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타자]는 시간을 존재자의 존재라는 존재론적 지평이 아니라 존재 저편의 방식으로,
다시 말해 타자에 대한 <사유>의 관계로 예감한다. 시간은… 타인의 얼굴 앞에서의 사회성의 여러 형식들을 통해서 경험할 수 있는 관계요, 전적으로 다른 이,
초월자, 무한자와 가질 수 있는 관계이다… 시간은… 그 통-시성 가운데서 타자의 타자성을 해치지 않으면서 오히려 <사유>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도록 보장해 준다.
[시간과 타자]에서 소략하게나마 제시하고자 했던 주요 주장은,
시간을 사유하되 그것을 영원성의 타락
(박탈)으로 사유할 것이 아니라 그 자체 동화될 수 없는 것, 절대로 다른 것, 경험에 의해서 동화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것, 또는 그 자체 무한한 것,
개념적 이해에 스스로를 내맡기지 않는 것과의 관계로서 사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치의 불가능성, 부적합성, 이것은 단순히 부정적 개념이 아니라 시간의 통-시성 안에 주어진 불일치의 현상 가운데서 의미를 가지는 개념이다.
시간은 이 불일치가 언제나 있음을 뜻하고 또한 갈증과 기다림의 관계가 언제나 있음을 뜻한다.
1948년의 이 글에서는 시간 안에서의 초월에 관해서 간단하게 묘사했을 뿐이었고 그것도 기껏해야 예비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여기서 지침이 되었던 것은 통-시성으로 지칭되는 초월과 타인의 타자성에 개입된 거리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이었으며 또한 초월의 사이 공간을 가로지르는 (각 관계항의 연결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연결에 대한 강조였다.
주체성에 관해서는, 자아는 존재의 익명적 있음을 지배한다는 것,
자기는 자아로 곧장 되돌아온다는 것,
자아는 자기 자신에 의해 방해받는다는 것, 그리하여 유물론자의 물질성과 내재의 고독에 사로잡힌다는 것, 노동과 아픔과 고통 가운데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의 짐을 짊어진다는 것 등을 말하였다. 이어서, 세계에 관해서는 먹거리
(양식)와 인식을 통한 초월, 향유 가운데서의 경험, 자기 지식과 자기로의 복귀, 전 타자를 자신 안으로 흡수하는 인식의 빛 안에서의 고독,
본질적으로 하나인 이성의 고독에 관해서 말하였다. 그 다음, 죽음에 관해서 말한 것은 죽음이란 단순한 무가 아니라 소유할 수 없는 신비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내재의 동일자 속을 침투하며, 고독화된 순간의 단조로움과 똑딱거리는 시계소리를 깨뜨릴 수 있는 사건의 발생 가능성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전적으로 다른 것, 미래, 시간의 시간성의 발생 가능성이다. 여기서 통-시성은 바로 절대적으로 밖에 있는 것과의 관계를 지칭한다. 끝으로, 타인, 여성적인 것, 아이에 대한 관계에 관해서, 자아의 생산성,
통시성의 구체적 존재 양태, 시간 초월의 분절과 불가피한 탈선에 관해서는,
동일자가 타자 속에 흡수되는 무아경이나 타자를 동일자로 귀속시키는 지식이 아니라 관계 없는 관계, 채울 수 없는 욕망, 또는 무한자의 가까움임을 말하였다.
인간의 타자성은 순전히 형식적이고 논리적인 타자성을 출발점으로 해서 사유되지 않는다… 초월적 타자성,
즉 시간을 열어 주는 타자성의 개념은 무엇보다도 내용의 타자성, 즉 여성성을 출발점으로 해서 추구되었다… 얼굴은 성의 차이를 벗어나 있지만 에로티시즘에는 본질적인 요소이며, 여기서 타자성은, 단지 논리적 구별로서가 아니라 성질로서, 얼굴의 침묵 자체가 말하는 <살인하지 말라>는 말을 통해서 지탱된다. 에로티시즘과 리비도는 윤리적으로 의미가 있다.
끝으로 우리는 [시간과 타자]에서 아버지의 존재를 통해서 살펴 본 초월의 구조를 강조해 두고자 한다.
아들에게 주어진 가능성은 아버지가 소유할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선 자리에 있지만,
그럼에도 어떤 의미에서는 여전히 그의 것으로 남아 있다. 이것은 바로 부모로서 볼 때 그렇다. 그의 것—또는 차이가 없지 않은 것—타자를 소유할 수 있는 가능성:
아들을 통해서 가능한 것 너머의 가능성이 열린다! 차이가 없지 않음,
이것을 통해서 자아는 가능한 것 너머로 넘어갈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비생물학적 개념인 자아의 생산성에서부터 출발할 때,
지향적 행위의 중심이요, 원천으로서의 초월적 주체성으로 구체화된 할 수 있음의 이념 자체를 문제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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