ 즉 하나의 존재 방식이다.
고통 속에서는 우리는 우리의 주도권을 상실한다…
고통은 순순하게 ‘당하는 것,’ 어떠한 도피처도 없이 ‘굴복당하는 것,’ 굴복 그 자체에 굴복하는 것이다.
고통은, 레비나스가 좋아하는 표현을 쓰자면, ‘수용성보다 더 수동적인 수동성’이다.
고통의 ‘본질’은, 만일 고통에 본질이 있다면, 그것은 부조리, 무의미, 반의미 또는 반이성이다… 즉 고통은 의미의 문제이고, 현상으로서의 고통 그 자체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이성적, 합리적 논의를 통해서도 고통이 지닌 애매성의 성격을 벗겨낼 수가 없다.
5. 변신론의 몰락
아우슈비츠 사건은 레비나스에게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을 말해준다. 첫째, 고통과 변신론 사이에는 불균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우슈비츠가 명백하게 보여주었다… 둘째, 만일 죽음의 수용소에 하나님이 부재했다면 악마가 수용소 안에 분명하게 현존하였다… 칸트는 인간 이성이나 감성은 그 자체로는 결코 악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레비나스는 그러나 다르게 생각한다. 인간 이성은 악하며 심지어는 악마적임을 20세기의 경험은 보여주고 있다고 본다.
레비나스는 변신론을 이론적으로 논박하고자 하지 않는다.
20세기 역사 자체가 변신론의 허위성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변신론의 종말은 아우슈비츠 이후에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라 단순한 ‘사실’이 되었다.
고통이 만일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라면 고통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고통의 문제는 앞에서 말한 대로 결국에는 의미의 문제이고 이것은 삶의 의미와 직결되어 있는 물음이다…
이러한 물음은 레비나스 자신이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변신론의 종말 이후에 종교성과 인간의 선의 윤리가 여전히 유지할 수 있는 의미”에 관한 물음이기도 하다.
6. 고통, 윤리, 주체성
윤리적인 것이 존재론적인 것보다 선행한다… 심지어 윤리적인 것이 존재론적인 것의 근거…
윤리적인 것의 선행성 또는 윤리적인 것의 우의성… 윤리적인 것, 즉 타인에 대한 나의 책임은 레비나스에게는 모든 의미의 원천이다…
오직 윤리적인 것만이 삶과 신앙,
도덕적 선에 의미를 줄 수 있다고 레비나스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레비나스의 고통의 현상학과 해석학은 고통의 윤리학으로 이어진다.
고통은 어떤 수단을 통해서도 나에게로 환원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 수용 가능성 가운데 타자성의 열림이 가능하다… 그러나 타자와의 관계의 열림은 하나의 가능성일 뿐, 그 자체 실현된 현실은 아니다. 이것이 완전한 열림이 되기 위해서는 고통받는 사람의 호소에 대한 반응, 요청에 대한 응답이 있어야 한다.
가진 것이 없는 자, 가난한 사람, 억압받는 사람 또는 이방인, 요컨대 고통받는 사람의 호소에 응답한다는 것은 그를 위해 책임을 진다는 것,
그의 짐을 대신 들어준다는 것을 뜻한다. 타인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것,
타인의 짐을 대신 짊어져준다는 것,
이것을 레비나스는 순수한 의미에서 ‘윤리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윤리적인 것,
또는 윤리적이 된다는 것은 타인의 고통과 고난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레비나스는 고통은 고통 가운데서 인간 상호간의 윤리적 전망을 열어줄 뿐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위해 “내가 받는 정당한 고통”은 무의미한 고통을 의미 있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엿보인다.
먼저 오해의 여지를 없애자. 레비나스가 말하고자 한 것은 “고통은 윤리적 관점에서 볼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주장은 “고통은 인간 상호간의 윤리적 전망을 열어준다”는 것이다…
고통에 관심을 둘 때, 고통으로 고생하는 사람의 신음과 한탄에 귀 기울일 때, 바로 그 때 삶에 대한 윤리적 전망이 열릴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레비나스가 우리에게 주고자 한 가장 근본적인 메시지였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관심이 우선이고 그의 도덕법칙에 대한 존경이나 행복, 또는 공동체의 보존과 같은 것은 윤리에 대해 부차적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레비나스가 ‘얼굴의 현현’에 그렇게 강조를 둔 까닭이 무엇이었던가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얼굴은 왕이나 독재자 또는 부자의 얼굴이 아니라 가난한 자, 고아, 과부, 나그네의 얼굴, 즉 고통받는 사람의 얼굴이다… “윤리는 보는 것이다.”
