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주제와 구도
시간은 주체가 홀로 외롭게 경험하는 사실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자체임을 우리는 이 강의를 통해 보여 주고자 한다.
이 논제는, 한편으로 고독의 개념을 깊이 이해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시간이 고독에 제공하는 기회를 살펴볼 때 그 근거를 확보할 수 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분석은 인간학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것이다.
우리는 실제로 존재론적 문제와 존재론적 구조가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고독을 존재의 한 범주로 제안하고자 한다.
우리는 미리 주어진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고독에 접근하고자 하는 하이데거의 입장을 처음부터 거부한다… 하이데거는 타인과의 관계를 현존재 (Dasein)의 존재론적 구조로 설정한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 관계가 존재 드라마나 실존 분석론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타자는 서로 함께 있음 (Miteinandersein)의 본질적인 상황 속에서 나타난다.
함께 (mit)라는 전치사는 여기서 관계를 묘사한다…
하지만 이것은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
관계가 아니다…
타자와의 근원적인 관계는 함께라는 전치사를 통해 묘사될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다. 이 강의를 통해 그것을 보여 줄 수 있기를 희망한다.
우리는 고독의 존재론적 뿌리를 찾아봄으로써 고독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고자 한다. 고독을 벗어날 길이 될 수 없는 것을 먼저 확인해 두자. 지식은 그러한 길이 될 수가 없다… 무아경도 그와 같은 방법은 아니다…
이 모든 관계는 타자의 소멸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고통과 죽음의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죽음 앞에서 나타나는 이원성이 어떻게 타자와 시간과의 관계가 되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마지막으로 보여 주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오히려 통일성 안에 용해할 수 없는 다원론을 지향한다.
이것은 무모할지 모르나 어쨌든 파르메니데스와 결별하자는 시도이다. (파르메니데스에 따르면 존재는 하나요, 불변하는 것이다.
이와 대립되는 생성은 다수요, 변화하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존재를 하나로 보는 존재 일원론에 대해서 존재 다원론을 내세우고자 한다.)
존재의 고독
우리는 타자와 함께 존재한다… 하지만 나는 타자가 아니다. 나는 완전히 혼자이다… 나의 존재함은 어떤 지향성도 어떤 관계도 없는 절대적으로 자동사적인 요소를 구성한다… 내가 존재하는 한, 나는 단자 (monade)이다… 내 인식의 확장이나 표현 수다의 확장은 나의 ‘존재함’의 관계,
가장 내밀한 관계에 대해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존재함’은 모든 관계, 모든 복수성을 거부한다. 그것은 존재자 (existant) 외에 아무도 보지 않는다… 고독은 존재자와 그의 존재 작업 사이의 뗄 수 없는 통합으로 나타난다…
고독은 존재자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에 있다. 고독이 초월 (극복)되는 상황을 이해하는 것은 존재자와 그의 ‘존재함’ 사이의 연결 원칙을 시험해 보는 것이다.
이것은 존재자가 존재를 자신의 것으로 떠맡는 존재론적 사건으로 가는 것이다. 존재자가 ‘존재함’을 자신의 것으로 떠맡는 사건을 나는 홀로서기 (hypostase)라고 부른다.
존재자 없는 존재
존재와 존재자의 구별은 [존재와 시간] 가운데서 가장 심오한 사상으로 보인다. 하지만 하이데거에게는 구별이 있을 뿐 분리가 없다.
존재는 언제나 존재자 속에 붙잡혀 있다… 하이데거는 존재자 없는 존재를 인정할 수 없었다고 나는 믿는다… 나도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다. 존재하는 것은 존재자이다.
그런데 우리는 존재자 없는 존재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가?...
모든 사물의 부재는 하나의 현존으로 돌아간다.
우리가 접근하려는 존재는 명사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자체가 동사인 존재 작업 자체이다… 그것은 존재하는 대상에 결코 매여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것을 익명적이라고 부른다.
존재자 없는 존재는 출발점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존재 성격을 우리는 영원이란 개념으로 표시할 수 있다.
‘영원한 주체’는 하나의 형용사 모순이다. 왜냐하면 주체는 이미 하나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있다라고 이름붙인 이 ‘존재자 없는 존재’는 홀로서기가 발생하는 자리이다… 이것은 ‘무가 없는 존재’, 즉 ‘열어 줌도 없고 벗어날 수도 없는 존재’라는 개념을 가능케 해 준다…
‘어쩔 수 없는 존재’, ‘탈출구 없는 존재’는 존재의 근본적인 부조리를 보여 준다. 존재는 악이다.