레비나스의 두번째 논제도 첫번째 것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도발적이다. 고통은, 그 자체로는 무의미하지만 타인의 고통을 위한 고통이라면 의미 있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와 관련해서 레비나스는 “타인에게 있는 고통”과 “나에게 있는 고통”의 근본적인 차이를 역설한다.
이와 같은 상황을 레비나스는 “나는 타자에게 사로잡혀 있다” “나는 타자를 위해 핍박받는다” “나는 타인의 고통에 노출돼 있다”
또는 “상처와 불법에 노출된 가운데,
책임에 적합한 감정 가운데, 내 자신은 대치할 수 없는 자로,
타인들에게 헌신된 자로, 물러날 수도 없이, 따라서 그 자신을 바치고 고통받고 (타인에게) 주기 위해서 육신을 입은 자로,
(그것을 위해)
부름받았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여기서 ‘줌’과 ‘바침’은 어떤 정신적 행위가 아니라 몸으로 하는 행위임을 레비나스는 강조한다… 줌과 바침은 “마음의 선물이 아니라 자신의 입에 든 빵,
입에 가득한 빵을 내어주는 것이다.
그것은 열어줌이되,
자신의 지갑을 열어주는 것일 뿐 아니라 자신의 집 문을 열어주는 것이다”…
줌과 바침,
그리고 고통의 이념은 앞 장에서 본 것처럼 ‘대속’
이념에서 절정에 이른다. “각자에 의해 (책임 있는 자로)
고발당함 가운데,
각자에 대한 책임은 대속의 지점에까지 나아간다. 주체는 하나의 볼모이다.”
“타인을 위한 볼모,”
이것이 타인과의 연대성을 위한 조건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주체성, 즉 주체의 주체됨은 타인을 대리할 수 있는 능력에 의해 구성된다. 타인의 수용, 타인의 짐을 대신 짊어짐이 주체성의 핵심이라고 레비나스는 생각한다. 수브엑ㅌ툼sub-jectum, 즉 주체는 타인의 고통과 잘못을 짊어짐으로써 이 세계를 아래에서 떠받치고 지탱한다.
다시 말해 존재의 고통과 잔인성을 대신 속죄하고 짊어지는 존재가 곧 ‘주체’라는 것이다.
이러한 대속적 고통은 무의미한 고통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레비나스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타자를 위한 것”이 곧 의미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7. 윤리와 고통, 대속적 고통, 나의 고통
이제 레비나스의 입장이 담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토의해보자. 세 가지 문제가 내 생각으로는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 윤리는 반드시 고통을 수반하는가 하는 물음이다. 윤리적 삶은 레비나스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고통을 수반한다. 고통 없이는 윤리적 삶이 실현될 수 없다고 하는 점에서는 칸트와 레비나스가 옳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두번째 문제는 대속적 고통에 관한 것이다…
‘주체’가 된다는 것,
‘주체’로서 선다는 것은 레비나스에 따르면 타인에 대해서, 타인을 대리해서 대신 짐을 짊어질 뿐 아니라 심지어 타인의 잘못을 자신의 잘못으로 수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내가 보기에는 유대교와 기독교 전통의 메시아 (그리스도) 이념을 철학적으로 번역한 것이다. 유대교에 관한 한 저서에서 레비나스는 “메시아, 그것은 나이고,
내가 된다는 것, 그것은 곧 메시아가 된다는 말이다”라고 말했다.
메시아는 “타인의 고통을 짊어진, 고통받는 의인”이다. “타인의 고통이 부과한 짐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
이것이 자신성을 정의해준다”는 말을 레비나스는 여기에 덧붙인다.
그리스도교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내가 된다는 것,
그것은 곧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내가 어떻게 그리스도가 될 수 있는가?
질서가 법과 경제,
정치의 논리로만 정말 유지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정의로움, 공정성, 사랑, 신뢰, 희생, 반대 급부에 대한 고려 없이 그냥 줌, 베풂, 이와 같은 것들이 있어야 존재 질서 자체가 유지될 수 있지 않을까? 존재 질서를 가능케 하는 요소들은 존재 질서 ‘안’에 속한 것이 아니라 ‘존재와 다른 것’으로 ‘존재 사건 저쪽에’ 있다는 것을 레비나스는 강하게 주장한다.
세번째 문제가 남아 있다… 그의 관심은 내가 받는 고통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받는 고통에 있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레비나스의 관심은 타인이 받는 고통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고통받는 개인이 고통 중에서… 자신의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는 과정을 무시할 수가 없다…. 욥의 고통이 완전히 무의미한 고통이었다고 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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