존재는, 유한하기 때문이 아니라 한계가 없기 때문에 악이다. 하이데거는 불안을 무의 경험으로 보았다.
하지만 만일 죽음이 무라면 죽을 수 없다는 사실 자체가 불안이 아닐까?
홀로서기
의식이 왜 생겨나는가 하는 것은 우리로서는 뚜렷이 설명할 재간이 없다. 형이상학에는 물리학이 없다. 우리는 그저 홀로서기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 줄 수 있을 뿐이다.
<존재하는 어떤 것>
(존재자)의 출현으로 익명적인 존재 사건의 중심부에 전혀 새로운 전환이 일어난다… 존재자는 존재 지배를 통해서 홀로 서게 된다. 하지만 홀로, 독점적으로 존재를 지배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홀로서기의 사건, 이것은 현재이다. 현재는 자기로부터 출발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기로부터의 출발이 곧 현재이다… 현재는 시작한다.
그것은 시작 자체이다.
홀로서기를 현재로 설정하는 것은 존재 안에 시간을 끌어들이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비인칭적 (비인격적)인 존재의 무한 속에 균열
(찢음)을 일으키는 현재의 기능이다. 현재의 기능은 존재론적 도식과 같다.
현재는 <자기로부터 출발>을 실행하는 기능이다. 바로 이 때문에 현재는 항상 소멸한다… 소멸은 그러므로 시작의 근본적인 형식일 것이다.
현재의 홀로서기는 홀로서기의 한 순간일 뿐이다.
시간은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다른 관계를 보여 줄 수 있다. 시간은 타인과 관계하는 사건 자체이며 현재의 일원론적 홀로서기를 넘어서서 다원론적 존재를 가능케 해 준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
현재, <나> -- 홀로서기는 자유이다. 존재자는 존재의 주인이다.
존재자는 그의 존재에 주체의 남성적 힘을 행사한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어떤 것을 소유한다.
최초의자유, 그것은 아직 자유로운 선택의 자유가 아니라 시작의 자유다.
이제 어떤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존재가 있다. 모든 주체 속에 담긴 자유.
주체가 있고 존재자가 있다는 사실 속에 담긴 자유.
존재에 대한 존재자의 지배의 자유.
고독과 홀로서기
존재자와 존재 사이의 뗄 수 없는 일체성을 고독이라고 볼 때, 고독은 타인과의 모종의 관계를 전혀 견제할 필요가 없다.
고독은 타인과의 선행된 관계의 결핍으로 보이지 않는다. 고독은 홀로서기의 작업과 관련이 있다. 고독은 존재자의 일체성 자체이며, 존재 안에서 그 존재로부터 어떤 형식을 얻는 존재자가 있다는 사실이다. 주체는 하나이기 때문에 홀로 있다. 시작의 자유, 존재에 대한 존재자의 지배가 가능하려면, 요컨대 존재자가 존재하려면 고독이 있어야 한다.
고독은 절망이고 버림받음일 뿐 아니라 남성적인 힘이고 오만이며 주권이다.
고독과 물질성
하지만 존재에 대한 주체의 이러한 지배,
존재자의 이러한 주권에는 변증법적 전환이 일어난다.
존재자는 자신에게 몰두한다.
자신에게 이렇게 몰두하는 방식, 그것이 곧 주체의 물질성이다. 동일성은 자신과의 무해한 관계가 아니라 자신에게 얽매임이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 언제나 자유롭지만 자신과의 관계에서는 언제나 얽매임이다.
나는 책임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존재는 소유와 겹쳐진다. 즉 나는 내 자신에 의해 차단된다. 바로 이것이 물질적 존재이다… 물질성은 필연적으로 존재자의 자유 안에서의 주체의 출현에 함께 수반되는 것이다. 신체를 이렇게 자아와 자기 사이의 관계가 생기는 구체적인 사건으로서의 물질성으로부터 이해한다는 것은 신체를 일종의 존재론적 사건으로 돌리는 것이다.
존재론적 관계는 신체를 벗어난 관계가 아니다. 자아와 자기 사이의 관계는 조용한 정신의 자기 반조가 아니다. 인간의 물질성 전체가 바로 이 자기와의 관계에서 존립한다.
자아의 자유와 그의 물질성은 이렇게 서로 조화를 이룬다. 익명적 존재 속에서 존재자가 출현한다는 사실과 결부되어 있는 최초의 자유는 자아가 자기 자신에게 결정적으로 매이게 되는 대가를 치른다…
고독이 비극적인 것은 타자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동일성 안에 포로로 갇혀 있기 때문이고 고독이 곧 물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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